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02
식사 자리에서 루시가 갑작스레 떠나가 버리고 난 후 아서는 루시를 따라가려 했으나 조이가 그를 말렸다.
“보통 알른 영애께서 이상한 행동을 할 때엔 다 이유가 있더라고요.”
어색한 웃음과 함께 전해진 조이의 설명에 무어라 반박하려던 아서였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녀의 말이 옳았다.
아카데미에 오고 나서 루시를 볼 일이 많았던 아서다.
그는 루시의 이런저런 행동에 의문을 가졌지만 시간이 지나 돌이켜 보면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에는 이유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당장에 그녀가 아서를 불쌍 왕자라 칭한 데에도 무언가 까닭이 있으리라 추측되는 것이 현상이지 않은가.
그가 루시를 이기고자 하는 것도 그녀의 입으로 이 의문을 해결하기 위함이고 말이다.
“예전에 알른 영애가 기행을 벌일 때면 또 저러시네.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요즘엔 아니에요. 과거의 영애와 지금의 영애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니까요.”
아서는 조이의 생각에 동의했다.
처음 루시 알른이라는 사람을 만났을 때에는 예의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멍청이라 생각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소울 아카데미의 역사를 새롭게 쓰고 있는 천재의 앞에 멍청함이라는 단어가 가당키나 한가.
그녀는 예의와 의례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 적어도 아서가 보기에는 그랬다.
그런 그녀가 별다른 설명도 않고 자리를 뜬 데에는 무언가 이유가 있겠지.
조이의 설명에 납득한 아서는 일어나려다 말고 자리에 앉더니 다리를 꼬았다.
“조이. 그런 의미에서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다만.”
“뭔가요? 3왕자님?”
“그녀가 형님을 음침한 외톨이 왕자님이라 부른 데에도 무언가 이유가 있을까?”
“어.”
“모두가 보는 자리에서 형님을 향해 징그럽고 기분 나쁘다는 이야기를 한 데에도 본인이 추측할 수 없는 이유가 존재할까?”
“…글쎄요.”
평소 루시가 하는 일을 좋게 해석하려는 조이지만 이 물음에는 차마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러기에는 그녀가 벌인 일의 경중이 심각했으니까.
1왕자께서 좋게 넘어가지 않았다면. 루시가 알른 가문의 영애가 아니었더라면. 지금쯤 루시는 불경죄로 잡혀 들어가지 않았을까.
조이가 차마 변호를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으려니 아서가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알겠나. 조이. 그녀의 기행에는 이유가 있는 경우도 있지만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경우도 분명 존재한다는 것을.”
과거의 루시는 사라진 것이 아니다.
약화되었을 뿐 여전히 그 자리에 존재한다.
조이는 그 말을 듣고 무심코 고갤 끄덕여 버렸다.
그녀의 오빠를 음흉 공자라 부른 것이나. 그녀의 부모를 향하여 이상한 별명을 붙인 것이다. 그녀 자신을 얼빵 영애라 부르는 것이나.
어느 하나 억지스럽지 않은 게 없었지만 루시는 그를 꿋꿋이 밀어 붙였다. 그것은 분명 이유 있는 기행은 아니리라.
“어찌 보면 지금의 그녀가 더 악질적이군. 예의가 무엇인지 알면서도 하고 싶단 이유로 선을 넘는단 것이니까.”
“그…그렇지만 알른 영애는 좋은 분이에요.”
“반박할 말이 떨어졌나보군. 얼빵 영애.”
이겼다는 말과 함께 웃으며 숟가락을 드는 아서의 모습에 조이는 속으로 한 가지 결심을 했다.
식사가 끝나고 함께 축제를 돌아다니면서 얼빵 영애한테 지니까 기분이 어때요? 라는 말을 해주고 말 것이라고.
허나 그녀의 결심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조이가 여러 노점에서 아서에게 패한 것도 이유라면 이유였지만,
어디를 가더라도 아서가 1왕자와 루시가 만들어낸 기록에 밀려 분해하고 있었기에 도저히 건드릴 수 없었단 게 더 컸다.
콰앙!
전력을 다해 망치를 내리친 아서였지만 그 아래에 있는 판은 금이 갔을 뿐 형체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아쉽지만 실패입니다. 3왕자님.”
