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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0

소녀의 첫 기억은 네 살 때였다.

사근사근한 말투와, 차가운 눈빛.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예쁘다고 하거늘, 소녀를 내려다보는 부모의 얼굴엔 애정 한 점 보이지 않았다.

“그거 아니? 옛날엔 탄광에 들어갈 때 카나리아라는 새를 데려갔대. 카나리아는 호흡기가 약해서 인간이 알아채지 못하는 유해한 기체에도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다고 해. 그래서 사람들은 카나리아가 죽거나 이상증세를 보이면 위험을 깨닫고 대피했다고 하더라고.”

죽음으로 위험을 알리는 새, 카나리아.

“그래서 네 이름이 ‘카나리아’란다.”

부디, 우리를 위해서 기꺼이 죽어주렴.

탄광의 작은 새야.

* * *

걱정이 뚝뚝 묻어나오는 얼굴.

누군가가 나를 보며 그런 표정을 짓는 걸 본 게 얼마 만일까.

사실 기간을 따질 필요도 없는 문제다.

애초에 다른 사람에게 이런 시선을 받은 적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으니까.

왕족파든 귀족파든 권력층에 붙은 녀석들은 조롱하고 비난하며 깎아내리기에 바빴고, 내 밑의 녀석들은 나의 무력을 잘 알기에 걱정하는 대신 믿음을 보냈다.

제국 놈들이야 당연히 나를 걱정할 리 없었고.

기억이 처음 시작했을 때부터 내가 받은 것은 애정 같은 따뜻한 것들과는 거리가 먼 감정들뿐이었으니, 나는 저런 표정을 짓는 저니가 무척이나 낯설었다.

…껄끄러워.

왠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참을 수 없이 간지러워졌다.

가려울 땐 긁어버리면 된다지만 지금 느끼는 가려움을 해소할 방법은 알지 못해서.

“카나리아 그라시스. 그게 내 이름이야.”

올곧게 다가와 나에게 부딪치는 마음에서 눈을 돌리고, 주제를 모르고 달려드는 파리 떼를 정리하고 나니 비로소 간지러움이 가라앉았다.

나는 검을 가볍게 털며 유일하게 남은 파리를 향해 걸어갔다.

다행히 검이 가루가 되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커, 크헉…!”

“안타깝네.”

너도 참 불쌍한 놈이구나.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뱀 새끼의 눈 밖에 난 거니.

사람은 가끔, 자신이 한 선택이 오롯이 자신의 의지로 행한 것이라고 착각하곤 해.

당연한 일이지. 거대한 존재가 있다는 걸 인지조차 못했는데 그 존재가 제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걸 어떻게 알겠어.

이 녀석의 경우엔 그게 뱀이었던 것이고.

어쩌면 나 또한 마찬가지일지도 모르지.

“하다못해 네게 시간이 더 있었다면 몰랐을 텐데.”

전심전력을 다한 공격은 아니라고 해도 죽이려고 한 공격에서 살아남은 걸 보면 재능이 없는 놈은 아니다.

말 그대로 살아만 있는 꼴이지만, 어쨌든 재능 있다고 하는 편이 맞겠지.

하지만 어쩌겠어, 나는 나를 죽이려고 한 놈을 살려줄 정도로 무른 성격이 아닌걸.

나는 무심하게 검을 들어 올렸다.

단장은 갑옷째로 잘려 나간 허리를 부여잡고 연신 숨을 헐떡였다.

“사, 살려줘….”

“아, 이건 아는 말이다.”

분명 살려달라는 뜻이었지?

“응, 유감.”

푹.

“끄르륵….”

피거품 무는 소리와 함께 눈에서 빛이 사라지고, 생명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느낌이 손끝을 통해 생생하게 전해졌다.

새삼스러울 건 없었다.

부업으로 고양이 인형에 눈을 달던 사람이 어느 날 강아지 인형에 눈을 단다고 해서 특별한 감상이 들 리가 없잖아.

나에게 있어서 이 일은 딱 그 정도의 일이었다.

아, 그래도 검은 쓰지 말 걸 그랬나.

기껏 빌려준 걸 더럽혀서 돌려주려니 찝찝하네.

“잘 썼어.”

아쉬운 대로 피만 적당히 털어내고 저니에게 검을 돌려줬다.

