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08
난 타볼이 하는 말에 반박할 생각이 없었다.
쟤가 내놓은 의혹이 어느 정도 믿음직스러워야 공작이 내 사퇴를 받아들일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날 향한 비난을 흘려들으며 타볼이 무슨 개소리를 하는가 구경이나 할 생각이었지만 중간부터 상황이 바뀌었다.
그 시작을 만들어 낸 건 페이비였다.
그녀는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으로 나를 향한 비난의 화살을 잠재워 버렸다.
주신 교회의 성녀님께서 진정하고 이야기를 듣자며 그러는데 누가 거기에 토를 달 수 있을까.
그렇게 페이비가 반론을 위한 판을 깔자 나보다 먼저 다른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아서가 타볼의 허술한 증거를 지적했고, 프레이가 내 강함과 재능을 입증해 주었으며, 마법에 관한 의혹마저도 조이가 지워버린 것이다.
타볼의 패인이 무엇이었냐고 묻는다면 준비의 부족이라고 해야겠지.
그가 지적한 부분 자체는 옳았다.
나 개인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고 그를 유희의 팔찌라는 아티팩트의 힘을 빌려 넘어선 게 사실이니까.
허나 그에겐 증거가 없었다. 내가 아티팩트를 사용했단 사실을 입증할 증거가.
루시가 예전처럼 그 누구에게도 옹호 받지 못하는 상황이었더라면 증거의 부족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겠지.
그런 사소한 문제는 비난의 파도를 타고 넘어서면 그만이니까.
허나 지금은 그러는 것이 불가능했다.
주신 교회의 성녀. 유력한 차기 검성 후보. 솔라딘 왕국의 3왕자. 파트란 공작 가문의 영애.
이토록 쟁쟁한 이름들이 루시 알른을 옹호하고 나섰는데 어떻게 의혹만으로 한 사람을 파묻을 수 있겠는가.
멍청하긴! 억까를 할 거였으면 제대로 준비를 했어야지!
덕분에 지금 날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미적지근해졌잖아!
날 미워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날 선 눈으로 노려보고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냐!
악감정이 극에 달한 사람을 제외하면 모두들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고!
이래서야 내가 단상 위에 서는 그림이 그려지잖아!
날 도와준 네 사람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솔직히 중간까지는 타볼을 응원했다.
물론 고맙다고 생각하긴 해.
처음 페이비가 나섰을 때는 감동했고. 아서, 프레이, 조이 세 사람이 앞으로 나서면서 날 옹호해줬을 때는 속이 찡했어.
친구 하나 사귀는 것조차 불가능하리라 생각했던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생기다니! 메스가키 스킬이 아니었다면 눈물을 훌쩍였을 걸!
근데 고마운 건 고마운 거고 현실은 현실이야.
타볼이 논쟁에서 승리해야 내 수상이 취소될 거 아니냐고!
난 단상 앞에 서서 1왕자를 포함한 유력자들에게 ‘성인식도 안 치른 여자애한테 쳐발리는 좆밥들♡’ 같은 대사를 치고 싶지 않아!
내 마음이 담긴 응원에도 불구하고 타볼은 논쟁에서 패하고는 아티팩트의 사용을 어물쩍 넘겨버렸다.
그리곤 이 의혹은 부정할 수 없을 거라며 던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그의 쓰잘데기 없이 크고 선명한 목소리를 들으며 난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이래서 멍청한 뇌근육은.
차라리 끝까지 아티팩트에 대해 물고 늘어지지 그랬냐. 어쨌든 의혹 자체는 사실이니까 승산이 있었을 텐데.
어쩌면 내가 슬쩍 단서를 줬을지도 모르잖아.
던전 공략에 부정이 있는 척하면 되지 않으냐고?
할 수는 있지. 적당히 말을 어눌하게 하면 그만이니까.
그렇지만 말이야. 저 의혹을 인정해버리면 노점상 아저씨는 어떡해. 졸지에 1왕자를 부정으로 패하게 만든 죄인이 되잖아.
그리고 말이야. 뭣보다 내 썩은물로써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감히 나한테 던전을 가지고 입을 털어?! 소울 아카데미 세계관에 존재하는 모든 던전의 공략을 외우고 있는 나를 상대로?!
이건 못 넘어가지. 만 시간이 넘게 연구하고 또 연구한 내 노력을 무시하는데 이걸 어떻게 넘어가!
던전 알못이 될 바에는 이 파티장의 유력자들한테 미친년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만다 진짜로.
“이미 알고 계셨다니. 의혹을 인정하시는 겁니까?”