“무언가 잘못 됐다. 보라! 거의 부서지기 직전이지 않은가!”
망치를 이용해 얼마만큼의 위력을 낼 수 있는지를 대결하는 노점.
그 곳에 들른 아서와 조이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루시와 1왕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방금 봤는가? 1왕자님께서 힘을 내시니 나무판이 가볍게 박살나 버렸잖아.”
“대단했지. 역시 왕가의 피를 이으신 분이야.”
“근데 솔직히 1왕자님은 놀랍진 않았어. 당연히 성공하실 분이니까.”
“그것도 그렇지.”
“그것보다는 알른 가문의 영애가 신기했지.”
“맞아. 그 작은 몸에서 어찌 그런 힘을 낼 수 있는 것인지.”
“알른 가문의 핏줄이 무섭긴 하군. 그녀도 훗날 대륙을 호령하게 될까.”
아서와 조이는 어디 노점에 들를 때마다 이런 이야기를 들어야만 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서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당연하다는 듯 1왕자의 이야기가 따라 붙는데다가, 루시가 여러 노점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준 탓에 동년배로 보이는 그를 루시와 비교하게 되었으니까.
보통이라면 그냥 감탄하고 말면 끝이다. 조이도 두 분 다 엄청 대단하시네요. 라고 생각하고 말았으니까.
허나 아서의 경우에는 이야기가 달랐다.
그는 두 사람을 자신이 넘어서야 할 상대라 규정하고 있었기에.
1왕자는 동경의 대상이자 따라잡고 싶은 존재임과 동시에 그가 살아오며 끊임없이 비교당해야만 했던 사람이다.
그가 무엇을 달성하더라도 앞서 1왕자가 만들어 놓은 그림자에 가려지기 마련이었으니.
아서가 자신의 천재성에 자부심을 가지지 못하는 까닭이 바로 1왕자였다.
다른 한 사람인 루시는 아카데미에 들어와 새롭게 생긴 라이벌이었다.
비슷한 나이 대에서는 따라 잡을 사람이 없을 만큼 빛나던 아서에게 처음으로 2등이라는 성적을 쥐어 주었던 상대.
처음 만났을 때엔 그녀의 무례함 탓에 루시를 적이라 규정했으나 지금은 아니다.
지금의 아서에게 루시라는 사람은 뛰어넘어야 할 목표이자 악우에 가까운 존재였다.
자신이 이겨야 할 상대를 관중이 칭찬하고 있는데 어찌 아서가 발악하지 않을 수 있을까.
허나 지렁이의 꿈틀거림은 꿈틀거림일 뿐이었다.
그는 많은 노점에서 패배를 경험했고 승리한 곳에서도 1왕자는커녕 루시의 기록조차 따라잡지 못했다.
이런 일이 여러 번 반복되다 보니 아서의 신경은 상당히 사나워진 상태였다.
놀리기로 마음먹었던 조이조차 건드릴 수 없을 정도로.
“한 번만 더! 한 번만 더 한다면 분명!”
“저어. 그것이.”
곤란해하는 노점상의 모습에 아서를 말려야겠다고 조이가 생각하던 때에 저 멀리서 제프가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평소 무언가를 자주 빼먹어서 다급해지는 일이 잦은 조이와 달리 항시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는 제프다.
허나 지금 그의 표정은 결코 좋다고 할 수 없었다. 오라버니가 표정관리를 하지 못하시다니. 또 무슨 일이 벌어지기라도 한 걸까?
“허억. 헉. 조이. 3왕자님께서는 어디에 계시니.”
“저기에 계셔요.”
얼마나 필사적으로 내달린 것일까. 가쁜 숨을 내쉬던 제프는 다급히 심호흡을 하더니 아서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3왕자님!”
“흠? 제프 공자 아닌가. 여긴 어쩐 일이지?”
“다급한 일입니다. 1왕자님께서 알른 영애와 대결을 벌인다고 하십니다.”
“…허?!”
상식 바깥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아서는 순간 거짓말인가 의심했지만 눈앞의 사내는 이런 일로 장난을 칠 사람은 아니었다.
형님과 한바탕을 하고서 채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았거늘 또 다시 시비가 붙었다고?!
“어디지?”
“안내 드리겠습니다.”
방금 전까지 쥐고 있던 망치를 내려놓은 그는 다급히 제프의 뒤를 따라갔다.
