Chapter: 198
내가 파트란 공작 부부를 만나게 된 것은 조이와 함께 영지를 돌아다닌 다음 날이었다.
아침식사자리에 먼저 도착해 있던 두 사람은 얼마 전까지 일을 하다 온 듯 피곤해 보였다.
공작 부부나 되는 사람들이 다급히 처리해야 하는 일이라니.
궁금하긴 했지만 난 그를 물어볼 수 없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신가요. 허술 공작. 허약 부인.”
그 전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생겨 버렸거든.
눈살을 찌푸리는 것만으로 아랫사람을 기절 시킨 적이 있는 파트란 공작과 아침 드라마에서 악역을 맡으면 잘 어울릴 듯한 파트란 공작부인은 내 인사를 받고는 살짝 굳어버렸다.
어느 쪽이건 외모만으로 파트란 가문의 악평을 만들어낸 사람들이다.
알른 가문의 사람들 덕분에 사나운 인상에 익숙해진 나지만 저 둘은 격을 달리했다.
아무런 말도 안하고 있는데 식은땀이 절로 나네.
모니터 너머로 볼 때는 사람이 무섭게 생겨 봐야 한계가 있다고. 텍스트라고 너무 과장한 거 아니냐 생각했거든?
아냐.
게임 속 설명에는 과장이 하나도 담겨 있지 않았다.
이 두 사람이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면 그것만으로 이미 영화의 한 장면이 완성될 지경이니까.
무슨 장르냐고? 범죄 스릴러나 공포영화. 어쨌든 그런 종류.
“푸하하하.”
짧았지만 영원 같았던 침묵은 공작의 우렁찬 웃음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저 말 뒤에 갑자기 정색을 하곤 저 년 죽여. 라는 대사를 내뱉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지만 공작은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우리에게 저리 당당히 이야기하는 아이가 얼마만인지.”
“그러게요. 조이에게 들었던 대로 무척 당찬 사람이네요.”
저 둘은 생긴 것만 저렇지 실제로는 좋은 사람이다.
서로를 사랑하고, 가족를 아끼고, 영지가 더 나은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노력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주라는 단어를 그대로 박아 넣은 듯한 분들이지.
당연히 내 무례도 좋게 받아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왜 쫄았냐고?
공포영화 볼 때 유령이 갑자기 튀어나올 걸 알아도 나오면 놀라잖아. 그거랑 비슷한 거야.
알고 있어도 저 앞에 서면 자연스럽게 쫄린다고.
혹시나 게임하고 다르면 어쩌나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고.
“잘 놀다가 가렴.”
파트란 영지에 온 후 최대의 위기를 넘긴 나는 조이와 함께 거리로 나섰다.
“기대가 되네요. 이번에야말로 축제의 학살자가 되고 말겠어요.”
그녀의 입에서 축제의 학살자라는 단어가 나온 걸 보면 알겠지만 이건 단순한 퀘스트는 아니다.
그보다는 파트란 영지에 내려오는 전통이라고 해야겠지.
축제의 학살자라는 것은 파트란 가문 축제에서 가장 많은 노점에서 승리를 거둔 이에게 주어지는 칭호다.
지위. 성별. 나이를 따지지 않고 축제에 참여한 모든 이들이 경쟁해서 그 곳에서 최고의 성적을 거머쥔 자만이 축제의 학살자라 불릴 수 있지.
조이가 진지한 걸 보면 알겠지만 저 칭호가 마냥 가벼운 녀석은 아니다.
이 축제에 참가하는 이들 중에선 진심으로 저를 노리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러니만큼 노점을 운영하는 이들도 진심이다.
진지하게 도전자들을 박살내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단 소리다. 상대가 누구건 간에.
“왜 궤도가 뒤틀린 거지? 분명.”
“안타깝군요. 파트란 영애.”
“…저 한 번 만 더 안 되겠습니까?”
“안 되는 걸 아시잖습니까.”
노점상의 단호한 어투에 조이가 어깨를 내린다.
노점마다 주어진 기회는 단 한 번 뿐.
이 룰은 공작 가문의 영애라 할지라도 어길 수 없다.
조이가 옆으로 물러섬에 따라 내 차례가 찾아왔다.
노점상은 내 얼굴을 보고 살짝 굳었지만 따로 무어라 말을 더하진 않았다.
그 대신 내 손에 마법이 저장된 스태프를 쥐어 주었다.
이 스태프는 놀이용으로 만들어진 물건이다.
이 안에 내장되어 있는 것은 아주 약한 매직미사일.
이걸로 노점 저 멀리에 있는 표지판을 맞추면 된다.
