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1
나는 썩을 대로 썩은 인간인지라 소울 아카데미에 나오는 던전의 지도를 모두 다 외우다 시피 하고 있다.
당연히 던전 내에 있는 함정의 위치도 모두 기억하고 있지.
그 중에서 내가 노리는 건 에반스 던전에 있는 위치 이동 함정이다.
왜 그 RPG게임에서 던전을 돌다 보면 강제로 아래 층으로 날려버리는 함정 있잖아.
그게 에반스의 던전에도 있거든.
정확하게는 최하층의 랜덤 장소로 보내버리는 함정이지.
이걸 이용해서 포셀과 페르비와 떨어질 생각이다.
물론 저 둘은 말도 안 되게 강한 괴물들이시니 순식간에 층을 돌파해서 아래로 내려오겠지.
그러니까 함정을 밟은 순간부터는 저들이 나를 발견하는 게 먼저일지 아니면 내가 루엘의 시련에 들어가는 게 먼저일지의 승부다.
그를 위해서는 칼을 데리고 가야겠지.
나 혼자 최하층에 떨어졌다간 고블린들을 상대하다 포셀한테 붙잡힐 것 같거든.
그럼 내가 시련에 들어간 후에 칼이 혼자 남겨지겠지만 뭐 그 허접한테는 저도 아가씨를 찾고 있다는 변명이나 하게 하면 되지 않겠어?
마침 상황도 나쁘지 않다.
포셀은 오늘도 처음부터 내게 지휘를 맡겼다.
어제 하루 종일 완벽에 가까운 지휘를 선보인 덕에 나를 신뢰하고 있는 거다.
내가 다소 엉뚱한 지휘를 하더라도 다 뜻이 있어서 그러시는 거라 생각할 정도로.
평상시라면 부담스럽다 생각할 믿음이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저 믿음은 충분히 이용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난 포셀의 신뢰를 얻기 위해 1층을 공략하는 동안 단 한 번의 실수도 보이지 않았다.
그 덕분에 포셀은 내가 2층에 들어오고 나서 정답이 아닌 다른 길을 골랐음에도 나를 나무라지 않았다.
오히려 내 실수를 반기는 기색까지 보였다.
드디어 알려줄 것이 생겼다는 생각이라도 한 게 아닐까.
뭐어. 그가 어떤 생각을 했던 간에 난 2층에 있는 위치 이동 함정까지 그들을 데려올 수 있었다.
함정 인근에 도착을 한 순간 나는 여느 때처럼 기사들에게 지휘를 내림과 동시에 그들의 눈치를 보았다.
이 녀석들 중에 위치 이동 함정에 관해 아는 사람이 있나?
있다면 분명 경고를 할 텐데. 다른 함정들과 달리 위치 이동 함정은 밟은 순간에 바로 발동된다.
바꾸어서 말을 하자면 아무리 강한 기사들이라 할지언정 위치 이동 함정에 대처할 수 없단 소리기도 하다.
저들의 입장에서 내가 함정에 밟아 고립되는 건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일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 중 그 누구도 내게 함정에 관해 언급하지 않는다.
내가 함정을 알아채는 지를 보기 위해?
그럴 리가.
그 정도로 날 자유롭게 풀어 줄 생각이었다면 내가 칼하고 둘이서 던전에 들어오는 걸 막지도 않았겠지.
분명했다.
이들은 함정에 관해 알지 못한다.
그래서 내가 함정의 바로 옆에 서 있음에도 아무런 경고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럼 이제 해야 할 일은 포셀과 페르비를 치우는 것이다.
저 둘이 같이 함정에 말려들면 루엘의 시련으로 몰래 갈 수 없으니까.
다행히 나에겐 저들을 치울 방법이 있다.
그야 지금 난 지휘관이니까.
‘페르비. 포셀.’
“대머리 기사. 바보 포셀.”
페르비와 포셀을 몬스터 처리를 명목 삼아 앞으로 보냈다.
지금 저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건 대충 열 쯤 되는 고블린 무리.
저들이라도 처리를 하는 데 10초 정도는 걸릴 것이다.
두 기사가 자리를 비우자 칼이 자연스럽게 내 곁으로 다가왔다.
둘이 없는 동안에 나를 호위할 생각인 거겠지.
이걸로 상황은 만들어졌다.
칼과 포셀이 싸움을 시작한 바로 그 순간 난 위치 이동의 함정을 밟았다.
툭.
함정은 건드림과 동시에 바닥에서 연한 빛이 새어 나온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여러 복잡한 문양이 새겨진 마법진이 나타난 게 보였다.
게임으로 볼 때도 쓸데없이 이펙트가 화려하다고 생각했는데 현실이 되니까 더하네.