그런 내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걸까. 그녀는 내가 내민 검을 받는 대신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라시스라니…. 와, 왕족이었던 거야?! 어쩐지 범상치 않은 외모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이러다 나 불경죄로 잡혀가는 거 아냐? 어차피 멸망했는데 무슨 상관이냐고? 아니, 그래도…. 어? 그냥 직접 물어보라고?”

아르키쉬로 열심히 중얼거리던 그녀가 조심스럽게 내게 물었다.

“카나, 그라시스?”

그녀는 손가락으로 머리 위에 삐죽빼죽한 무언가를 그렸다. 마치 왕관 같은 모양새였다.

어눌한 그라닉이었지만 그녀가 뭘 말하고 싶은 건지는 알 수 있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무슨 그런 끔찍한 소리를!

하는 것도 없이 성에 박혀서 사치만 부리던 놈들과 같은 피가 흐른다고 생각하니 온몸에 털이 쭈뼛 섰다.

그라닉을 알고 있는 걸 보면 나름대로 그라시스에 대해 알아본 모양인데 여기까진 모르는 건가.

하긴, 귀족 정도는 돼야 알 수 있는 내용이니 그럴 수 있지.

그라시스의 시초와 관련된 케케묵은 관습 같은 거라서 사실상 껍데기뿐인 성이거든.

‘지그리드 모험기’의 내용대로 그라시스는 초대 왕 지그리드가 레드 드래곤 ‘그라시드’의 도움을 받아 건국한 나라다.

자신의 이름을 따 국호를 정하는 지그리드의 정성이 갸륵했던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건지.

이유는 몰라도 그라시드는 지그리드에게 그라닉이라는 언어와 보물을 주었고, 그 보물이 바로 ‘그라시드의 가호’라는 이름의 반지였다.

그라시드가 만들고 마나를 불어넣은 반지는 그라시스에 있어 무엇보다 귀중한 보물이 되었지만….

반지의 힘이 너무 강력한 탓에 다룰 수 있는 사람이 극히 적은 게 문제였다.

보물고에 보관하자니 아깝고, 왕이 쓰려니 다룰 수가 없고, 그렇다고 반지를 다룰 수 있는 사람에게 대뜸 줄 수도 없고.

이에 고민하던 지그리드는 묘안을 냈다.

기사단을 만들어 그라시스에서 제일 강한 사람에게 기사단장 직위를 내리고 그에게 그라시드의 가호를 맡기기로.

왕국을 지키는 자리이니 ‘그라시드의 가호’라는 이름과도 어울리고, 그라시드의 안배로 칼끝을 왕족에게 겨눌 수도 없었으니 거리낄 것도 없었다.

그리고 레드 드래곤을 숭상하는 그라시스의 정서상 극히 일부일지라도 드래곤의 마나를 다루는 사람을 홀대할 순 없었으니, ‘그라시스’라는 성을 주고 중히 여겼다.

일종의 대리인 느낌이랄까.

사실상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꼴이지.

중히 여기기는 개뿔, 시간이 지날수록 퇴색되던 의미는 내 때에 와선 완전히 허울뿐인 유명무실한 관습이 되었다.

그러니 그런 것과 거리가 먼 일반 왕국민들은 모를 수밖에. 왕실에서도 의례 때나 거론되는 성이었거든.

아무튼, 그런 이유로 내가 그라시스라는 성을 가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홍염 기사단의 마지막 단장이었으니까.

‘-라고 말해봤자 어차피 못 알아듣겠지.’

그래서 구태여 설명하는 대신 가벼운 부정으로 저니의 의문을 넘겼다.

저니는 여전히 영문을 알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아니라는 건가? 아니라는 거겠지? 아씨, 그럼 뭐지…? 아니, 그보다 지금은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보면 볼수록 참 혼잣말이 많단 말이지.

그만 중얼거리고 어서 가져가라는 뜻을 담아 재차 검을 내밀자 저니가 허둥지둥 받았다.

그러더니 내 눈치를 살피고 별안간 허리를 푹 숙였다.

나는 갑작스럽다 못해 뜬금없는 그녀의 행동에 그만 벙쪘다.

“미안. 비밀, 이름.”

“아.”

더듬거리는 그라닉을 듣고 나서야 나는 저니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고작 세 단어로 이루어진 사과.

하지만 어째서일까, 어눌하게 발음한 세 단어가 나에게 깊게 와닿았다.

