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10
“…파트란 영애?”
세르란 공자의 얼굴에는 당혹의 흔적이 역력했다. 마치 마주해선 안 될 것을 마주한 것처럼.
“대답해주시겠습니까?”
평상시라면 상대방이 진정하고 대답해줄 때까지 여유를 줄 조이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이상하리만치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을 촉구했다.
“…어. 그러니까. 이번 축제에서 알른 영애를 새로이 봐서 말입니다. 감탄을 전하고 있었죠.”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내 도발 때문에 얼굴이 벌개져 있던 세르란 공자였지만 조이가 등장한 후로는 그 낯빛이 바뀌었다.
그의 얼굴은 시체마냥 창백하게 물들어 있었다.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조이가 그렇게 무서운가? 그녀의 외모가 차가운 건 사실이지만 그 속은 얼빵 영애이지 않나.
비슷한 공작 가문의 사람인데다가 나이는 훨씬 더 많을 게 분명한 세르란 공자가 왜 식은땀을 흘리며 조이를 대하는 건지.
“그런가요. 감사합니다. 세르란 사공자. 제 친구에게 칭찬을 전해주셔서요.”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더 할 말이 있으신 게 아니라면 돌아가 주시겠어요? 친구와 따로 할 이야기가 있어서.”
세르란 공자는 할 말이 많은 듯 입을 우물거렸지만 그를 입 바깥으로 내지는 않았다.
마지못해 공자가 떠나가 버린 후 조이가 입을 가리던 부채를 거두었다.
“알른 영애. 저런 사람은 그냥 쫓아내세요. 언제까지 버티고 있나 구경하지 마시고.”
‘저 사람 뭐 했나요?’
“얼빵 영애. 저 변태 공자가 뭘 했기에 그러는 거야?”
“모르시나요?”
당연히 모르지. 쟤 게임에 거의 언급 안 됐을 걸?
애초에 세르란 가문 자체가 게임에서 비중이 그리 큰 곳도 아니었고.
세르란의 사공자라고 했던가.
기억을 되짚어 보았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나는 게임에서 비중이 있는 인물이라면 대개 그 이름을 외우고 있다. 일러스트가 있다면 얼굴까지도.
그런 나임에도 불구하고 세르란의 사공자에 관해 떠올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쟤 진짜 비중 없었나보다.
“…아. 참. 알른 영애께서는 이런 데 서투르시죠.”
자기 혼자 고개를 끄덕인 조이는 저 사람이 얼마 전에 큰 사고를 쳤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그 일 때문에 가문에서 쫓겨날 상황이라 어떻게든 수습을 하고 싶어 하시죠.”
그녀의 말을 듣고서야 떠올랐다.
세르란의 사공자.
세르란 가문 사람이 튀어나올 때마다 병신 같은 동생 때문에 고생했다는 이야기를 전하던 녀석! 그게 쟤였구나!
“저희가 아카데미를 졸업할 즈음엔 만날 일 없는 분이니 신경 쓸 필요 없을 거에요.”
조이는 그리 이야기를 하고는 세르란 사공자에 대한 이야기를 끊었다.
아카데미에서는 어떤 일을 하던 간에 얼빵하고 귀엽다는 생각밖에 안했었는데 이렇게 보면 공작영애다운 면모가 보이네.
‘멋지네요. 조이.’
“저기 얼빵 영애. 혹시 지금 멋있는 척 하는 거야? 나 이렇게 대단해요~ 하고?”
“네?! 딱히 그런 건 아닌…데요.”
어라. 진짜였어?!
조이 속으로 나 좀 멋있는 듯?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야?!
멋있다는 말은 취소할게. 조이. 너는 언제 어디서나 얼빵영애였나봐.
내 시선이 미적지근해지자 조이가 헛기침을 내뱉었다.
“크흠. 어쨌든 알른 영애. 지금 따로 할 일이 있진 않으시죠?”
‘네.’
“응. 그런데?”
“잠시 따라와 주시겠어요? 저희 아버님께서 할 말씀이 있다고 하셔서.”
파트란 공작? 그 사람이 왜? 수상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려는 건가.
만약 그런 거라면 이번에야말로 병약 메스가키가 될 테다. 내 손으로 내 머리를 때려서라도 기절하고 말 거라고!
조이를 따라서 향한 곳은 파티장 바깥에 있는 응접실이었다.