그를 보며 미간을 찌푸리던 중 갑자기 빛이 세기를 달리 하더니 섬광을 터트려 버렸다.
흐악!
으으. 눈이야.
겨우 위치 이동 함정 주제에 왜 눈뽕을 치는 거야?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눈을 부여잡고 몇 초가 지나서야 간신히 앞이 보였다.
거기엔 필요 이상으로 들이밀어져 있는 칼의 얼굴이 있었다.
흐엑. 뭐 하는 짓이야. 부담스럽게.
거슬리는 얼굴을 손으로 밀어서 치워버린 후 주변을 살폈다.
일단 벽의 색으로 봐서 최하층에 떨어진 건 확정인 것 같고.
바닥에 낀 이끼나 주변의 길. 벽의 모양을 보면…
여기가 어딘지는 대충 알 것 같다.
운이 좋았네.
이 위치면 루엘의 시련이 있는 곳 바로 근처니까.
“아가씨?!”
‘듣고 있어요. 칼.’
“허접. 그렇게 소리를 안 쳐도 네 기분 나쁜 목소리는 다 들리거든?”
“죄송합니다. 아가씨. 그렇지만 괜찮으십니까?”
‘괜찮아요.’
“보면 몰라?”
칼은 내 대답을 듣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이윽고 최대한 믿음직스러워 보이려는 게 티가 나는 얼굴을 한 채 목소리를 냈다.
“걱정 마십시오. 아가씨. 여기가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저 칼이 반드시 아가씨를 지키겠습니다!”
으음. 이제는 슬슬 칼한테 사정을 말해도 괜찮겠지.
루엘의 시련이 숨겨진 곳까지 찾아가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그건 나 혼자 받아야 하는 거니까.
내가 갑자기 사라져버리면 당황을 한 텐데 그전에 상황 설명 정도는 해둬야지.
어떻게 변명을 할 지는 생각을 해두었다.
축복의 핑계를 대면 된다.
이 세상에는 정말로 신이라는 존재가 있으니까 계시를 받았다고 하면 대개의 일은 해결 되거든!
신이 내 꿈에 나타나서 루엘의 시련을 알려주었다고 하면 그만이잖아.
칼이 내 말을 믿건 안 믿건 아무런 상관도 없다.
내가 루엘의 시련 안으로 들어가 버리면 어차피 믿을 수밖에 없을 테니까.
“일단 여기가 어딘지를.”
‘칼.’
“야. 허접.”
“예?”
‘진정해요. 일부러 함정을 밟은 거니까.’
“내가 일부러 함정을 밟은 거니까 호들갑 떨지 마.”
“…어. 일부러요?”
대충 칼에게 내가 축복을 받으며 계시를 얻었고 시련을 받으러 가야 한다고 이야길 하자 칼은 내 예상과는 달리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계시입니까?”
내가 세운 계획이기는 하지만 말이야. 이렇게 쉽게 믿어도 되는 거야?
신이니 계시니 하는 말은 좀 현실적이지 않잖아.
한 번 쯤은 반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믿는 거에요?’
“믿어?”
“아가씨께서 하신 말씀을 제가 어찌 부정하겠습니까.”
칼이 진지한 목소리로 낸 대답에 순간 미간이 찌푸려졌다.
자기는 멋있다고 생각해서 친 대사겠지만 내 입장에선 좀 징그러웠다.
역시 얘한테 충성 맹세 같은 말 꺼내지 말 걸.
내 표정을 읽은 건지 칼은 반쯤 농담이었다 이야기를 하며 그 뒤에다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아가씨께서 신탁을 받으신 거라면 이상할 정도로 이 던전에 해박하셨던 것도 이해가 되니까요.”
아. 그 부분이 그런 식으로 해석 되는 거야?
하긴 나야 던전에 대해서 다 알고 있으니까 이걸 공략한 것 뿐이지만 너희들한테는 이상한 일이었겠지.
그렇지만 신탁을 받았다고 하면 그 부분이 해소가 되는 거구나.
그냥 고인물로써 최선을 다했을 뿐이지만 그게 이런 결과로 돌아올 줄이야.
…다 예상하고 한 일이었어! 아마도!
“저만을 여기에 데리고 온 것을 보면 저 이외의 사람에겐 발설해선 안 되는 내용인가 보군요.”
‘네. 그렇죠.’
“허접치고는 이해가 빠르네.”
“하하. 아가씨의 기사니까요.”
제멋대로 이해를 해 준 칼 덕분에 설명을 하는 시간을 덜 수 있었다.
지금도 포셀하고 페르비가 미친 놈마냥 내려오고 있을 테니 한 시가 급하다.
빨리 루엘의 시련에 들어가야 된다.
‘칼. 움직이죠.’
