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07
베네딕은 루시가 험담 속에 머무르는 것을 결코 좋아하지 않았다.
그를 아는 모두가 인정하는 딸바보인 베네딕이다. 어찌 루시의 험담을 즐길 수 있겠는가.
당장 베네딕이 루시가 파티에 참여하지 않기를 바랐던 것도 이 문제가 컸다.
루시야 베네딕의 걱정을 소심한 바보 아버님이나 신경 쓰시는 것이라며 일축했으나 베네딕은 이 불편함을 지울 수가 없었다.
오늘도 그랬다. 입장하는 순간부터 쏟아지는 그 무수한 말들에 대한 분노를 참느라 얼마나 곤욕을 치렀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네딕이 모든 모욕을 참아냈던 것은 딸을 위함이었다.
루시의 업보로 생긴 일에 베네딕이 나선다 한들 반감만 더 심해질 뿐이라는 것을 알았으니까.
당사자인 루시가 웃으며 그 모든 비난을 받아내고 있는데 자신이 나서 딸의 각오를 부수어선 안 된다고 여겼으니까.
허나 지금의 일은 다르다. 이 일은 루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타볼이 지목한 사람은 루시지만 저 자가 모욕하고 싶은 것은 자신. 베네딕 알른이다.
지금으로부터 먼 과거. 베네딕이 치기 어릴 시절에 쌓아버린 원한이 자신의 딸에게 향한 것이다.
이를 참을 이유가 어디에 있지? 베네딕은 자신을 바라보는 타볼의 얼굴을 보며 주먹을 꾹 쥐었다.
이빨 몇 개를 부수어 당분간 저 놈이 제대로 된 말을 못 하게 만들어 버릴 생각으로.
허나 그의 생각은 실행되지 못했다.
<베네딕 경. 기다리게나.>
그가 발을 움직이려 하기 무섭게 머릿속에 목소리가 울렸기에.
텔레파시.
뛰어난 실력을 지닌 마법사라면 보통 다룰 줄 아는 것. 목소리 대신 마력을 통하여 뜻을 전하는 마법.
자신에게로 향한 마력의 실을 따라 고개를 돌린 베네딕은 단상 위에 서 있는 파트란 공작을 보게 되었다.
‘어째서입니까.’
상대가 저 분이라면 입을 움직일 필요는 없겠지.
베네딕의 생각은 옳았다. 그가 머릿속으로 묻자마자 바로 답이 돌아왔으니까.
<자네가 끼어들면 곤란하다네. 당장의 비난은 잠식되겠지만 자네의 딸을 향한 의혹은 그대로일 터 아닌가.>
‘부당한 의혹이지요. 저 놈의 입으로 인정하게 만들면…’
과거의 불같은 성격이 되살아나는 걸 느끼던 베네딕은 문득 파트란 공작이 이 상황을 가만 바라보고 있는 것에 기이함을 느꼈다.
루시는 이번 축제의 우승자다. 파트란 공작이 직접 축하를 해주고자 부른 사람이다.
그런 그녀가 수많은 비난에 파묻히고 있는데 파트란 공작이 아무런 조치도 취하고 있지 않다.
저 사람의 말 한 마디면 모든 소란이 종식될 터인데.
‘일부러 이 상황을 만드셨습니까.’
생각해보면 타볼이 이 자리에 선 것 자체가 기이한 일이었다.
파트란 영애께서 루시를 초대함에 따라 베네딕이 파티에 참여할 것은 오래전에 확정되었다.
그런데 베네딕을 보는 순간 문제를 일으킬 타볼을 함께 초대했다? 1왕자 파벌도 아니고. 파트란 공작과 특별히 친한 것도 아닌 타볼을?
<우리 딸아이가 저토록 믿고 따르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확인해봐야지.>
‘공작.’
한 때 대륙을 준동시켰던 짐승의 분노가 방향을 바꾼다.
그것은 파트란 공작의 입장에서도 지극히 부담스러운 것이었으니. 공작의 다급한 변명이 베네딕의 머릿속으로 전해진다.
<처음부터 이렇게 일을 키울 생각은 아니었네. 설마 저 녀석이 이렇게까지 감정적일 줄은 몰랐지.>
‘저를 보고 그를 믿으란 말씀이십니까.’
<진정하게나. 이 이상 상황이 험악해진다면 내 개입하지. 물론 그대와 그대의 딸아이에게 상응의 보상도 줄 것이야. 명분도 있으니까.>
‘필요치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 공작에게 협력한다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베네딕이라 하여 그 사실을 모르진 않는다.
허나 어떤 것도. 그 어떤 것도. 지금 루시가 겪고 있는 고생에 비하면 부족할 뿐이니.
베네딕은 멈출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뭣보다 말일세. 지금 그대의 딸아이가 웃고 있지 않은가.>
웃고 있다고? 루시가?
다급히 고개를 돌린 베네딕은 비난의 한 가운데에 서 있는 자신의 딸아이를 보았다.
