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06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제프가 앞으로 있을 일정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었다.
앞으로 몇 명의 사람들이 더 들어올 것이고 마지막에 1왕자와 3왕자가 함께 들어온 후. 파티의 본격적인 개최를 선언하면서 나를 앞으로 부를 것이라고.
그 때에 앞에 나와서 축제에 참가한 소감과 함께 준비한 말을 하면 된다고.
“사고를 치는 건 괜찮지만 수습할 수 있는 걸로 부탁드립니다.”
내가 사고를 지을 것이라 단정한 그 어투가 거슬렸다.
그럴 걸 알면 이 소감 발표를 면제시켜 달라고! 왜 굳이 나를 앞에 세우려는 건데!
파트란 공작의 명이라 어쩔 수 없다고?!
…그건 별 수 없지. 응.
제프가 떠나간 후로도 수많은 사람들이 파티장 안으로 들어왔다.
그 중에는 내가 아는 얼굴이 여럿 있었다.
악역도. 선역도. 짧게 지나가는 NPC도. 감동적인 사이드 스토리를 선사했던 이도. 개인적으로 만나보고 싶었던 이도.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파트란 공작 가문에 초대될 정도면 무언가를 대단한 것을 지닌 이들이다.
권위건 명예건 실력이건 혈통이건 뭐건 간에 파트란 공작 가에 인정받을 만한 게 있다는 소리지.
이런 사람들은 대륙에 큰 영향력을 끼치기 마련이고, 영향력이 크다는 말은 곧 비중이 크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니 내 눈에 익숙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들어오는 이들의 얼굴을 보며 게임 속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자니 불안으로 가득하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진정되는 게 느껴졌다.
현실도피 아니냐고?
맞아.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현실도피라도 안 하면 마음이 부러질 것 같단 말이야!
나를 미워하는 사람으로 가득한 파티장 중심에 서서 여자애한테도 지는 개허접♡ 어른 실격♡에 인간실격♡ 같은 소리를 내뱉어야 할 텐데 현실도피라도 해야지!
<여아야.>
‘왜요?!’
<저 자를 아느냐?>
할배가 꺼낸 말을 듣고 고개를 든 나는 이 쪽을 노려보고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내가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페도 새끼라 생각하며 넘겨버렸을 터이나 이번에는 아니었다.
난 저 자를 알고 있었다.
기억하던 것보다 좀 더 표독스러운 얼굴이 되었으나 그저 그 뿐. 내가 어떻게 왕국 쪽 스토리 보스 중 하나로 출현하던 이를 착각하겠는가.
게임 속에선 왕국 최강의 기사라 불렸던 자.
자신의 강함에 끝없는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기에 추한 발악 속에서 죽음을 맞이했던 이.
타볼 데메실.
‘왕국 기사단장…일 거에요.’
아마 그럴 것이다.
베네딕이 있으니만큼 왕국 최강의 칭호는 얻지 못했겠지만 기사단장의 자리마저 빼앗기진 않았을 테니.
<혹시나 하여 묻는 것이다만 저 자에게도 무언가를 했느냐?>
‘그건 왜요?’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눈으로 그댈 바라보지 않을 터.>
확실히 타볼의 눈은 사납다. 증오스러운 무언가를 바라보는 것처럼.
…루시. 또 뭐 한 거야? 저 무서운 아저씨한테 도발을 한 거야?!
안 봐도 뻔해. ‘우리 파파한테 처발리는 개허접 약골 주제에 기사단장이라니. 진짜 개 웃겨.’ 같은 소리를 한 거겠지.
왕한테도 돼지라는 소리를 하는 녀석이 기사단장이라고 아무 말도 안 했겠냐.
이젠 이런 상황에도 익숙해져버린 나는 반쯤 체념한 상태에서 그 시선을 넘겨버렸다.
어차피 나중에 조져야 하는 아저씨인 걸. 지금 미움 좀 사면 어떠냐.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이 거대한 파티의 마지막을 장식할 손님이 등장했다.
먼저 들어온 쪽은 3왕자 아서 솔라딘이었다.
그가 입장함에 따라 모두들 박수를 쳤지만 그 시선은 대개 미적지근했다.
나보다 이런 데에 익숙한 아서이니 그 시선을 눈치 챘을 터이나 그는 무덤덤한 얼굴로 공작의 앞으로 가서 인사를 끝마쳤다.
그 후에 이 파티의 하이라이트가 등장했다.
1왕자. 르네 솔라딘.
그가 입장함에 따라 쏟아진 환영의 인사는 아서 때와는 격을 달리했다.