“허접. 가자. 시간 없어.”
“알겠습니다. 아가씨. 길을 알려 주시죠.”
칼과 함께 최하층을 진행하면서 느낀 건 얘를 데려오길 잘했단 것이었다.
에반스의 던전은 중소 규모를 지닌 곳이라 갈림길이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몬스터를 피해 도망칠 곳을 찾기도 어렵다.
길목을 가로막은 몬스터가 있다면 그걸 처리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지.
아무리 에반스의 던전이라도 최하층은 최하층.
이 곳에 나오는 고블린들은 한 두 마리가 아닌 무리다.
나 혼자 이 곳에 떨어졌다면 루엘의 시련이 있는 장소에 도착하기도 전에 고블린들과 싸우다 위에서 내려온 포셀과 페르비에게 붙잡혔을 것이다.
하지만 칼이 있으니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밀려드는 고블린들을 검 한 번 휘두르는 것으로 처리해 버리는 버스 기사님이 있으니 편하긴 하네.
덕분에 난 몇 분 걸리지 않아서 루엘의 시련이 있는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거기에는 기사를 형상화 한 석상이 하나 서 있었다.
무기가 들려있어야 할 양 손은 고블린들이 무기를 훔쳐간 건지 비어있었고.
오른팔은 부서져서 형체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였으며.
겉의 색은 거무칙칙하게 변색이 된데다가.
석상 여기저기에 금이 가서 툭 건드리면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처럼 보였다.
“아가씨께서 찾던 게 이 곳이었습니까?”
‘알고 있었어요?’
“뭐야. 허접 칼. 알고 있었어?”
“예. 이건 성기사 루엘 님의 동상이지 않습니까.”
기사들도 이 동상에 대해 알고는 있었구나.
얘네들이 던전을 들락날락한 게 한 두 번이 아니니까 모르는 게 더 이상한가.
“여기에 숨겨진 무언가가 있습니까?”
‘네. 보세요.’
“그래. 보고 있어. 허접한 너는 상상도 못할 게 숨겨져 있으니까.”
석상의 앞에서 두 손을 모은다.
게임 속에서는 트리거를 알아내고 이 동상 앞에 와야 선택지가 생겼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 곳은 게임이 아니고 난 게임 속의 캐릭터가 아니니까.
눈을 감고 게임 속 캐릭터가 외우던 대사를 떠올린다.
‘나 하나의 신념을 가지고서 이 자리에 섰으니. 루엘. 당신에게 나의 신념을 시험받기를 바란다.’
그러자 루엘의 동상이 끼기긱 거리는 소리를 내며 움직이더니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휴우. 대사를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도 돼서 다행이다.
만약 말로 해야 했다면 메스가키 스킬 때문에 괴상하게 변해 버렸을 테니까.
그랬다면 석상이 움직이지도 않았을 거야.
“이런 게 숨겨져 있었군요.”
칼은 새로이 나타난 계단을 탄성을 내질렀다.
자신이 알던 장소에 숨겨진 무언가가 있다는 게 신기한 거겠지.
나는 계단을 보며 호기심을 보이는 칼을 옆으로 밀어내며 목소리를 냈다.
‘칼. 잠시 다른 곳으로 가 있어주세요.’
“허접. 잠시 다른 곳으로 꺼져 있어.”
“예? 허나 아가씨 그건.”
‘안 그럼 제가 시련을 받으러 갔다는 게 들킬 테니까요.’
“허접. 생각을 못하겠어? 네가 여기 있으면 이 안에 들어갔다는 게 들킬 거 아냐.”
난 몰래 시험을 치고 다시 돌아오고 싶거든?
너야 계시를 받았다는 말을 쉽게 믿었지만 안 그런 사람도 분명 있을 거란 말이지.
그런 사람들한테 의심을 사느니 그냥 던전에 떨어져서 헤매다 우연히 시련을 받게 됐다는 쪽이 변명하기 편하다고.
근데 네가 여기 서 있어봐. 내가 일부러 시련에 들어갔다는 게 다 들키잖아.
그러니까 제발 얌전히 다른 곳으로 꺼져 주지 않을래?
“나중에 다시 나오실 때에 몬스터들의 습격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진 않을 걸요. 왜냐면…’
“허접아. 생각을 해 봐. 그 때 쯤이면 포셀 그 바보가 다 박살을 내놨을 텐데 좆밥 고블린들이 살아있을까?”
만약에 살아남은 고블린들이 있다면 그건 고블린의 형체를 한 무언가일 것이다.
칼은 차마 내가 한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자신도 그렇게 생각을 하는 거겠지.
나는 칼에게 어떻게 변명을 하면 될지 알려준 후에 시련으로 향하는 계단에 발을 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