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 고래 위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니, 따스한 햇살과 맑고 푸른 하늘이 날 축복해 주고 있었다.
마치 앞으로의 판타지 모험을 축하해 주는 것 같은 멋진 날씨였다.
그리고 손을 들어 올려 태양 빛에 갑옷을 비춰보자, 고급스러운 검은색이 태양 빛 속에서 멋지게 빛났다.
흑기사의 건틀릿 같아, 멋있어!
갑옷도 옷처럼 피부를 감싸고 있어서 굉장히 갑갑한 기분이 들었지만, 판타지의 로망을 위해서는 기꺼이 참을 수 있었다.
게다가 이 갑옷은 다른 옷과는 차별화되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안마 좀 해줘.’
내가 갑옷을 향해 의지를 전달하자, 갑옷에서 ‘안마!’라고 외치는 의지가 뿜어져 나오면서 안마하듯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검은 사신의 안마를 즐기면서, 따사로운 햇살을 만끽했다.
기분 좋은 열기를 전달해 주는 태양 빛 속, 푹신한 구름 고래 위에 누워서 조금 시간을 보내니, 어느새 구름 고래가 목적지에 도착한 것처럼 한 장소를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내가 목적지로 했던 ‘붉은 번개의 섬’이 보였다.
섬 전체는 구름에 둘러싸여서 보이지 않았지만, 저 속에 있을 판타지 세상을 생각하니 마음이 들떴다.
섬을 둘러싼 구름 속에서는 간간이 불길하게 빛나는 붉은 번개가 돌아다니고 있었지만, 별로 위협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즐거운 표정으로 섬을 내려다보던 나는 그대로 섬을 향해 뛰어내렸다.
쿵!
섬을 침입하려는 자를 태워버리려는 붉은 번개를 뚫고 그대로 떨어져 내린 내가 도착한 곳은 푸른 잔디가 깔린 언덕 위였다.
나는 평원 위에 우뚝 솟은 언덕 위에서 주변 환경을 둘러보았다.
나무가 듬성듬성 자라난 드넓은 초원.
저 멀리 보이는 울창한 숲.
그리고 시야 한 편을 가득 채운 거대한 판타지 도시.
높은 건물이 없어서 그런지, 언덕 위에서도 판타지 도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이것이 판타지!’
나는 도시를 내려다보며, 미니 사신들처럼 양손을 번쩍 들고 만세를 했다.
멀리서 대충 살펴보기만 해도, 판타지 느낌이 물씬 풍겨 나오고 있었다.
나는 검은 사신이 변신한 복장과 도시에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복장을 비교하며 이상한 점은 없는지 점검했다.
완벽해.
검은 사신이 변신한 갑옷은 도시의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입은 갑옷과 큰 차이가 없었다.
다행이야.
이 정도면 위화감이 없이, 모험가가 돼서 돌아다닐 수 있겠는걸.
판타지 세계에 들어갈 생각에 들뜨던 도중, 중대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달아 버렸다.
‘피부색!’
안타깝게도 도시를 아무리 살펴봐도 머리카락과 피부가 단색으로 이루어진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노란 달을 파괴하고 얻은 ‘피부색 변환’도 이런 상황에는 별로 쓸모가 없었다.
피부를 살구색으로 바꾸면 머리카락 색도 살구색이 되어버려…….
게다가 평범하지 않은 내 눈은 강렬한 노란색으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안 돼! 내 판타지 라이프가!’
여기까지 왔는데, 판타지 라이프를 즐기지 못하게 된다니!
모험가로 활동하고 싶은 거지, 몬스터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이미 몬스터 놀이는 오브젝트로 돌아다니면서 자주 했었으니까 말이다.
절망스러운 상황이었다.
너무나도 허탈한 기분에 그대로 언덕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렇게 고민하던 도중, 생각보다 간단한 해결책이 갑자기 떠올랐다.
피부색이 문제라면, 피부가 안 보이면 되잖아!
커다란 투구를 뒤집어쓰고, 퍼펙트 풀아머 회색 사신으로 돌아다니면 되는 문제였다.
역시 나는 똑똑해!
히히.
10배는 갑갑해진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판타지 라이프를 위해서 참기로 마음먹었다.
투구까지 만들어서 뒤집어쓴 뒤, 다른 빼먹은 요소들도 채워넣기 시작했다.
허리에는 날렵한 모양의 쌍검을 착용했다.
등 뒤에는 검은색의 멋들어진 망토를 둘러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사의 꽃, 군마를 소환했다.
검은 사신을 타고 다니는 것은 조금 미안해서, 근육과 옷을 만드는 것처럼 자기 육체 모양을 조형할 수 있는 집사 아귀를 불러냈다.