제기랄. 루시 알른. 그대는 왕가에 무슨 원한이라도 있는 것인가?
도대체 하루에 사건 사고를 몇 개나 일으키는 것이냐!
이 정도면 베네딕 경의 위장에 구멍이 하도 나서 치즈가 되겠어!
상황 자체를 무마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내달린 아서였지만 안타깝게도 그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상황이 펼쳐지는 중이었다.
노점상을 중심으로 한 테이블에 1왕자가. 반대편에는 루시가 앉아서 종이에 무언가를 작성하고 있던 것이다.
“…늦어버렸나.”
아서는 그를 보고서 허탈한 듯 길게 숨을 내뱉었다.
대결이 시작된 이상 이를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1왕자가 제안하고 참여중인 저 대결에 어찌 아서가 말을 더하겠는가.
같은 왕자라도 아서와 르네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권위의 격차가 존재한다.
지금 이 순간 아서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저를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이미 시작됐네요.”
그가 입술을 살짝 씹고 있으려니 뒤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이가 그의 뒤편에 있었다. 꽤나 속도를 내었으니 뒤쳐질 것이라 생각했거늘 이를 어렵잖게 따라잡은 것인가.
“종목은 모의 던전 공략인가요.”
모의 던전 공략.
직접 던전에 들어가 던전을 공략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로 주어진 조건을 보고서 최적의 공략법을 짜내는 것.
아카데미의 필기시험에도 자주 등장한 것이기에 아서나 조이에게도 익숙한 것이다.
“그나마 잘 됐네요. 저거라면 알른 영애께서 이길 수 있는 종목이에요.”
“이겨도 문제고 져도 문제다.”
“그래도 이기는 게 낫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소울 아카데미에서 루시 알른은 던전학 교수의 악몽이었다.
교수가 어떤 문제를 짜내더라도 그녀의 기상천외한 공략법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었으니.
자신이 고안한 던전이 박살나는 풍경에 던전학 교수가 머리를 해집는 것을 아서는 몇 번이고 보았다.
“이길 수 있을까.”
아서는 루시의 실력을 알았지만 그와 동시에 르네 솔라딘이라는 천재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그조차도 올려다 볼 수밖에 없는 만능이자 최고인 1왕자의 재능을 말이다.
“끝났다.”
먼저 펜을 내려놓은 쪽은 1왕자였다.
그는 검토조차 하지 않고 노점상에게 자신의 종이를 내밀었다. 자신이 결코 실수할 리 없다 확신하는 것처럼.
두 손으로 공손히 그 종이를 받은 노점상은 그걸 노점 한 가운데에 존재하는 마법진 위에 올려 두었다.
그러자 마법진이 푸른빛으로 빛나더니 진위에 반투명한 이미지가 떠올랐다.
전위 하나. 후위 하나. 거기에 도적과 성직자로 구성된 정석적인 파티의 모습.
저들의 환상은 이제부터 1왕자가 작성한 대로 던전을 공략해나갈 것이다.
“놀랍습니다.”
“어찌 저리 정답만을 고를 수가 있죠?”
“미래를 보고 온 것만 같군요.”
“이 정도면 정답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수준입니다.”
1왕자의 공략방식은 정석 그 자체였다.
모든 변수를 고려해 그 중에 최선의 수만을 택하는 모습은 노점상에게 정답을 듣고 왔다 하더라도 놀라지 않을 수준.
그를 보던 관중은 모두 1왕자의 승리를 확신했다.
저보다 나은 공략법이 있을 리가 없다 생각했으니까.
허나 관중 중 일부. 소울 아카데미에서 루시 알른이 보인 수많은 기행을 아는 이들은 달랐다.
“저거면 알른 영애가 이겼네요.”
“내가 잘못 생각했군. 루시 알른의 승리를 상정하고 계획을 짜야겠어.”
더 이상 볼 것도 없다는 듯 이야기하는 아서와 조이의 모습에 그 뒤편에 서 있던 제프가 의아함을 느끼던 순간.
루시가 목소리를 냈다.
“허접하고 허술한데다 조잡한 던전이네. 너무 쉬워서 잘 뻔 했어.”
얄미운 웃음을 짓는 그녀의 모습에선 승리에 대한 확신 그 이외에 어떤 것도 느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