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자에게 시련을 부여하는 괴물, 보라색 인형은 눈을 감은 채 도전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습격을 자동으로 막아주는 마검을 가진 소녀가 통과하고 조금 시간이 흐른 뒤, 육중한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그그극.
이번 도전자는 근력이 상당한지, 상당히 가벼운 동작으로 무거운 문을 밀어내고 있었다.
그렇게 방 안으로 들어온 도전자를 보는 순간, 보라색 인형은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1m 남짓의 작은 신장.
작은 키만큼이나 짧은 두 자루의 검.
전투에 전혀 대비가 되어있지 않은 걸음걸이.
굉장히 무해해 보이는 요소들이 가득한 도전자였지만, 투구 사이에서 노란색 빛을 뿜어내는 눈을 마주 본 순간 알 수 없는 감정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죽음을 보는 것만 같은 눈이었다.
처음 느껴보는 그 감정은 인간들이 흔히 말하는 ‘공포’라는 감정이었다.
도전자의 시선이 떨어지기 무섭게 보라색 인형은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을 알면서도 도망가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벽을 긁었다.
하지만 결국 도망갈 수는 없었고, 도전자가 주먹을 움켜쥐는 순간 인형의 몸은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정해진 시련을 편법으로 통과한 셈이었지만, 보라색 인형은 마음속 깊이 안도하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저 무서운 괴물과 마주할 필요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산산이 부서졌던 인형의 몸과 거울들이 다시 짜 맞춰지고 있었다.
시련이 끝나고, 새로운 시련이 준비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완벽한 시련의 방으로 돌아오는 순간, 다시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그극.
하지만 육중한 문이 천천히 열리는 소리에 불길한 발걸음 소리가 섞여 있었다.
투방투방.
한없이 가벼운 걸음걸이.
악몽이 다시 시작되기 시작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도전자의 탈을 쓴 악마가 만족할 때까지 계속.
***
온몸에 징그러운 눈알이 돋아난 보라색 인형이 날카로운 손톱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그 움직임에는 더 이상 두려움이 느껴지지 않았고, 필사적인 의지만이 담겨 있었다.
검은 사신 갑옷 자동 사냥 모드는 유려한 검격을 인형에게 쏟아내면서 뒤로 물러섰다.
마치 잘 짜인 안무처럼 보스 방을 화려하게 횡단하던 전투는, 보스 방 구석에 있는 거울을 내가 ‘우연히’ 발견하는 행동을 취하고, 그것을 파괴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보라색 인형은 거울이 부서지자, 지친 걸음걸이로 터덜터덜 자기가 나타났던 자리로 걸어가더니 주저앉았다.
그리고 눈을 감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천천히 가루가 되어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표정 같은 것이 별로 없는 인형이었지만, 그 흩어지는 모습에서는 왠지 모를 ‘허탈함’ 같은 것이 느껴지고 있었다.
나는 평범한 석실이 된 보스 방 중앙에 가만히 서서, 체크 리스트를 확인했다.
<회색 사신 생애 첫 보스 룸 시나리오.>
1. 처음 보스 방에 들어가서 멈춰있는 보스를 발견하는 회색 사신. <클리어.>
2. 신기한 방을 둘러보다가, 시선을 떼면 움직이는 보스를 뒤늦게 발견한 회색 사신. <클리어.>
3. 결국 모든 눈을 완전히 다 떠버려서, 시선을 떼지 않아도 움직이는 보스와의 화려한 전투. <클리어.>
4. 치열한 전투 중, 우연히 발견한 거울을 파괴하며 보스전 종료. <클리어.>
완벽해!
마치 ‘날 여기서 내보내 줘!’라고 온몸으로 주장하던 인형을 데리고 이토록 멋진 보스전 경험을 하게 되었다니 만족스러웠다.
처음에는 정말 실망했었다.
정말 기대하고 기대했던, 미궁 첫 보스전이 무서워서 도망가는 해프닝으로 끝나버리다니.
미니 사신 정원을 펼쳐서 다 쓸어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미니 사신 정원을 소환하기 직전, 나는 깨달아 버린 것이다.
되돌아가서 다시 하면 돼.
게임을 할 때, 세이브/로드를 하는 것처럼!
말이 통하지 않는 오브젝트 보스였지만, 진심은 통하는 법이었다.
마음을 담아서 때리고, 때리고, 때리고, 때리다 보니, 결국 보라색 인형도 내 기분을 이해해 주었다.
미궁 경험은 중요하니까, 역시 이해해 줄 줄 알았다.
그나저나 저 보스 오브젝트의 파괴 조건이 좀 다르네.
매번 거울을 부수면 죽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저 가루가 돼서 형상을 잃어버릴 뿐 죽지 않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 눈에는 파괴 조건이 보였으니까.