그 어떤 것보다 무거울 비난의 무게 속에서도 당당히 어깨를 피고 있는 루시는 공작의 말대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애써 태연한 체 하는 웃음이 아니라. 정말로 이 상황이 즐거워서 짓는 웃음을 말이다.
<거물이구만 베네딕. 그대보다도 더.>
그 모습에 베네딕이 굳어버린 그 순간 베네딕보다 먼저 움직인 이가 있었다.
루시를 향한 비난으로 가득 차 있는 파티장의 천장에 신성의 빛이 피어오른다.
화려하지는 않으나 보고만 있어도 따스해져서 도저히 눈을 뗄 수 없는 빛이.
비난을 내뱉던 이들이 눈처럼 내리는 신성의 빛에 매혹되어 하나 둘 입을 다뭄에 따라 파티장이 고요로 물든다.
<…친하다고는 들었다만 이렇게 행동으로 나설 정도였나.>
과열되었던 분위기가 가라앉고서 얼마 지나지 않아 파티장 한 가운데에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녀는 마법으로 음성을 증폭시키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른 도구를 쓰지도 않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오롯이 그녀의 것이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티장에 머무는 그 모든 사람의 귓가에 그녀의 목소리가 파고 든다.
“여러분들.”
나긋하고 부드러우나 선명한. 대중의 앞에 수도 없이 서보며 가다듬어진 목소리.
“진정하세요. 아직 무엇 하나 사실로 밝혀진 것은 없답니다.”
그 누구도. 이 파티장에 서있는 그 어떤 사람도. 저 목소리에 반박의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신 교회의 성녀가 슬픈 듯한 표정을 지으며 내는 목소리에 그 누가 반박할 수 있겠는가.
아카데미에서야 한 명의 학생에 불과한 페이비지만 바깥으로 나오면 이야기가 다르다.
수많은 지역을 돌아다니며 선행을 반복한 끝에 현 주신 교회의 얼굴이 되어버린 그녀의 말은 그 자체로 권위를 지니고 있었다.
“알른 영애?”
“뭔데. 허접성녀.”
그렇기에 루시의 입에서 튀어나온 허접성녀라는 말에 수많은 사람이 경악을 했으나 정작 페이비는 가벼운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앞으로 나서 주세요.”
인파를 해치며 움직이는 루시를 확인한 후 페이비가 고개를 돌린다.
여전히 그녀의 얼굴에는 웃음이 묻어나오지만 기이하게도 그 웃음은 차가워 보였다.
“그리고 왕국 기사단장님?”
성녀의 부름에 타볼이 처음으로 공손함을 표한다.
“예. 주신교회의 성녀시여.”
“의혹에 대해 정확히 이야기해주시겠어요?”
“파트란 축제는…”
“의혹에 대해서만 말씀해주세요.”
부드러우나 단호한 목소리에 헛기침을 한 타볼은 실례했다 말하고는 이야기를 이었다.
“우선은 아티팩트를 사용했을 가능성에 대해서입니다.”
파트란 축제의 노점은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탈락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현직에서 명성을 떨치는 이들조차 자신있는 분야를 제외한 다른 곳에 도전한다면 성공을 장담하기 어려울 정도로.
허나 루시는 달랐다.
그녀는 서툴러야 할 분야에서조차 번번히 승리를 거두었다.
“운과 관련된 분야는 그럴 수도 있지요. 뛰어난 신체적 능력을 요구하는 분야? 암암리에 모두 버프를 쓰고 있으니 그로 신체능력을 올려 극복했다 칩시다. 허나 아직 아카데미 1학년에 불과한 그녀가 여러 기술적인 것을 요구하는 분야에서까지 승리한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어디까지나 노점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니 신체적 능력의 뛰어남만으로 승리하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다.
허나 불가능과 가능 사이에 존재하는 간격은 무척이나 거대하니.
현직에서 활동하며 수많은 기술을 접한 이들도 실패하기가 부지기수인데 아카데미의 1학년이 엄두를 낸단 말인가.
“근거는?”
타볼이 목소리를 높여가며 자신의 주장을 전하던 때에 뒤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감히 끼어드는가 싶어 눈초리를 좁히던 타볼이었지만 그 얼굴을 확인한 순간 어색한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아서 솔라딘.
계승권과 한없이 거리가 멀다 하다 어쨌든 왕가에 속한 인물.
이 자리에서 타볼이 예의를 차려야 하는 몇 안 되는 상대.
“예?”
“아티팩트를 사용했다는 근거 말일세. 사용하는 광경을 보았나? 아니면 그녀가 사용하는 아티팩트를 확인했나?”
“…”
“단순히 아카데미 1학년이 할 수 없는 일이기에 목소리를 높인 건가?”
아서는 한심하다는 듯 타볼을 바라보다가 파트란 공작 쪽에 살짝 시선을 주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형님에게 비할 수는 없으나 나름 천재 소리를 들었던 입장에서 이야기하마. 아카데미에서 보았던 루시 알른 그녀는 괴물이다. 이 본인에게 재능의 벽을 알려주었던 괴물.”
