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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15

‘미궁을 마지막까지 돌파하면, 소원을 하나 이룰 수 있다.’

온갖 종류의 언어가 쓰여 있던 커다란 비석에 조금 의아한 점이 있었다.

‘소원’이라니.

정말 그렇게 대단한 일을 할 수 있는 오브젝트가 존재할 수 있는 걸까?

정말 강력한 힘을 품고 있던 눈동자를 10개쯤 모으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평범한 오브젝트가 소원을 이루어 줄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그래도 ‘소원’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은 꽤 매력적인 보상인지, 미궁의 입구에는 무장을 갖춘 수많은 사람이 잔뜩 모여있었다.

격렬한 전투의 흔적이 상흔처럼 남아, 마치 물결치는 호수 표면처럼 빛을 반사하는 갑옷을 입은 중년 남자.

마치 바람을 타고 다니는 것 같은 발걸음으로 돌아다니며, 자신의 키만큼 커다란 장궁을 손에 들고 당장이라도 발사할 것 같은 여자.

따뜻한 햇살 속에서 엄청 더워 보이는 로브를 뒤집어쓴 채, 커다란 지팡이를 양손으로 있는 힘껏 붙잡고 서 있는 사람.

남녀노소,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모험가 같은 복장을 하고 미궁의 입구에 늘어서 있었다.

그야말로 미궁 도시였다.

판타지와 함께하는 미궁이라면 같이 파티를 이루어서 하는 미궁 탐색이 정석이겠지.

그런 생각에 기대감을 잔뜩 품고 천천히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생소한 언어가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으,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

게다가 나는 말을 못 하니까, 여기서 파티를 구하지는 못하겠네.

제대로 된 판타지 모험을 못 하게 되어서 그런지, 내 눈에 비친 미궁 입구에서 파괴 조건이 떠올랐다.

<모험의 끝.>

‘내가 못 하는 모험은 모두 못 해야 해!’ 같은 생각은 조금밖에 안 했는데, 갑자기 파괴 조건이 보여서 당황스러웠다.

아쉽게도 미궁 파괴 조건이 생각보다 아리송하네.

그렇게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멍하니 미궁 입구를 바라보고 있었더니,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말 못해도 파티원을 구하는 방법!

미궁 안에서 위기에 빠진 사람들을 나의 멋진 쌍검술로 구하면 파티가 되어주지 않을까?

자연스러운 파티를 추구!

히히.

나는 속으로 웃음을 흘리며, 있는 힘껏 미궁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미궁의 문이라 그런지 대단히 무겁고 뻑뻑했지만, 검은 사신 아머의 힘으로 열 수 있었다.

묵직한 문의 중앙에 서서, 양손으로 문을 밀면서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양손으로 밀어서 여는 묵직한 문이라니!

이것도 역시 모험 같네.

뚜방뚜방.

마음이 잔뜩 들뜬 나는 경쾌한 걸음걸이로 미궁 내부로 발걸음을 옮겼다.

***

소녀에게 개고기 아저씨라고 불렸던 중년 남자는 오래전에 입었던 갑옷까지 꺼내입고 미궁 입구에 서 있었다.

전투의 상흔이 잔뜩 남았지만, 세심하게 제대로 관리가 되어있는 오래된 갑옷은 햇살을 잘게 부수며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베테랑의 무장처럼 보이는 진중한 갑옷과 달리, 남자의 표정은 굉장히 초조해 보였다.

미궁 외부에 걸린 횃불이 초록색으로 타오르고, 미궁의 문이 폐쇄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젠장 벌써 하루가 넘게 지났는데, 아직도 문이 열리질 않는군.”

“이런 사태는 처음이잖아, 조금 진정해. 문이 열리면 바로 꼬맹이를 찾으러 들어가 보자고.”

두터운 로브를 뒤집어쓴 남자가 초조해 보이는 중년 남자에게 조금 진정하라며, 칼칼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나저나 경비병들이 잔뜩 몰려오는군. 이 정도면 거의 미궁 도시 전체의 경비가 온 거 아닌가? 도대체 무슨 일이지?”

두터운 로브를 입은 남자의 의문에, 가죽 갑옷을 챙겨입은 여자가 턱짓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거 때문이겠지. 미궁 내부도 아닌데, 저 정도 오브젝트가 도시를 활보하고 있으니 긴장할법해.”

그 말을 듣고 검은 갑옷을 입은 오브젝트 쪽을 돌아본 로브의 남자는 꿀꺽 침을 삼키며 말했다.

“저런 게 왜 도시에 있는 거지? 적의가 느껴지지 않아서 다행이군. 적대적이었다면 당장 도망가 버리고 싶어질 정도야.”

커다란 활을 들고 있는 여자는 잔뜩 긴장한 로브의 남자를 보고 작은 소리로 웃었다.

“너무 긴장한 거 아니야? 지팡이 부러지겠어.”