“푸푸~♡ 오답이야. 오답. 좆밥 기사의 풍선 근육처럼 허접한 대답이네♡ 최소한 생각은 하고 말하지? 머리까지 풍선처럼 텅 비어있는 건 아니잖아♡”
더 이상 타볼을 응원하지 않기에 진심을 담아 도발했더니 녀석의 얼굴이 벌겋게 물들었다.
몇 마디 하지도 않았는데 주먹이 부들부들거리네. 이 아저씨 리액션이 너무 좋은 거 아냐? 이럼 더 놀리고 싶어지는데.
“…그럼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그딴 허접 던전. 문제로 보기도 전에 알고 있었단 이야기야. 난 풍선뇌 기사하곤 다르게 똑똑하거든♡”
내가 말실수를 하기만을 기다리는 타볼의 앞에 말을 늘어놓는다.
던전의 이름. 던전의 모든 지형. 그 안에서 출현하는 몬스터의 종류와 출현 위치. 함정의 종류와 위치, 해체법. 보스의 공략법.
그 모든 것을 완벽히 암기하고 있다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타볼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목소리를 드높였다. 헛소리로 자신을 기만하려 하는 것이냐고.
“어라아♡ 들켰나?♡”
“당연하지요! 그런 것이 가능할 리가 없습니다!”
“내 말은 풍선 뇌 기사의 텅텅 빈 머리가 들킨 거냐는 이야기였는데♡ 이해력도 떨어지는구나♡ 불.쌍.해.라♡”
험한 말이 튀어나오는 것을 참는 것일까. 타볼의 목에 혈관이 잔뜩 치솟아 오른 게 보인다.
더 놀리면 터질 것 같으니까 여기서 잠시 멈출까.
부들부들 거리는 타볼에게서 등을 돌린 나는 파티장의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목소리를 높였다.
“징그러운 벌레 던전의 첫 번째 구조는…”
그리곤 문제로 나왔던 던전에 관한 정보를 나열하기 시작했다.
던전의 구조. 그 구조를 파악하는 법. 구조에 따라 달라지는 여러 가지 정보.
본래는 7가지 패턴 모두를 이야기해줄 생각이었지만 4번째 패턴을 이야기 할 즈음에 타볼이 입을 열었던지라 목표를 달성하는 데엔 실패했다.
“알른 영애께서 노점의 던전에 관해 잘 알고 있음은 알겠습니다.”
“이제서야? 이해력이 많이 떨어지는 구나. 이런 사람 아래에서 일하면 얼마나 힘들까. 불쌍해.”
“…허나 그것은 부정의 증거밖에 되지 않습니다. 미리 알고 있지 않고서야 던전을 공부할 수는 없을 테니까.”
하.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대답할 가치도 없는 한심한 소리였던지라 절로 웃음이 새어나왔다.
아니 아티팩트 이야기할 때 이렇게 물고 늘어졌어야지. 그랬으면 희망이라도 있었을 거 아냐.
“왜 웃으시는 것인지요.”
“어떻게 안 웃어?♡ 멍청한 광대가 내 앞에서 공연을 하고 있잖아♡”
“대답할 자신이 없으니 논점을 달리하시는.”
“저기. 저기. 풍선대가리 기사♡ 네가 아는 던전 아무거나 말해봐♡ 아는 게 있을지 의심스럽긴 한데.”
“용을 모시는 산.”
우와. 어떤 던전을 말하나 싶었는데 저길 이야기하네.
출현 확률이 더럽게 낮아서 알아내기 어려운 곳인데. 절대 대답 못 하게 만들겠다는 의지가 느껴져.
그런데 이걸 어쩌나.
“기껏 생각해낸 게 그거야?♡ 진짜 치졸하다♡”
“모르십니까?”
“아니? 아는데?”
난 거기 아는데.
위험도는 A급 상위. 주로 출현하는 몬스터는 용인. 던전의 패턴은 총 13가지.
앞서 노점의 던전에 관해 이야기했던 것처럼 주저리주저리 설명을 해주었더니 타볼의 표정이 굳었다.
야. 설마 너도 모르면서 물어본 거냐? 자기가 모르는 건 나도 모를테니 대답하지 못할 거라 생각해서?
아니지? 너 그 정도로 쓰레기는 아니지? 그치?
머릿속을 스치고 간 생각에 경악하고 있으려니 다른 곳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확합니다! 거의 출현하지 않는 던전이라 모르는 것이 정상인데 저토록 자세히 기억하고 계시다니!”
저건… 발톱 용병단의 단장인가?
게임에서 보던 것보다 얼굴이 밝아 보이네. 원래는 좀 더 어두운 성격이었던 것 같은데.