파티장을 울리는 박수 소리. 열의에 찬 사람들의 눈. 환호성.
모두들 훗날 왕위를 이을 것이 반쯤 확실시 된 이에게 눈도장을 찍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 중에는 어쩔 수 없이 박수를 치고 있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는 권력에 관심이 없거나 2왕자가 왕이 되기를 기대하는 이들이었다.
“초대해주어 감사하네. 파트란 공작. 오랜만에 즐거운 시간을 보냈어.”
“왕자님께서 즐거우셨다니 저도 보람을 느끼는 군요.”
의례적인 인사가 끝나고 1왕자가 물러선 후 파트란 공작이 단상 가운데에 서더니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짤막한 동작이 끝나자마자 그의 앞에 마법진이 그려진다.
음성증폭마법.
지난 번 현장학습 때 조이가 사용해주었던 것.
그 때 조이는 저거 하나 만든다고 몇 십 분을 끙끙거렸는데. 파트란 공작은 손장난만으로 저걸 만들어내는 구나.
역시 왕국 측 거대 전력 중 하나야.
“크흠.”
공작이 짧게 헛기침을 함에 따라 모두의 시선이 그 쪽으로 모여 든다.
어느 하나 저 곳에서 눈을 떼는 이가 없다.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이번 파티를 개최한 파트란 공작입니다.”
나도 그렇다. 왜냐면 공작이 개회사를 시작한다는 이야기는 곧 공작이 날 사형대 위로 올린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니까.
이 파티에 참가해 준 사람들에게 감사를 전하는 공작을 보며 침을 삼키고 있으려니 공작의 시선이 내 쪽에 닿았다.
“파티의 개최를 선언하기 전에 먼저 소개드려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저희 파트란 영지 축제에서 영광스러운 호칭을 손에 넣은 사람이지요. 워낙 많은 일이 있었으니 모두들 그 주인공을 아실 터이나 모르는 체를 해주십시오. 그러지 않으면 제가 무안해 지니까요.”
단 한 번도 오기를 바란 적 없던 순간이 내 앞에 찾아왔다.
심호흡을 하고. 옷 가짐을 점검한 후에.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에 따라 나를 중심으로 해 웅성임이 퍼져나가기 시작한다.
경멸이 담긴 목소리는 농담으로라도 호의적이라 할 수 없으나 애초부터 호의를 기대하지 않았기에 그닥 신경 쓰이진 않았다.
나는 거기에 신경을 낭비하는 대신 할배가 전하는 목소리를 귀에 담았다.
<미리 이야기했던 것이다만 다시 한 번 말하마. 최대한 간결하게. 말 사이에 간격을 두고 여유롭게. 그리고…>
으아아.
긴장 된다.
긴장감에 숨이 막히는 느낌이야.
카리아를 만나러 갈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야. 허접 주신! 억까를 할꺼면 차라리 어렵고 위험한 걸로 해 주면 안 되냐?!
나 진짜 이런 건 체질이 아닌 거 같아!
억까할거면 고인물 지식으로 극복할 수 있는 쪽으로 해주라! 제발!
“파트란 공작. 잠시 기다려 주시지요.”
어디서 청심환이라도 구할 수 없을까 하는 실없는 생각을 하던 중 군중 속에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굵직하고 낮은데다 커다랗기에 자연스레 시선을 끄는 목소리.
다른 사람들을 따라 시선을 돌린 나는 어렵지 않게 그 주인을 찾아낼 수 있었다.
여러 사람들 사이에 돌출되어 있는 덩치는 못 알아보기가 어려울 정도였으니까.
“그 전에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타볼.
방금 전 증오스러운 듯 나를 쳐다보던 사람.
“뭐지요? 왕국 기사단장?”
“파트란 축제의 취지는 자신의 힘으로 여러 대결에서 승리를 거두어 자신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맞습니까?”
“예. 그렇지요. 과거 학살자의 칭호를 얻으셨던 분답게 잘 알고 계시는군요.”
“그렇다면 부정한 수단을 동원해 축제에 참여했다면 그 기록은 인정될 수 없을 겁니다.”
아무리 내가 정치에 서툴다지만 이쯤 되면 저 자가 무슨 말을 하려는 지 이해할 수 있다. 나를 향하는 적의인데 어찌 이해하지 못할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공작의 목소리가 낮다.
그 목소리만으로 사람의 어깨를 짓누를 수 있을 정도로.
허나 그 목소리에도 타볼은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파트란 축제의 학살자라는 칭호는 무척이나 영광스러운 것이니만큼 공정함과 청렴함 속에 결정되어야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기사단장.”