보라색 인형과 보라색 방의 파괴 조건은 <1층 보스 코어의 파괴.>.
인형을 비추는 거울은 코어가 아니었다.
보라색 인형도 해로운 인형이니까, 부숴두는 게 좋겠지?
나는 오브젝트 본체를 찾아주는 ‘빛나는 더듬이’로 보스 방 깊숙이 묻혀있던 코어를 찾아서 부숴버리고,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히히, 정말 알찬 1층 보스전이었어!
***
소녀에게 개고기 아저씨라고 불렸던 중년의 남자는 미궁 1층을 마구잡이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개고기 아저씨!’
태양이 저물어 가는 저녁쯤, 미궁에서 돌아온 소녀가 해맑게 외치는 목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들리는 것만 같았다.
미궁에 들어가서 반드시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우기는 소녀를 설득하기 위해서 했던 이야기 때문에 붙어버린 괴상망측한 별명 ‘개고기 아저씨’였지만, 남자는 그 별명이 마음에 들었다.
미궁에서 얻는 힘이 두려워, 미궁을 내려가는 것을 포기한 사람에게 나름 어울리는 별명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돌아다녀도 소녀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남자가 미궁을 다닌 시절에 꼼꼼하게 작성했던 지도를 잡화점에 파는 물건인 척 넘겨줬으니, 웬만해선 문제가 없었겠지만, 지금은 비상사태였다.
초록색으로 타오르는 횃불은 남자도 본 적 없는 이상 현상이었다.
그리고 다리에 칼날을 단 제비가 문제였다.
이토록 위험한 몬스터가 미궁 1층에 배치되다니, 확실히 뭔가가 바뀐 것이 분명했다.
그것도 미궁을 탐사하는 모험가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제비에게 처참하게 토막 난 시체들.
이상하게 물건만 있고 사람이 없는 야영지.
흐느적거리고 날카로운 검에 단번에 토막 난 제비의 사체.
수상한 흔적들은 많았지만, 그가 찾는 소녀의 흔적은 없었다.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니.
그러던 중, 충격적인 흔적을 발견했다.
튼튼한 가죽을 덧대서 만든 견고한 가방의 파편.
일부러 허름하게 보이게 만들어서, 탐욕을 부리는 사람이 다가오지 않도록 꾸민 가방의 파편이 떨어져 있었다.
소녀에게 허름한 가방인 척하고 싸게 팔아넘긴 배낭의 찢긴 조각이었다.
‘여기서 늑대랑 조우를 한 것 같군.’
천장을 올려다보니, 남자가 준 지도에서 위험한 곳이라고 표시된 방이었다.
‘도대체 왜 이런 곳으로 온 거지, 지도를 잃어버린 건가?’
그래도 다행인 점은 소녀는 다치지 않은 것 같다는 점이었다.
그저 잔혹한 곤죽이 되어버린 늑대의 사체가 마음에 걸렸다.
제비 말고도 아주 위험한 새로운 몬스터가 추가된 것 같았다.
남자는 가방의 파편을 주워서 주머니에 넣고, 지도를 꺼내서 확인했다.
‘모든 방을 확인했는데도… 없군.’
남은 곳은 단 한 군데, 보스 방뿐이었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개고기 아저씨는 어두운 표정으로 천천히 보스 방의 문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보스 방을 열어젖히자, 예상외의 풍경이 남자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평범한 미궁 석실처럼 보이는 풍경.
거기다가 마치 보스 방을 클리어했다는 것처럼 미궁 2층으로 내려가는 계단까지 드러난 상태였다.
설마 이런 식으로 속이는 보스인가 싶어서 남자는 주의를 세심하게 살피며 보스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보스 방의 중앙에 일그러진 얼굴을 한 인형이 하나 놓여있었다.
‘나를 속였구나!’라고 외치는 것처럼 원통함이 가득 묻어나는 인형이었다.
“설마, 이게 보스인 건가?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거지?”
남자는 자신이 생각을 중얼거리는 것도 못 느낄 만큼 굉장히 놀란 상태였다.
미궁의 보스는 아무리 해치워도 계속 재생될 텐데,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난 거지?
미궁의 녹색 횃불에다가, 영구히 죽어버린 보스.
미궁의 상식이 붕괴하고 있었다.
***
미궁 1층을 양심적이고 성공적으로 끝마친 나는 미궁 2층으로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미궁의 계단을 한층 한층 밟을 때마다, 공간이 어그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계단을 모두 내려오는 순간, 미궁 입구에서처럼 전혀 다른 공간으로 옮겨져 있었다.
투구의 틈으로 밀려 들어오는 엄청난 한기.
그리고 하늘로 솟구치는 눈송이들.
굉장히 가혹하고 신기한 환경이었지만, 나는 그런 것에 신경 쓸 틈이 없었다.
‘!!!!’