“남이사. 너도 지금 활시위까지 재어놓고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 둘의 말다툼은 마치 공포를 잊으려고 하는 것처럼 과장된 어투였다.

이 가벼운 말다툼은 미궁 입구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 이상한 소리는 마치 단단한 돌이 부스러지며 내는 비명 같았다.

1m 남짓한 작은 크기의 오브젝트가 양손으로 굳게 닫힌 미궁의 문을 밀어내고 있었다.

별다른 문제가 없어 보이는 동작이었지만, 시선을 내려서 오브젝트의 발을 보면 끔찍한 심연이 도사리고 있었다.

검은색 혈관 같은 촉수가 꿈틀거리며 단단한 바닥을 파고들어 가고 있었다.

문을 밀어내기 위한 지지력을 얻기 위한 것으로 보였는데, 강력한 힘을 내포한 채 맥동하는 검은 혈관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공포에 질리게 만드는 형상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바위가 부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막혀있던 미궁의 문이 완전히 열리는 순간, 그 불길한 혈관들은 다시 갑옷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투방투방.

그렇게 문을 강제로 열어버린 검은 갑옷 오브젝트는 경쾌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미궁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미궁 입구에 모인 사람들이 공포스럽고 갑작스러운 사태에 몸이 굳어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을 때, 오래된 갑옷을 입은 중년 남자가 빠른 속도로 열린 문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남자가 들어가는 것과 동시에, 열렸던 미궁의 문은 다시 굳게 닫혀버렸다.

***

미궁의 내부로 들어가자, 공간이 뒤틀리면서 나를 다른 공간으로 전송시켰다.

그렇게 전송된 공간은 4개의 횃불이 걸린 정사각형의 방이었다.

‘오오.’

신기한 관광지에 온 기분으로 주변을 살펴보았다.

횃불 4개와 천장에 수상한 알파벳과 숫자의 나열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몬스터나 통로는 보이지 않았다.

음, 뭔가의 퀴즈 같은 건가?

‘뀩.’

갑자기 생각하기 귀찮아진 나는 공간을 찢어서 한쪽 벽을 부숴버렸다.

그렇게 몇 번씩 벽을 넘어가다 보니, 드디어 몬스터와 조우할 수 있었다.

몸이 녹색으로 타오르는 커다란 늑대였다.

나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쌍검을 뽑아 들고, 늑대를 향해 달려들어서 양손에 들린 검을 내려쳤다.

하지만 늑대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내 검격을 손쉽게 피해버렸다.

쾅. 쾅. 쾅.

검은 사신의 근력 보정 덕분인지 내가 휘두른 칼날은 묵직한 소리를 내면서 바닥을 때려 부수고 있었지만, 제대로 맞는 검격은 하나도 없었다.

‘엄마, 검 면으로 때리면 안 돼!’

‘엄마, 무기에 힘을 실으려면 발의 위치가 중요해!’

처음에는 조용했던 검은 사신들이었지만, 어느새 내가 한 걸음을 움직일 때마다 훈수를 두기 시작했다.

요리조리 피하는 늑대가 너무 짜증 나서 공간을 찢어버리려다가, 판타지 모험 라이프를 위해서 다른 방법을 생각해 냈다.

‘자동 사냥 on!’

내가 검은 사신에게 알아서 움직이라고 하기 무섭게, 검은 사신 갑옷은 한 발짝 뛰더니 허공에서 한 바퀴 돌면서 유려한 궤적의 검격을 날렸다.

어찌나 예리한 참격이었는지, 늑대의 목이 만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천천히 스르륵 미끄러지며 분리될 정도였다.

황금 사신들의 검술 스승이라서 그런지 검은 사신도 상당한 검술 고수였다.

나중에 세희 연구소로 돌아가면 황금 사신 제1 검이랑 싸움 붙여봐야지.

그렇게 미궁에서의 만남을 기대하며 돌아다니길 몇 분, 나는 커다란 문 앞에 도착해 있었다.

척 보기에도 중요해 보이는 문이었다.

이 미궁은 정말 게임 같으니까, 아마 이 문을 넘어가면 계층 보스가 있고, 이기면 다음 층으로 넘어갈 수 있겠지?

아직 파티원을 만나진 못했지만, 조금 더 수준 높은 2층으로 가야 자연스러운 파티원 영입이 가능할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게, 1층은 늑대랑 제비 같은 녀석들밖에 없었는걸.

다음 층에 대한 기대를 안고 문을 열자, 온통 보라색으로 가득 찬 방이 나타났다.

보라색의 반들반들한 인형과 보라색 거울로 가득 찬 방.

처음 만난 판타지 보스를 기대에 가득 찬 눈으로 바라보며 천천히 보스 방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온통 보라색으로 가득한 방으로 완전히 들어가니, 어느새 들어왔던 문은 사라진 상태였다.

문이 닫힌 정도가 아니라, 아예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그야말로 보스 방이라는 느낌이 물씬 풍겼다.

