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고 투명한 하늘, 세희 연구소 안뜰을 내리쬐는 정오의 햇살.
이제까지 적당히 즐겁고, 적당히 평범한 세희 연구소의 하루였지만, 지금 안뜰에는 굉장히 특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붉게 물든 미니 사신이 뚜방뚜방 팔다리를 크게 흔들면서 안뜰을 행진하고 있었다.
붉은 사신의 행진?
평범하다면 평범한 광경이다.
하지만 그 붉은 사신의 숫자가 전혀 평범하지 않았다.
분명 붉은 사신은 한 마리뿐이었을 텐데, 지금은 안뜰을 가득 메울 정도로 그 숫자가 늘어나 버린 상태였다.
안뜰에는 그 많던 황금 사신들은 종적을 감췄고, 붉은 사신들만이 남아 거대한 행렬을 이룬 상태였다.
그리고 그 붉은 사신의 행렬을 이끄는 것은 피부가 붉게 변한 회색 사신이었다.
머리 위에 붉은 사신 하나를 얹고서 뚜방뚜방, 앞장서서 걸어가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되어서 회색 사신을 찾아 안뜰을 찾아온 예린은 그 광경을 보면서 감탄하고 있었다.
‘사신이는 색도 바꿀 줄 알았구나! 대단해!’
그리고 우연히 지나가다가 그 심상치 않은 장면을 발견한 서아도 안뜰로 들어와서 수첩을 열고 메모를 시작했다.
<미니 사신의 모습을 바꾸는 오브젝트는 다수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노란 미니 달이 생긴 뒤에 생긴 현상.>
<마포구 그리고 노란 달과의 연관성이 예상된다.>
그 수첩 안에는 보안실에서 발견된 황금 사신 보자기의 사진도 같이 실려있었다.
그렇게 붉은 피부로 안뜰을 행진하던 회색 사신은 갑자기 자리에서 멈추더니, 자신의 피부색을 황금색으로 바꾸고 폴짝폴짝 제자리에서 뛰기 시작했다.
그러자 몇몇 붉은 사신들이 자기 피부를 벗어버리더니, 황금 사신으로 변해버렸다.
그리고 그 황금 사신들은 굉장히 신나는 표정으로 회색 사신처럼 약간 어설픈 동작을 따라 하며 점프를 시작했다.
그렇게 폴짝폴짝 뛰던 회색 사신은 이어서 마구잡이로 색을 바꾸기 시작했다.
검은색, 푸른색, 남색, 주황색, 노란색 그리고 다시 붉은색!
그러자 안뜰에 모인 미니 사신들이 너무 좋아서 광란에 빠진 것처럼 마구 뛰고 서로 부딪치고 돌아다니면서 폴짝폴짝 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회색 사신의 색이 점점 빠르게 변하기 시작하더니, 미러볼처럼 형형색색의 색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둠칫둠칫.
그리고 안뜰에 신나는 디스코 음악이 흐르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음악에 서아가 미간을 좁히고 주변을 돌아보자, 예린이 TV 소리를 키우고 음악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미러볼 사신과 춤추는 미니 사신들의 파티가 시작되었다.
서아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미니 사신들이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것을 관찰하며 메모를 이어 나갔다.
서아가 가장 유심히 보는 것은 황금 사신들 사이에 숨어서 어색한 미소를 띠고 있는 미니 사신이었다.
황금 사신과 비슷한 색이었지만, 눈이 빛나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쭈글쭈글한 자세를 취한 사신.
<미니 사신과 미니 달은 연관성이 명확해 보인다.>
<노란 달의 미니 사신은 황금 사신과 닮았지만, 눈에서 빛이 나지 않는다.>
<하늘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빛의 고리와 회색 사신도 연관이 있어 보이지만, 아직 증거가 없다.>
그렇게 놀지 않고 메모만 계속하는 서아가 마음에 들지 않는 지, 새싹 사신이 수첩 위에 누워서 시야를 가리기 시작했다.
수첩 위에 누워서 장난기가 가득한 표정으로 키득키득 웃는 새싹 사신을 본 서아는 어쩔 수 없다는 것처럼 피식 웃더니 수첩을 천천히 덮었다.