말만 들으면 쉬워 보이겠지만 아직까지 내가 설명하지 않은 부분이 하나 있다.
바로 매직미사일로 맞춰야 하는 표적이 패턴을 예상할 수 없는 괴상막측한 궤도로 움직인다는 것.
앞서 말했듯 노점상 또한 이 승부에서 진심이다.
이게 무슨 소리냐.
이 인간들 밥 먹고 일 할 때를 제외한 시간엔 항상 맞추기 어려운 궤도를 구상하고 연습한단 이야기다.
“표지판은 스무 개. 스태프 안에 보관되어 있는 마법도 스무 발. 모두 적중하시면 승리입니다.”
스태프를 손에 쥔 나는 이 승부에서 내 손으로 승리할 수 없음을 직감했다.
나 마법 거의 못 다루니까. 그래서 나는 괜한 객기를 부리는 대신 유희의 팔찌를 사용했다.
그러자 내 몸이 제멋대로 움직이며 최선의 동작을 펼친다.
“역시 알른 영애. 마법에도 깊은 조예가 있으셨군요!”
“정말 대단하시군요. 저희가 오랫동안 고민해 만든 궤적을 저리 쉽게 파훼하다니.”
유희의 팔찌라는 아이템은 단적으로 말해 예능용으로 만들어진 아이템이다.
그 효과는 이렇다.
하루에 네 번까지 미니게임에서 승리할 수 있다.
전제조건도 뭣도 필요치 않다. 미니게임이라면 하루에 네 번 반드시 승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만 이야기하면 사기템처럼 들리는데 여기에 한 가지 맹점이 존재한다.
악용을 방지하기 위해서인지 미니게임이라는 조건을 다소 과하다 싶을 정도로 한정시켜 놨거든.
퀘스트 진행 중에 발생하는 미니게임에만 사용할 수 있다는 식으로.
사용처가 무척이나 한정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고인물 사이에선 나름 필수템 취급이었어.
미니게임이라는 게 처음에나 신선하고 재밌지 시간이 지나면 귀찮은 잡일이 되어버리니까.
유희의 팔찌는 게임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제대로 효과를 발휘했다.
표적이 모두 부서져 바닥에 널부러진 것을 확인한 나는 텅 빈 스태프를 노점상에게 되돌려 주었다.
그러자 한 박자 늦게 박수소리가 들려온다.
그 시작점은 조이였다.
“정말 대단해요. 알른 영애. 마법사인 저조차도 노점에서 승리하지 못했는데.”
그녀가 순수히 감탄함에 따라 옆에 있던 이들이 하나 둘 박수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내 평판이 어쨌든 간에 옆에서 공작 영애가 박수를 치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이 어찌 그 눈치를 보지 않겠는가.
그에 따라 단순한 칭찬을 넘어 환호성 비스무리한 것을 받게 된 나는 애매한 웃음을 지었다.
어.
음.
그러니까.
칭찬해주니까 좋기는 한데.
이런 걸 기대한 적이 없어서 기쁨보단 당혹스러움이 먼저 느껴지네.
무대 위에 선 아찐이 된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저들의 환호를 감당하기 어려웠던 나는 조이를 데리고서 급히 그 자리를 빠져 나왔다.
이후로도 나와 조이는 노점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승부를 겨뤘다.
언제나 승리한 것은 아니었다.
아직까지 몸이 완벽히 회복되지 않은 탓에 조이마냥 실없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고.
단순한 운의 대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이스 갓께서 잠시 다른 곳을 쳐다보는 바람에 패하기도 했지.
허나 대부분의 경우에는 다이스 갓께서 나를 보우하셨고 그 결과 점심 무렵이 될 때까지 나는 다섯 번의 승리를 챙길 수 있었다.
이제 내 힘으로 두 번만 더 이기면 돼.
그러기만 하면 남은 세 번은 유희의 팔찌가 알아서 생겨줄 거야.
후후. 봤냐! 허접 주신!
네가 아무리 횟수를 늘려가며 억까를 해도 이 고인물 앞에서는 무용해!
평판 어떻게 올려줄지 생각 안 해놨으면 지금부터라도 해 놓으라고!
혹시나 싶어서 말해두는데. 원래 퀘스트 보상만 주고 넘어갈 생각은 하지 마.
억까했으면 그만큼 보상을 늘려줘야 하지 않겠냐. 응?
이미 마음속으로 승리를 확정지어둔 채 여유를 부리고 있던 나는 저 멀리서 웅성이는 소리와 함께 갈라지는 인파를 보고서 고갤 갸웃거렸다.