사실 순간이동이 막혀있어서 불러내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약간의 저항감을 이겨내는 것만으로 소환할 수 있었다.
말처럼 쭉 뻗은 목.
몸통을 단단하게 떠받치는 다리.
내 지시대로 제대로 만들어진 안장과 장비들.
소환된 집사 아귀는 내 지시를 제대로 이행해 주었다.
하지만 그 결과물은 썩 만족스럽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말 같지 않아.
아무리 잘 봐줘도 알파카 아닌가?
나는 알파카 아귀를 말처럼 바꾸기 위해서, 검은 사신으로 만든 실로 아귀를 칭칭 동여매기 시작했다.
‘실로 묶어서 근육 모양을 만들면, 저 알파카 아귀도 말처럼 보이지 않을까?’ 하는 간단한 생각에서 시작된 일이었다.
아귀가 제대로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칭칭 감은 뒤, 나는 알파카 아귀를 툭툭 건드리며 의지를 전달했다.
‘야, 말처럼 울어봐.’
그러자 알파카 아귀는 슬픈 표정으로 울었다.
“뀨히히힝.”
하지만 여전히 말처럼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이제는 알파카도 아니고, 실로 묶은 소시지처럼 변해버렸다.
뭐, 판타지 주인공은 보통 말 안 타고 다니니까, 필요 없겠지!
나는 그대로 쓸모가 없어진 알파카 아귀를 미니 사신 정원으로 쫓아냈다.
그리고 나는 판타지 세계와 위화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멋진 갑옷과 망토를 휘날리며 천천히 판타지 도시를 향해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
뚜방뚜방 발걸음을 옮겨서 판타지 도시 내부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판타지 도시 내부는 생각보다 사람이 많았다.
특히 순찰하는 경비병이 생각보다 우글우글했는데, 어디를 가도 시야 한구석에는 꼭 있을 정도였다.
하긴 무기를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으니까, 경비병도 많이 필요하겠지.
하지만 판타지 세계를 탐험하기엔 두 가지 난감한 점이 있었다.
첫 번째는 여기 사람들이 일본어를 사용한다는 점이었다.
두 번째는 내가 여기에서 화폐로 쓰이는 금화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어떡하지?’
도시 안에는 정말 맛있어 보이는 음식을 파는 노점상들이 즐비했는데, 돈이 없어서 하염없이 구경하고 있을 뿐이었다.
너무 맛있어 보여서 유령화로 몰래 냠냠 해버리고 싶었지만, 유령화 같은 건 전혀 판타지답지 못해서 참고 있었다.
그렇게 포기하고 도시 중앙에 있는 거대한 유적지에 가려고 하는 순간, 한 노점상에서 알아듣기 힘든 말을 하며 닭꼬치를 건네주었다.
“이……이거라도 드세요.”
일본어라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닭꼬치를 공짜로 준다는 뜻이겠지?
나는 싱글벙글하며 닭꼬치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닭꼬치를 먹으려고 했지만, 큰 문제에 부딪혔다.
투구 때문에 먹을 수가 없어!
투구를 벗거나, 입 부분을 뚫어버리면 피부색이 들켜버릴 텐데, 어쩌지?
나는 닭꼬치를 들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검은 사신에게 명령을 내렸다.
‘투구 안이 안 보이는 상태로 닭꼬치를 먹을 수 있도록 해줘! 같이 먹자.’
그러자 투구 표면이 꿈틀거리더니, 검은 사신의 작은 손들이 마구 튀어나와서 닭꼬치를 투구 안쪽으로 빨아들였다.
그렇게 나는 맛있는 닭꼬치를 순식간에 먹어 치우고, 도시 중앙의 거대한 유적지 앞에 도착했다.
저 유적지가 ‘붉은 번개의 섬’의 핵심으로 보였다.
유적지 앞에는 커다란 비석이 놓여있는데, 다행히도 거기에는 한국어가 한 줄 쓰여있었다.
‘미궁을 마지막까지 돌파하면, 소원을 하나 이룰 수 있다.’
오, 저 유적지가 미궁이구나.
그러면 이 도시는 미궁 도시인 건가?
나는 그야말로 판타지의 증거나 마찬가지인 미궁을 올려다보며, 히히 웃었다.
***
미궁이 도시 중앙에 있어서 그런지, 미궁 도시의 외곽으로 열려있는 출입구는 언제나 한산했다.
그런 출입구 앞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던 경비병 중 한 명이 미궁 도시로 들어오는 갑옷을 발견했다.
투방투방.
금속 갑옷이 지면과 부딪치면서 나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리며, 매우 수상해 보이는 갑옷이 미궁 도시로 걸어들어오고 있었다.