나는 그렇게 신기한 기분을 느끼며, 미궁 관광을 온 기분으로 사라진 문 쪽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뭔가가 움직이는 느낌이 나서 보스가 있던 방향을 확인해 보니, 보스가 처음보다 멀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뭐지? 착각인가?

보스가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니, 뭔가를 건드려야 움직이는 보스인 것으로 보였다.

그렇다면 이 신비로운 보라색 거울로 만들어진 방에 비밀이 숨겨져 있겠네.

사방을 두리번거리면서 보석처럼 예쁜 방을 구경하고 있었더니,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끼긱. 끼긱.

단단한 표면을 날카로운 것으로 긁는 것 같은 소리.

고개를 돌려서 확인해 보니, 보스가 어느새 반대편 벽에 등을 기댄 상태로 멈춰있었다.

‘?’

이번에는 분명히 움직인 것 같은데?

내가 확신하고 걸어가기 시작하자, 보스가 등을 돌리고 벽을 마구마구 긁기 시작했다.

끼긱. 끼긱. 끼긱. 끼긱.

‘??’

***

검은 사신은 자신을 길쭉한 칼날로 바꿔서 날카로운 얼음으로 만들어진 거미줄을 잘라버렸다.

구름에 뿌리 내린 나무들 사이에서 나타난 얼음으로 만들어진 거미들이 검은 사신과 소녀의 목숨을 노리고 있었다.

‘엄마!’

검은 사신은 계속 애타게 엄마를 불렀었지만, 그 의지는 무언가에 막힌 듯 엄마에게 닿지 못하고 있었다.

거미들 하나하나는 검은 사신보다 약했지만, 애착 인간을 지키면서 싸우기에는 숫자가 너무 많았다.

콜록콜록.

아파 보이는 기침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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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착 인간이 아파하고 있어!’

애착 인간으로부터 부정적인 감정이 스멀스멀 흘러나오고 있었다.

고통에서 촉발되는 수많은 감정.

배신자를 죽일 땐 무심코 먹어버렸지만, 검은 사신은 부정적인 감정을 애써 피하고 있었다.

엄마가 싫어하니까.

하지만 이젠 어쩔 수가 없었다.

거미의 숫자는 점점 늘어나기만 했고, 소녀는 한계에 가까웠다.

애착 인간으로부터 스며드는 고통을 먹으면서, 모습을 바꿨다.

길쭉한 팔과 녹아내린 듯한 다리.

날카로운 이빨과 불길한 눈동자.

장작이 점점 하얗게 물들기 시작했다.

익숙한 힘이 끝도 없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이 힘이면 애착 인간을 지킬 수 있어!

그대로 긴 팔을 뻗어서 거미들을 뜯어먹으려는 순간,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면 안 돼. 나 때문에 그러지 마.”

제대로 눈을 뜨지도 못하면서, 무슨 상황인지도 모를 텐데.

하지만 횡설수설하면서도 그 목소리는 검은 사신을 향한 것만 같았다.

애착 인간의 간절한 말소리에 검은 사신은 다시 미니 사신의 모습으로 돌아와 버렸다.

삐이-.

그러면 애착 인간이 죽어버린다고 슬프게 울었지만, 소녀는 검은 사신을 흐릿한 눈으로 바라보며 웃다가 다시 눈을 감아버렸다.

점점 약해지는 호흡소리.

결국 검은 사신은 애착 인간을 위해 의지를 다지고 다시 고통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옛 신의 모습을 되찾은 검은 사신은 긴 팔을 휘둘러서 거미를 하나 움켜쥐었다.

그리고 자신의 일부를 핏줄처럼 뽑아내서 거미의 몸속에 박아 넣었다.

‘고통.’

꿈틀거리는 검은 핏줄이 거미의 몸을 갉아 먹기 시작하자, 거미는 고통에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끼에에엑!

얼음으로 만들어져 있어서 생물 같지도 않은 거미들이었지만, 검은 핏줄이 파고들자, 비명을 지르며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몸부림치던 거미는 이내 그 목숨이 끊어져 버렸다.

그리고 검은 사신의 불길한 눈동자가 거미들을 훑어보자, 거미들은 끝없는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화르륵.

그러자 검은 사신의 가슴에 있는 하얀 불길이 더욱 크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공포.’

거미들이 고통에 몸부림칠 때마다.

거미들이 공포에 젖을 때마다.

거미들이 절망에 빠질 때마다.

검은 사신의 불길은 더욱 하얗게, 더욱 크게 변했고 검은 사신의 크기도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Seoul Object Story

Seoul Object Story

서울 오브젝트 이야기
Score 9.2
Status: Ongoing Type: Author: Artist: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Humans, once the masters of Earth, were losing their place to the inexplicable phenomena known as Objects. And this is a story about becoming an Object and living worry-free in the Seoul of such a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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