아주 먼 곳에서 어떤 미니 사신이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제대로 언어로 뭉치지 못한 의지를 토해내는 것이 느껴졌다.
‘엄마!’
검은 사신들도 굉장히 당혹스러웠는지, 빨리 구하러 가자고 아우성치고 있었다.
투구 속에 작은 손을 잔뜩 만들어 내서 내 얼굴을 때찌때지 할 정도였다.
‘그만!’
나는 그만하라고 의지를 뿜어낸 뒤, 혼란에 빠진 미니 사신 쪽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눈이 오르는 평원을 뛰어가면 갈수록, 멀리서 들리는 비명이 선명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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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에엑!
끔찍한 고통을 토해내는 비명이었다.
그렇게 서둘러 도착한 곳에서 발견한 것은 몸속에 인간을 품은 채, 거미들을 고문하고 있는 거대 검은 사신이었다.
길쭉한 팔과 날카로운 이빨.
거칠게 찢어서 뚫은 것 같은 눈.
녹아내린 것처럼 뿌리내린 다리.
그리고 하얗게 타오르고 있는 장작.
불변구 속의 시체를 조그맣게 만든 것처럼 생긴 검은 사신이 오브젝트로부터 고통을 갈취하고 있었다.
오브젝트에게서 감정을 먹을 수 있다니!
나도 못 하는 일을 해내는 검은 사신이었다.
하지만 별로 부럽지는 않았다.
그야 흘러 들어가는 감정의 모양새만 봐도 끔찍한 맛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척 보기에도 부정적인 감정의 몇백 배, 긍정적인 감정의 몇천 배는 맛없어 보였다.
어찌나 맛이 없으면, 제대로 말도 못 할 정도로 정신을 놓아버리다니.
얼마나 몸에 안 좋은지, 오브젝트의 감정을 먹은 검은 사신의 몸이 잔뜩 부풀어 올랐다.
분명히 오브젝트-미니 사신 염증 반응일 거야.
‘그거 지지야. 먹지 마!’
내가 그렇게 의지를 뿜어내자, 검은 사신은 고개를 돌려서 나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혼란스러워 보이는 검은 사신은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커다란 팔을 뻗어서 공격해 오기 시작했다.
으악, 패륜아다!
***
패륜 사신과 갑옷 사신의 전투는 생각보다 치열했다.
커다란 손으로 후려치는 것을 유려한 동작으로 피하는 갑옷 사신.
갑옷 사신의 쌍검을 남은 손으로 막아내는 패륜 사신.
둘 다 공격력에 비해서 방어력이 너무 강해서 유효타를 입히질 못했다.
그리고 나는 전투를 구경하며 굉장히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저 패륜 사신을 어떻게 해야 하지?
공간 절단으로 찢어버리면 찢어지기야 하겠지만, 아이들에게 그런 흉악한 걸 쓰기는 좀 그랬다.
내가 가진 능력 중에서, 대충 사랑의 매로 쓸만한 수단이 없었다.
역시 공간 장악 말고는 답이 없네.
‘퍼지!’
내가 의지를 뿜어내자, 검은 사신 갑옷이 마치 메카물의 한 장면처럼 사방으로 사출되었다.
그렇게 검은 사신 갑옷을 벗어 던지며 바닥 위에 내려서자, 패륜 사신은 커다란 주먹으로 나를 내려찍으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 순간 양손으로 공간을 움켜쥐고 고정해 버렸다.
마구 날뛰던 패륜 사신은 그 순간,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고정되어 버렸다.
공간 능력이 없는 검은 사신은 벗어나기 힘들겠지.
나는 천천히 공간을 비틀어서 검은 사신의 머리를 천천히 내 눈높이로 낮췄다.
그리고 검은 사신을 향해 의지를 밀어 넣었다.
‘I am your mother!’
‘내가 네 엄마다!’라고 의지를 뿜어내며 긍정적인 감정으로 가득 찬 장작을 마구 밀어 넣기 시작했다.
‘!’
“삐이이이이-!”
그러자 패륜 사신은 내가 누군지 깨닫고 굉장히 놀란 것 같은 의지와 소리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이럴 수가!’ 혹은 ‘안 돼!’ 같은 감정을 마구 뿜어내던 패륜 사신은 온몸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하얀색 장작이 점점 밀려 나오고, 커다란 패륜 사신의 몸이 깨질 것처럼 갈라지며 흔들렸다.
그리고 하얀색 불꽃과 함께 패륜 사신이 폭발해 버렸다.
물리력을 가지지 못한 하얀색 장작의 폭발은 눈처럼 흩어져서, 떨어져 내리며 천천히 지면을 파고들고 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폭발의 중심부.
하얀 장작이 눈처럼 내리는 폭심지에는 정신을 잃은 소녀와 검은 사신이 서로를 꼭 끌어안고 쓰러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