도시 밖에서 들어왔으면서 먼지 하나 붙어있지 않은 망토.
혼자서는 입기도 힘들어 보이는 복잡한 구조의 갑옷.
수상해 보이는 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지만, 가장 수상한 것은 그 크기였다.
웬만한 초등학생보다도 작은, 성인 남성의 허리에 간신히 도달하는 신장.
미취학 아동 같은 키를 가졌으면서, 저런 무거워 보이는 갑옷을 입고 있다니.
그야말로 온몸으로 수상함을 뿜어내고 있는 존재였다.
경비병은 창을 제대로 움켜쥐고 그 갑옷에서 천천히 다가갔지만, 차마 붙잡을 수가 없었다.
‘신장 따위가 문제가 아니야.’
다가가자마자 느껴지는 오브젝트 특유의 존재감.
투구 속에서 간간이 비치는 흉흉한 노란 불빛.
그 불빛을 보는 순간 경비병은 깨달은 것이다.
‘일반인이 어찌할 수 없는 강력한 오브젝트!’
아마 덤비는 순간 경비병 따위는 순식간에 죽여버리겠지.
결국 경비병은 동료들을 잔뜩 불러 모으고, 미궁을 돌아다니는 모험가들에게 도와달라는 말을 남기는 것이 최선이었다.
사람들을 대피시키는 행동조차 오브젝트를 자극하게 될 수 있으니 어쩔 수 없었다.
경비병들은 목숨을 걸 각오를 다지며, 오브젝트를 몰래 따라다니고 있었다.
저 오브젝트는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공격성을 표출하지 않았지만, 만약 표출한다면 목숨을 걸어서라도 모험가가 도착할 시간을 끌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미궁 도시의 인기 있는 닭꼬치 노점상을 하는 상인은 필사적으로 미소를 지으며 앞에 있는 갑옷 오브젝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끔 투구 속의 노란 불빛이 보일 때마다 상인은 공포에 떨었다.
오브젝트는 그저 닭꼬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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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거라도 드세요.”
상인은 마치 닭꼬치를 달라는 것처럼 바라보고 있는 오브젝트에게 굴복해서, 닭꼬치 하나를 넘겨주었다.
닭꼬치를 넘겨받은 오브젝트는 물끄러미 닭꼬치를 바라보더니, 투구를 벗지도 않고 닭꼬치를 투구 위로 가져갔다.
그러자 투구 입 부분에서 지네의 발처럼 무수히 많은 손이 뻗어져 나오더니, 닭꼬치를 갈기갈기 찢어서 투구 속으로 끌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마치 징그러운 곤충의 식사 장면을 연상시키는 모습에 상점 주인은 소리를 지를뻔했지만, 양손으로 입을 막고 겨우 참아냈다.
‘소리 지르면 안 돼.’
‘소리 지르면 안 돼.’
상점 주인은 기절할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이를 악물며 버텼다.
그리고 오브젝트가 천천히 미궁 쪽으로 떠나가자, 그대로 한숨을 내쉬면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겨우 살았다.
***
미궁 2층.
미궁 1층과 달리 차가운 공기가 흐르고, 눈이 내리는 풍경을 가진 공간이었다.
평범한 풍경과 확연히 다른 점은 눈이 땅에서부터 하늘로 내리고, 눈에 뒤덮인 나무들이 뒤집어진 상태라는 점이었다.
뒤집어진 나무들은 뿌리를 드러낸 채 공중에 떠 있었고, 바닥에서는 눈이 생겨나 하늘로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정말 추워.”
소녀는 몸을 둥글게 만 채, 희미한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는 것처럼 횡설수설.
미궁 1층을 지나서, 미궁 2층에 도착했지만, 소녀의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다.
원인으로 짐작되는 것은 많았다.
부실한 식사.
갑자기 추워진 기온.
추위에 대비가 되어있지 않은 복장.
미궁이라는 위험하고 생소한 환경으로 인한 긴장.
소녀는 몸살이라도 난 것처럼 열이 나고 어지러워서 제대로 걷지 못하고 바닥에 웅크리고 누워있는 상태였다.
눈을 뜨는 것도 힘든 건지, 소녀는 눈을 꼭 감고, 작게 떨고 있었다.
삐-.
그런 소녀를 향해 검은 사신이 원래 모습으로 돌아와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소녀의 볼을 토닥였다.
‘엄마.’
검은 사신은 지금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 다급한 마음을 담아 의지를 뿜어냈지만, 엄마에게 의지가 닿질 않았다.
‘엄마!’
그래도 검은 사신은 하염없이 의지를 뿜어내며 엄마를 애타게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