뭐지? 나 말고도 인파 가르기를 쓸 줄 아는 사람이 있는 거야?
걸어가다 말고 웅성임이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 나는 익숙한 얼굴 하나와 결코 만나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얼굴 하나. 그리고 그 둘을 호위하는 삼엄한 병사들을 발견했다.
“형님. 잠시.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한 쪽의 이름은 아서 솔라딘.
왕국의 3왕자이자 소울 아카데미에서 나를 좋게 생각해주는 몇 안 되는 사람.
“저기에 있구나. 아우야.”
다른 한 쪽의 이름은 르나 솔라딘.
왕국의 1왕자. 소울 아카데미 왕국 스토리의 최종보스를 담당하는 이.
그와 동시에 과거 루시에게 음침한 좆밥 외톨이 왕자라 불렸으며 결코 나를 좋게 생각할 수 없는 사람.
저 인간이 도대체 왜 여기에 등장한 거야?!
게임 스토리대로라면 수도에 틀어박힌 채 나오지 않는 사람인데?!
이건 또 무슨 변수지?
뭐 때문에 게임과 이야기가 달라진 거지?!
베네딕인가?!
베네딕이 저 히키코모리한테 용기를 불어 넣어 준 건가?!
내가 패닉에 질린 와중에도 두 사람은 계속해서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인파가 갈라지는 것이 당연했다.
현 왕국의 계승권을 지닌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그 누가 감히 예를 지키지 않겠는가.
정신이 나간 게 아니라면 저 알아서 고개를 숙이겠지.
그런 의미에서 하는 이야기인데.
난 정신이 나간 게 맞는 것 같아.
반 강제로 정신이 나갔다고 해야 하나?
“알른 영애?! 뭐 하시는 건가요!”
왕자 둘의 모습을 보고 예를 표하던 조이는 꼿꼿이 펴져 있는 내 고개를 보고서 경악했다.
알아. 미친년처럼 보이는 거.
근데 어떡하냐고! 메스가키 스킬이 고개 숙이는 걸 허락해주지 않는데!
나도 마음 같아서는 예의를 표하고 싶단 말이야!
무릎 꿇고 과거의 잘못을 사과하면서 빌고 싶다고!
그치만 어떡해! 메스가키 스킬이 말을 안 듣는 걸!
나는 필사적으로 노력을 해보았지만 내 의지보다 메스가키 스킬의 의지가 강했다.
1왕자와 아서가 내 앞에 도착할 때까지 나는 고개를 바짝 들고 있었다.
“1왕자님과 3왕자님을 뵙습니다.”
“그래. 오랜만이군. 파트란 영애. 공작 가의 이름에 어울리는 사람으로 자라난 듯 해 정말 기쁘군. 이런 인재들이 있어 파트란 가문은 앞으로도 부흥할 것이야.”
조이를 향해 의례적인 이야기를 끝마친 1왕자는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은.
검은 색으로 칠해지다 못해 주변의 빛마저 빨아들이는 듯한 새까만 눈은.
정확하게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순간 확신했다.
베네딕이 아니다.
히키코모리 1왕자를 이 곳으로 불러낸 것은 그의 영향이 아니었다.
1왕자가 이 곳에 온 까닭은 오롯이 나를 만나기 위함이었다.
왠지는 모른다. 난 카리아처럼 남의 행동으로 마음을 읽을 수 없으니까.
허나 한 가지 분명한 건 있다.
결코 밝은 의도는 아닐 거란 거.
자신을 좆밥 외톨이라고 부른 사람을 만나러 오는 데에 어떻게 좋은 의도가 들어 있을 리가.
“본인을 무시하는 것인가?”
입을 열어봐야 폭탄이 터질 뿐이라 생각해 닥치고 있었지만 1왕자는 침묵을 허락하지 않았다.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해?!
이 상황을 돌파할 방법이 있나?!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보고 할배에게도 물음을 던져 보았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1왕자가 내 앞에 서 있는 한 이 상황에서 빠져나가는 건 불가능했다.
이건 분명한 외통수였다.
‘1왕자님과 3왕자님을 뵙습니다!’
“음침한 외톨이 왕자님과 불쌍 왕자님을 뵙습니다.”
와. 그래도 음침한 좆밥 외톨이 왕자에서 좆밥은 빠졌네.
장족의 발전이야.
이 정도면 다른 사람들도 좋게좋게 넘어가주지 않을까?
그리 생각을 하며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한결같이 싸늘했다.
으음. 역시 무리인가?
그럴 줄 알았어.
…하아아.
씨발.
좆됐네 이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