반응을 보아하니 저니로 인해 퍼진 건 맞는 거 같긴 한데, 제국에게 일러바친 건 그녀가 아닌 것 같고….

겁쟁이 주제에 제국과 맞선 걸 보면 제 잘못을 돌이키기 위해 노력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왠지는 몰라도 그녀를 보고 있으면 애써 억눌렀던 간지러움이 다시 고개를 빼꼼 내밀려고 해서.

“뭐… 됐어.”

나는 그녀의 눈을 슬쩍 피했다.

그리고 벗겨졌던 후드를 눌러쓰기 위해 손을 휘적이다가, 연결 부분이 찢어졌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머쓱하게 머리를 매만졌다.

“그, 내가 고쳐 줄까?”

“…?”

“수선, 수선 해줄게.”

죄스러운 눈으로 보던 저니가 이번에는 손을 휘적였다.

한쪽 손으로 널찍한 무언가를 붙잡고 다른 손으로 기다란 무언가를 잡은 모양새.

“‘수선’…?”

“응! 수선!”

그러니까, 고쳐 주겠단 말인가?

멀뚱히 보고 있으니 저니가 손을 다시 움직였다.

이번에는 조금 더 바느질에 가까운 손동작이었다.

고개를 잠시 기울였다가 별생각 없이 수락했다.

어차피 망가진 옷. 정말 수선을 해주든 가져가서 팔아먹든 상관없으니까.

그래도 가능하면 고쳐줬으면 좋겠네.

케이프를 벗자 한 줄기 바람이 팔을 스쳐 지나갔다.

터벅.

“안녕.”

“대검 삐약이?”

저니와 대화하고 있을 때 대검을 들고 싸우던 사도가 한 걸음 다가와 나에게 알은체했다.

그러고는 내 키 정도 될 법한 대검을 들이밀었다.

“나랑 싸우자.”

“…?”

“유키 님!”

“야!”

적의는 없는 것 같은데.

내게 들이밀어진 대검을 보고 고개를 기울이니 외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더 난리를 피웠다.

저니야 워낙 많이 봐서 알고 있고.

뒤의 남자는, 음….

에델의 가호 탓에 얼굴은 여전히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이쪽은 다른 의미로 익숙한데.

나랑 몇 번이나 칼을 맞댄 적 있는 것처럼 말이야.

그치?

빠안.

삐질.

“….”

“….”

“…하, 하하.”

…조금 마음에 안 들긴 하지만 날 잡겠답시고 오는 제국 놈들과 싸운 성의를 봐서 한 번은 봐준다.

대신 두 번은 없어.

모른 척 눈을 돌리니 안도하며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대검 삐약이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감정을 읽기 위해 노력했다.

대검 삐약이의 눈에는 잔잔한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다.

‘아하.’

간혹 이런 사람들이 있지.

호승심이 높아서 자신보다 뛰어난 상대라 해도 겁먹지 않고 주저 없이 달려드는 부류.

이런 부류는 보통 자기 향상심도 높아서, 꿍꿍이셈 같은 걸 꾸밀 시간에 솔직하게 부딪혀 오는 만큼 싫어하진 않는다.

단지, 그게 내 대상인 게 귀찮을 뿐.

고민하던 나는 대답 대신 저니에게 손을 뻗었다.

“…응?”

“검, 한 번만 더 빌려줘.”

특히 이 대검 삐약이는 싸울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무시해도 끝까지 쫓아다니면서 귀찮게 할 유형이라 차라리 원하는 대로 해주고 보내버리는 게 낫다.

“아니 유키 님, 그걸 보고 진짜로 싸운다고요? 제정신이에요? 진짜? 진짜로?”

“오히려 더 즐겁지 않아?”

“전혀요.”

저니가 대검 삐약이의 어깨를 짤짤 흔들었지만 대검 삐약이는 요지부동이었다.

“어차피 못 알아듣겠지만, 죽이지만 말아줘….”

나는 허허로이 웃으며 검을 내미는 저니에게 어깨를 으쓱였다.

역시 뭐라는지 모르겠네.


           


I Became a Raid Boss

I Became a Raid Boss

레이드 보스가 되었다
Score 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One day, when I came to my senses, I found myself reincarnated in another world. After enduring a rough life post-reincarnation, I thought I could finally settle down, quietly tending to a flower garden in the mountains… …But something feels o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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