그 곳에는 파트란 공작말고도 베네딕이 함께 있었다. 파티가 개최되고 나서 어디 갔나 했더니 공작이랑 같이 있었던 거구나.
저 두 사람이 같이 뭉쳐있으니까 분위기 장난 아니네. 조직폭력배 두목이랑 그 옆에 행동대장이 같이 있는 느낌이야.
방금 전까지 누굴 묻어버릴지에 대해 의논했다고 해도 무심코 믿어버릴 것 같아.
타볼이 사건을 벌인 후에 처음으로 만나는 거라 그런 걸까. 베네딕은 할 말이 많은 듯 입을 우물거렸지만 그를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아버님. 부탁하신대로 알른 영애를 데리고 왔습니다.”
이 자리의 침묵을 깬 것은 조이였다. 내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평소보다 날이 선 듯한 조이의 어투에 파트란 공작이 쓴웃음을 지었다.
“수고했다. 조이. 이제 돌아가 봐도 괜찮다.”
“아뇨. 여기에 있을게요. 그래도 괜찮죠?”
“…그래. 편한 대로 하거라.”
뭐야? 조이한테 사춘기가 온 건가?! 왜 아빠 미워 상태인 건데?!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이해하지 못한 나였지만 조이가 앞서 움직이기에 그녀의 뒤를 따라 의자에 앉았다.
“파티를 즐기는 중에 불러서 미안하네. 알른 영애. 따로 할 이야기가 있어서 말이야.”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허술 공작. 어차피 허접들 밖에 없어서 지루하던 참이었거든요.”
“그렇다면 다행이군. 우선 전해야 할 말은. 그래. 미안하네. 알른 영애. 나 때문에 괜한 고생을 하게 만들었어.”
이 사람이 왜 나한테 사과를 하는 거야?
처음에는 그를 이해할 수 없어 고갤 갸웃거리던 나였지만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생각이 바뀌었다.
파트란 공작이 내게 수상 소감을 강권한 이유가 내게 곤경을 안겨주기 위함이었을 줄은 몰랐지!
이봐요! 아저씨! 당신 딸 친구한테 이래도 되는 겁니까?!
이 작고 귀여운 여자애 어디에 괴롭힐 구석이 있다고 이딴 짓을 벌여요!
혹시 이겁니까?!
‘설마 허술공작이라는 별명이 마음에 안 드신 건가요?!’
“설마 허술 공작님. 제가 붙인 별명이 마음에 안 든다고 쫌생이 같은 행동을 한 건가요? 공작가를 이끄시는 분께서 그토록 속이 좁을 줄이야.”
“설마 그럴 리가 있겠나! 알른 영애 그대는 조이의 생명을 구해 준 은인이다! 그까짓 별명 때문에 치졸한 짓을 하겠는가! 애초에 본인은 허술 공작이라는 별명이 정말로 마음에 들었으니 원한을 가질 이유도 없다!”
열변을 토한 공작은 이윽고 내게 이번 일을 벌인 이유를 알려주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조이가 나를 너무 따르는 것 같기에 완벽히 신용해도 괜찮을 사람인지 평가하고 싶었단 거구나?
중간중간 예상치 못한 일이 자꾸만 생겨서 규모가 커져버렸다는 공작의 말을 듣고 있으려니 이 사람이 왜 커뮤에서 개그 캐릭 취급 받았는지 떠올랐다.
파트란 공작은 분명 능력 있는 사람이고 그 능력을 뒷받침할 권력도 있는데 주도적으로 무언가를 하려고만 하면 삐끗하는 사람이었지.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자꾸만 과거 커뮤에 나돌던 여러 밈이 떠오르는 탓에 웃음이 새어서 화를 내는 게 불가능했다.
어쨌든 간에 끝나 일인데다가 잘못했다는 사과도 받았고 따로 보상을 주겠단 약속도 받았으니 더 이상 화를 낼 이유가 없기도 했고.
그나저나 이번 일을 주도한 게 공작이라면 이번 일은 1왕자와는 관계없는 건가?
나 백퍼센트 걔가 흑막일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마지막에 이득만 쏙 챙긴 녀석이 아무 연관이 없었다니! 이거 직무 유기 아냐?!
“보상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천천히 하도록 하지. 자칫 잘못하다간 파티가 끝날 때까지 이야기가 끝나지 않을 수도 있으니.”
공작은 그리 이야기를 하며 우리를 되돌려 보내 주었다.