그리고 즐거운 미소를 베어 물고, 휴대폰을 꺼내서 춤추는 미니 사신들을 구경하며 사진으로 남기기 시작했다.
***
보라색 거울로 가득한 넓은 방의 끝에 있던 보라색 인형이 어느새 소녀의 코앞까지 도달해 있었다.
징그러운 눈알을 잔뜩 달고 있는 인형이 갑자기 다가와서 소녀가 놀라기 무섭게, 흑색 검이 반응했다.
검신이 길게 늘어나며, 인형을 일도양단할 기세로 내리쳤다.
스아악.
하지만 흑색 검의 예리한 참격은 인형의 몸통에 흠집조차 내지 못하고 그 표면 위를 긁을 뿐이었다.
“!”
소녀는 내심 속으로는 정말 강력한 흑색 검이 해결해 줄 거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소녀가 믿고 있었던 강력한 흑색 검의 참격은 소용이 없었다.
정말, 아주 정말로 위험한 상황이라는 생각이 들자, 소녀는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여전히 안색은 별로 좋지 않았지만, 머릿속은 기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보라색 방, 보라색 거울, 갑자기 다가오는 보라색 인형.’
생각하면서 자연스럽게 눈을 한번 깜빡이자, 인형은 그 잠깐 사이에 순식간에 다가와서 그 팔을 크게 휘둘렀다.
삐-!
그러자 흑색 검이 두 갈래로 갈라져서 뻗어나가며 한줄기는 땅에 박혀 들어갔고, 나머지 한쪽은 인형의 팔을 후려쳤다.
콰앙.
흑색 검이 단단하게 지켜주는 동안, 소녀는 계속 해서 생각을 이어 나갔다.
‘저 인형은 내가 보지 않을 때, 움직이는 것 같아.’
그런 생각이 들기가 무섭게, 소녀는 의식적으로 눈을 크게 뜨기 시작했다.
절대로 눈을 감으면 안 돼.
인형은 점점 빨라지니까, 흑색 검이 감당하지 못할 속도로 움직이게 될지도 몰라.
소녀는 인형을 빤히 바라보며, 해결 방법을 고민했다.
저 인형을 파괴하는 것이 이 방의 시련인 거겠지.
하지만 흑색 검의 참격조차 통하지 않는데, 어떻게?
분명 방법이 있을 거야.
개고기 아저씨가 그랬어.
절대로 이길 수 없는 미궁의 몬스터 따위는 없다고.
너무 눈을 오래 떠서 눈물이 주룩주룩 흘렀지만, 소녀는 인형을 언제나 시야 한구석에 두고 천천히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인형에게 계속해서 시선을 둔 채, 주변을 살펴보던 소녀는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저 인형, 거울에 비치지 않네.’
거울로 가득한 방이었지만, 보라색 인형은 거울에 비치질 않고 있었다.
마치 여기에는 없다는 것처럼.
그리고 딱 한 거울에만 인형의 모습이 제대로 비치고 있었다.
소녀는 그 거울 쪽으로 검을 내밀면서 소리쳤다.
“저 거울이야. 저 거울을 부숴!”
그러자 흑색 검이 알았다는 것처럼 ‘삐!’ 소리를 내더니 검신을 쭈욱 늘려서 소녀가 가리킨 거울을 관통해 버렸다.
쨍그랑.
거울이 깨지는 것과 동시에 방 내부에 있던 모든 것이 멈추더니, 천천히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인형은 물론 방에 가득했던 거울들도 모래로 변해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시련이 끝난 미궁의 모습이었다.
그 순간 소녀는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다리에 힘이 빠져서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고 검을 꼭 끌어안았다.
“드디어 끝났어.”
소녀는 눈 주변을 잔뜩 적신 눈물을 훔치며, 흑색 검을 향해 자랑하듯이 떠들기 시작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걸까?”
“어쩌면 나, 모험가의 자질이 있었던 걸지도 몰라!”
“이 이야기를 아저씨에게 해줘도 믿지 못하겠지?”
그리고 흑색 검을 강하게 끌어안으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고마워. 네가 없었다면 분명, 죽었겠지. 정말 고마워.”
그리고 소녀는 어려운 적을 물리쳤으니, 이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들떴다.