군중에서 터져 나온 갑작스러운 호응에 다들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하던 그 때 저 멀리서 관망하고 있던 사람이 용병단장을 향해 말을 내던졌다.
“발톱 용병단장.”
1왕자 쟤가 왜 여기에 끼어드는 거야?!
뭔데. 억까 할 각이 보인 건가? 그런 건가?!
갑작스런 개입에 초조히 1왕자를 지켜보던 나였지만 그는 내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용병단장의 눈을 바라볼 뿐.
“정확한가?”
1왕자의 물음에 용병단장의 미소가 굳었지만 그건 잠시였을 뿐 이내 더듬거리며 대답을 꺼냈다.
“예. 물론입니다. 제가 공략했던 곳 중에 가장 어려웠던 곳이기에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좋아. 용병단장. 저것 말고 다른 던전에 대해서도 루시 알른에게 물어보도록.”
자신이 내뱉은 감탄사 때문에 강제로 이 틈바구니에 끼게 된 용병단장이었으나 그는 충실히 1왕자의 명을 수행했다.
“일단은…”
하하. 야. 르네 솔라딘. 이런 식으로 물어보다보면 빈틈이 드러날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지?
그건 네 착각이야. 그 어떤 던전에 관해서 묻더라도 난 대답할 수 있거든!
고마워! 1왕자! 내 유능함을 증명할 기회를 만들어 줘서!
네가 깔끔하게 물러나는 바람에 입이 근질근질했는데 마침 잘 됐네! 썩은물의 지식을 피력해보실까!
용병단장의 물음에 답하길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다시금 1왕자가 목소리를 냈다.
“타볼 기사단장.”
“…예. 왕자님.”
“본인이 보기에 루시 알른이 수많은 던전에 대해 잘 알고 있음은 사실인 듯 하군. 그 중 하나에 노점에서 제공한 던전이 있었던 것도 말이야.”
타볼은 그 목소리에 대답하지 못한다. 허나 1왕자는 그를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본인이 노점에서의 패배를 인정했던 까닭은 루시 알른의 발상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엑?
쟤가 왜 나 옹호해주는 거야?
억까할 각이 안 보이니까 방향성을 바꾼 건가?
“안정성은 저 멀리 내다 던져버린. 모의이기에 가능한 기행이지만 그를 가지고 겨루기로 한 것은 본인이니 트집 잡을 수 없지.”
“왕…왕자님. 잠시.”
“그를 끄집어 올리기에 무슨 소리를 하나 했다만. 거기까지만 하거라. 이 이상 이어지면 파티의 흥마저 날아갈 듯 하니.”
만일 내가 부정을 저질렀다면 거기에 가장 큰 피해를 입었을 1왕자가 타볼에게 자중을 요구했다.
그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나의 결백.
내가 축제의 학살자가 된 데에 부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이게 정치구나.
가만 상황이 흘러가는 걸 보다가 자신에게 유리한 쪽을 선택하는 것 봐.
아카데미 1학년한테 승부를 걸어서 모욕을 주려 했던 건 저 녀석인데 관대함을 칭송 받는 것도 저 녀석이라니!
이게 말이 되는 상황이야?!
억울했지만 이 상황에서 목소리를 높일 순 없었다. 감사인사를 하지 않는다고 눈총을 받는 상황에 헛소리를 하면 어찌 될지 뻔했으니까.
“파트란 공작. 이만하면 됐겠지?”
“감사합니다. 1왕자님. 덕분에 알른 영애의 결백이 증명되었군요.”
1왕자의 목소리에 짜맞추기라도 한 듯 공작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기사단장도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듯 하니 다시금 파티를 진행하도록 하죠. 알른 영애?”
응? 저 사람이 왜 날 부르지?
상황 다 끝났으니…
아.
아아아아!
내 결백이 완벽하게 증명되어버렸다는 것은 곧 내 수상이 확실시 되었다는 것!
히키코모리 왕자가 갑자기 개입해서 정신줄을 놓고 있었어!
어떡하지?! 어떻게 빠져 나가지?!
병약 영애인 척 할까?
방금 전에 있었던 일 때문에 힘들어서 아무것도 못 하겠다고 그럴까?!
현기증 난 척 핑그르르 하고 쓰러져?!
괜찮다! 설득력 있어!
연기를 해보려 했으나 메스가키 스킬은 당당함 이외에 그 어떤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이 빌어먹을 스킬아! 협조 좀 해주라! 네 주인한테 큰일이 생기기 직전이잖아!
“수고하셨습니다. 지치셨을 테니 잠시 쉬고 계시지요.”
어라?
…살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