“허나.”
“심지어 훗날 왕국의 자존심이 되리라 여겨지고 있는 저 프레이 켄트조차 루시 알른에게 승리를 거둔 적이 없지.”
아서의 이야기에 사람들의 시선이 이리저리로 돌아간다.
분명 이 자리에 있을 프레이 켄트를 찾는 것이다.
긴박하게 돌아가는 상황 속에서도 여유로히 식사를 즐기던 프레이는 자신에게 모여든 시선을 보고는 입 안에 든 걸 꿀꺽 삼키곤 고갤 끄덕였다.
“맞아. 루시는 강해.”
무덤덤한 그녀의 목소리에 여기저기서 감탄이 새어 나온다.
프레이 켄트가 누구인가.
대륙에서 벌어진 수많은 대회에서 언제나 압도적인 실력으로 우승을 거머쥔 괴물이지 않나.
성장한다면 분명 검성의 칭호를 거머쥘 수 있는 기재라 여겨지는 프레이 켄트가 단 한 번의 승리도 거머쥐지 못하다니!
이제까지는 소문으로만 퍼지던 것이 프레이의 인정에 따라 사실로 변하고. 루시 알른이라는 신성의 재능이 공적인 자리에서 증명된다.
그에 따라 사람들의 시선이 바뀐다. 그럴 수 있나?에서 그럴 수도 있겠구나. 로.
알른 가문의 핏줄이 긴 시간 제 재능을 감추다 드디어 개화했구나. 하고.
“그렇다고 신체능력 이외의 다른 것이 부족한가? 전혀. 그렇다면 루시 알른이 언제나 아카데미에서 1등을 차지할 수 없었겠지.”
“…3왕자 저하.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건지 저는.”
“단적으로 말하지. 역사에 남을 천재의 재능을 그대가 단정 짓는 것이 불쾌하다네. 그래서야 항상 루시 알른에게 짓눌리는 본인이 무능아가 되어버리지 않나.”
아서의 말에 타볼이 입을 우물거렸다.
그것은 아서가 강하게 나온 탓이기도 했지만 그 이면에 숨겨진 말들 타볼이 알아들은 탓이기도 했다.
루시 알른의 재능이 거짓이라면 그 거짓된 재능에 패배한 이들. 구체적으로 1왕자는 무어가 되는 것이냐고.
증거도 없는 주제에 그를 비하하고 감당할 수 있느냐고.
“허나 그것만으로는 증빙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다른 것은 그녀의 재능이 뛰어났다 할 수 있겠지만 마법. 마법과 관련된 영역은 결코.”
“그 부분은 제가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네요.”
이번에 또 다시 다른 곳에서 목소리가 새어 나온다.
조이 파트란.
파트란 가문의 영애답게 뛰어난 마법적 재능을 지닌 이.
그녀는 어디선가 급하게 뛰어오기라도 한 듯 벅찬 숨을 다스리고 있었다.
“알른 영애께서는 마법과 관련해서도 깊은 조예를 지니고 계시답니다.”
“…예?”
조이는 그리 운을 떼고는 아카데미에서 있었던 일화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알른 영애가 자신에게 마법과 관련된 조언을 해주었고 그 후로 자신의 실력이 급격하게 올라갔다고.
“그 조언은 조예가 없다면 나올 수 없는 것이었죠.”
“정말입니까?”
“설마 제 말을 못 믿으시겠다는 건가요?”
부채에 의해 감추어진 얼굴에서 보이는 것은 오롯이 눈빛뿐이다. 차갑고 날카로우며 냉철한 눈빛.
어찌 파트란의 영지에서 파트란의 말을 부정하겠는가.
재차 타볼의 입이 다물어졌다가 자그마한 텀을 두고서 다시 열린다.
“알겠습니다. 어쩌면 알른 영애께서 지닌 재능이 미천한 저 따위의 상식을 벗어났을지도 모르겠군요. 허나 아직 의혹은 남아 있습니다. 축제의 마지막. 던전 공략. 알른 영애께서 1왕자 저하와 대결을 할 때의 일입니다.”
타볼이 말한다. 아무리 보아도 루시가 내놓은 정답은 던전을 이미 알고 있지 않고서야 나올 수 없는 대답이라고.
그가 의혹을 제기함에 따라 1왕자와 루시의 대결을 보았던 이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거기에 힘을 얻은 듯 다시금 타볼의 목소리가 드높아진다.
“알른 영애. 묻겠습니다. 당신은 노점에 방문하기 전에 그 던전에 관하여 알고 있었습니까?”
“당연히 알고 있었지. 좆밥 기사.”
“…허?”
“무능한 주제에 자존심만 드높은 너랑은 달리 난 천재거든.”
파티장에 자리 잡은 침묵 속에서 비웃음을 품은 웃음소리가 퍼져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