정치에 서툰 나조차도 이 상황을 이해했는데 사교계를 드나들며 이런 분위기를 수도 없이 접한 이들이 저를 이해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경고하듯 내뱉은 공작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파티장에 고요는 찾아들지 않는다.
그를 대신하여 이 자리를 채운 것은 웅성임이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쏟아져 나오는 적의와 비꼼이 담긴 웅성임.
“바꾸어 말하자면 공정과 청렴을 더럽혔다면 결코 칭호를 얻을 수 없음은 물론 그에 마땅한 처벌을 받아야 한단 소리죠.”
“타볼.”
안 좋은 소문은 전염병과도 같다.
순식간에 퍼져나가 사람들의 마음속에 물들지.
타볼을 기점으로 하여 시작된 전염병은 순식간에 이 파티장 전역으로 퍼지더니.
이내 웅성임이라는 파도를 타고서 다수의 목소리이외의 모든 것을 묵살했다.
“저는 이 자리에서 의혹을 제기합니다. 이번 축제의 학살자로 선정된 루시 알른이 결코 정당한 수단으로 칭호를 거머쥔 게 아니라는 것을.”
타볼은 어디까지나 청렴과 결백을 위하여 목소리를 내는 체 하고 있었지만 그의 의도가 거기에 있지 않음은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저 말을 하는 타볼의 시선이 단 한 곳을 향하고 있었기에.
파트란 공작도.
나도.
그 누구도 아닌.
베네딕 알른.
루시의 아버지.
본래 타볼이 지녀야 할 왕국 최강의 칭호를 지니고 있을 이.
타볼은 그를 쳐다보며 웃음을 지었다.
그제서야 저 사람의 의도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나를 공격하는가 싶어서.
아무리 내게 원한을 지녔다 하더라도 이건 너무 노골적이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모욕을 주려 하다니.
가문에, 베네딕에게 시비를 거는 수준이지 않은가.
1왕자조차도 신경을 쓰는 것이 베네딕인데 타볼은 베네딕이 두렵지 않은가 싶었지.
허나 지금은 이해가 된다.
그는 날 미워하는 게 아니었다.
베네딕을 미워하는 것이었다.
자신보다 더 뛰어난 재능을 지닌 무인을 증오하는 거였다.
그렇기에 내 뒤에 누가 있든 신경 쓰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 뒤를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정당한 의혹인가?”
“물론입니다.”
“의혹이 어긋났을 경우에 책임을 질 각오는 되어있나?”
“방금 전과 대답이 같습니다.”
“증명할 수 있나?”
“그건 영애께서 해야 할 일이겠죠.”
타볼이 입을 다물고 시선을 돌림에 따라 공작의 고개가 돌아가고 군중이 시선이 움직인다.
그 모든 시선이.
바늘처럼 날카로운 시선이.
질책하듯 엄중한 시선이.
나를 짓눌러 뭉개버리려 든다.
<상황이 좋지 않구나.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군중이 그대를 묻으려 하고 있어.>
할배는 이야기했다.
의혹이 제기된 것 자체가 문제라고.
내가 정말로 부정하건 부정하지 않건 간에 이미 군중이 날 부정한 인간이라 지목했다고.
어째서? 나의, 루시의 평판이 바닥을 기고 있으니까.
저 인간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인간이라 생각하니까.
<빌어먹을 놈 같으니. 노렸군. 사실이건 나발이건 신경쓰지 않고 그대의 이미지를 깎아내리려는 것이야. 이에 대응하려며는… 여아야?>
‘네. 왜요? 할아버지?’
<왜 웃고 있느냐?>
할배. 진짜 눈치 빠르네.
메스가키 스킬이 강제한 웃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내가 웃는 거라는 걸 알아차리다니.
뭐. 숨겨야 할 것도 아니니까. 궁금하시다면 대답해 드려야지.
‘이러면 단상에 서지 않아도 되잖아요!’
<…허?>
축제의 학살자 칭호가 주어지건 뺏기건 간에 내 알바냐!
어차피 허접 주신의 퀘스트는 끝났다.
그걸 내가 먹든가 말든가 아무런 패널티도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난 결백해! 부정한 수단은 하나도 사용하지 않았어!
그렇지만 이렇게 차가운 눈초리를 보내는 사람이 많은데 어쩌겠냐!
과거 지녔던 업보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수상을 거부하는 수밖에 없잖아?
나이스! 타볼!
게임에서도 꿀템만 주더니 현실에서도 도움을 주는 구나!
넌 역시 최고의 보스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