파티장으로 돌아가는 길에 조이는 내게 사과를 건넸다.
듣자 하니 조이는 파티가 시작되기 직전에 공작에게 불려갔었다는 모양이다.
그 곳에서 공작의 마법에 묶여 옴짝달싹도 못하게 되었다고.
어떻게든 거기서 빠져나와 파티장으로 돌아왔을 적에는 이미 타볼이 목소리를 높인 상태였다고.
조이가 괜히 공작에게 차가운 것이 아니었다. 이건 아무리 착한 사람이라도 화를 낼만한 사안이었다.
“정말 죄송해요. 알른 영애.”
그녀의 사과에는 여러 말이 함축되어 있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한 일에 대한 사과. 빨리 도움을 주지 못한 것에 대한 사과. 이외에도 내가 추측하지 못하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
분명 그녀의 말엔 진심만이 담겨 있었지만 난 그 사과가 달갑지 않았다.
조이가 사과할 일이 아니었으니까.
‘왜 사과를 하세요?’
“얼빵 영애. 왜 말 대신 얼빵하는 울음소리를 내는 거야?”
“…네?”
‘지금은 오히려 제가 고맙다고 말해야 할 상황이잖아요.’
“도와주고서도 왜 쭈굴거리는 건지 모르겠네. 얼빵이에서 소심한 얼빵이로 진화하려는 건가?”
“이젠 영애라고도 안 해주는 건가요?!”
그러게. 너무 얼빵해서 도저히 영애라고 부를 수 없는 지경이 됐나 봐.
조이의 반응이 웃겨서 속으로도 겉으로도 키득거리고 있으려니 어느새 조이도 함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여전히 살벌한 미소이긴 한데. 그래도 쭈글거리는 것보단 이쪽이 낫네.
조이의 기분을 풀어주고서 함께 파티장으로 돌아왔을 때 파티장의 분위기는 한껏 고조된 상태였다.
장대하고도 아름다운 오케스트라의 음악 소리. 가운데에서 춤사위를 선보이는 귀족들. 그 주변에서 끼리끼리 모여 웃음을 터트리는 이들.
영화에서나 보았던 풍경에 감탄을 하고 있으려니 옆에서 조이의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해요. 알른 영애. 할 일이 생겼네요.”
조이는 그리 이야기를 하고는 서로 날선 눈빛을 보내고 있는 영애 무리 쪽으로 향했다.
공작 영애는 저런 일도 해야 하는 건가. 하긴 조이는 여러 귀족 영애의 우두머리이기도 하니까. 신경을 써야겠지.
가능하다면 나도 조이를 도와주고 싶었지만 내가 저 사이에 끼어들었다간 일거리를 늘릴 뿐이었다.
그래서 난 얌전히 파티장의 구석으로 향했다.
내가 다른 사람 눈에 안 띄는 게 조이의 근심을 줄여주는 일 아니겠어?
짧은 시간에 많은 일을 겪어서 그런가 배가 고프네. 단 게 땡겨.
파티장에 맛있는 디저트가 있는 것 같던데 구석에 박혀서 그거나 먹고 있을까.
그리 생각을 하고서 음식이 있는 쪽으로 향한 나는 프레이와 그녀의 동생을 만날 수 있었다.
위장에 구멍이라도 뚫린 건지 또 다시 접시를 가득 채우고 있는 프레이와 그녀를 타박하는 동생의 모습은 꽤나 신선했다.
이 둘 지금은 서로 데면데면할 시점이지 않나?
“언니! 듣고 있!… 어. 알른 영애님.”
“안녕. 루시.”
목소리를 높이던 프레이의 동생은 날 보고서 다급히 입을 다물었으나 프레이는 집게를 집은 채 인사를 건넬 뿐이었다.
진짜 파티장에 있는 음식을 혼자서 다 해치울 생각인건가.
프레이가 잘 먹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얘는 아무리 생각해도 현대에 태어났어야 해. 먹방을 했으면 분명 대성했을 거야.
“저기! 알른 영애!”
놀라움을 담아 프레이를 노려보고 있으려니 그녀의 동생이 내 앞에 다가왔다.
“감사합니다! 저희 언니를 사람으로 만들어 주셔서!”
그리곤 대뜸 고개를 숙였다.
가벼운 인사도 아니고 무슨 은인을 향하는 것 같은 힘이 잔뜩 담긴 인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