“드디어 미궁 도시로 돌아갈 수 있어!”
아저씨가 하는 잡화점에 찾아가서 이번 일을 잔뜩 자랑해야지!
그리고 흑색 검도 소개해 줘야지!
미궁 도시에서 친한 사람들에게 잔뜩 자랑할 생각에 싱글벙글한 소녀였지만, 모래가 모두 사라져 버린 뒤, 드러난 풍경은 소녀의 예상과는 동떨어져 있었다.
“어… 어째서?”
평범한 미궁의 방으로 바뀐 풍경.
그리고 아래로 뻗어 내려가는 깊은 계단.
그 어디에도 도시로 돌아가는 출구는 보이지 않았다.
***
나는 침대 속에 푹 파묻혀서 사지를 쭉 뻗고 누워있었다.
‘아, 힘들다. 너무 신나게 놀아버렸어.’
육체적으로 힘들지는 않았지만, 정신적으로 지친 기분이었다.
분명 이렇게까지 미니 사신들과 놀 생각은 없었는데, 예상보다 몇백 배는 미니 사신들이 좋아해 줘서, 나도 그 기분에 같이 취해버렸다.
미니 사신들도 굉장히 만족한 표정으로 내 몸통 위에 잔뜩 달라붙어서 비비적거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미니 사신 고치가 되어버린 나는 고개만 돌려서 TV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반쯤 졸면서 멍하니 있던 나는 TV에서 나오는 뉴스를 보고는 눈이 번쩍 떠지는 기분을 느꼈다.
[현재 일본에서는 붉은 번개의 섬에 대한 다양한 분석이 나오는 중입니다.]
얼마 전에도 나왔던 붉은 번개의 섬에 대한 이야기였다.
[최근 위성 사진을 정밀 분석을 통해서 이루어진 분석 결과는 상당히 놀라운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TV 화면에는 흐릿한 사진들과 그것을 좀 더 선명하게 복원한 사진들이 비교되고 있었다.
판타지 소설에나 나올 법한 금속 갑옷을 입고 걸어 다니는 사람들.
멋진 자수가 들어간 로브를 입고 지팡이를 든 사람들.
용의 꼬리처럼 거대한 도마뱀의 꼬리를 통째로 굽고 있는 장면.
마치 판타지 소설 속의 한 장면처럼 펼쳐진 시장의 풍경.
그야말로 내 마음을 떨리게 만드는 장면이었다.
‘나도 갈래!’
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곤히 잠들어 있던 미니 사신들이 침대 밖으로 잔뜩 튕겨 나갔다.
미니 사신들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나를 돌아봤지만, 나는 검은 사신들을 잔뜩 불러 모아서 판타지 세계로 모험을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
판타지 세계로 떠나려면 적당한 복장을 해야겠지.
판타지 하면 검과 방패, 그리고 모험!
나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는 검은 사신들에게 내가 필요로 하는 여러 가지를 의지로 전해주었다.
‘멋진 갑옷.’
‘멋진 검.’
‘모험가!’
이미지와 감정을 의지로 전달하는 방식으로는 제대로 된 설명이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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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제대로 된 갑옷을 본 적이 없으니까 디테일한 감정을 싣기도 힘들었고 말이다.
내 표현력 부족과 미니 사신들에게 만연한 상식 부족 때문에 엉망진창인 결과물이 나올 줄 알았는데, 의외로 제대로 된 물건이 나왔다.
검은 사신들은 생각보다 이런 검과 갑옷을 잘 아는 건지, 대충 설명했는데도 제대로 된 갑옷과 검으로 변해서 내 몸에 달라붙었다.
히히.
마음에 들어.
정교하게 만들어져서 움직이기에도 편하고, 겉으로 보기에도 꽤 멋진 갑옷이 만들어졌다.
당장이라도 판타지 세계로 떠나고 싶었던 나는 순간이동을 하려고 했지만, 무언가에 막힌 것처럼 순간이동이 불가능했다.
붉은 번개의 섬에 있는 검은 사신의 기척이 분명히 느껴지는데도 그랬다.
뭐, 어쩔 수 없지.
나도 구름 고기를 타고 떠나는 수밖에.
나는 즐거운 마음을 안고 안뜰을 향해 달려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