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16
루카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내가 익히 기억하는 곳 중 하나였다.
루카의 집무실.
온갖 서적과 종이가 정신없이 나뒹구르고 있어 정신없다는 인상을 주는 이 방은 내가 알던 것과 별 다른 점이 없었다.
안을 둘러보는 내 시선에 머쓱한 웃음을 지은 루카는 어디선가 의자를 끌고 와선 그 곳에 앉더니 내게는 집무실 의자에 앉기를 권유했다.
“영애를 이런 의자에 앉힐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럴 거면 애초에 정리를 끝나고 부르면 되지 않았을까?
저기 멀쩡하게 있는 쇼파를 서류 보관대를 쓸 게 아니라 저기에 날 앉혔어야지.
그리고 말야. 네가 나를 여기까지 끌고 왔으면 차라도 하나 타줘야 하는 거 아닐까?
네가 차는 타는 맛없기로 유명해서 흥미가 있단 말이야. 대체 얼마나 심각하기에 조이조차 표정관리를 못하나 싶어서.
여러 가지 불만을 담아 루카를 가만 바라봤지만 녀석은 왜 앉지 않으냐는 듯 날 멀뚱히 바라볼 뿐이었다.
허술한 부분도 게임하고 똑같구나.
그런 것들을 확인하고 있자니 안심이 됐다.
정신 나간 미친놈이라 할지라도 게임하고 똑같은 편이 낫다. 그래야 상대의 사고와 행동을 예측할 수 있다면 위험을 대비할 수 있으니까.
1왕자를 봐. 나 도저히 걔가 무슨 생각을 하고 움직이는 지 예상을 못 하겠어.
분명 여러모로 변하긴 한 거 같은데 그게 어떤 방향인지 모르겠다고! 진짜 빡치는 건 어떤 방향이던 간에 날 좋아하진 않을 것 같다는 거지.
가만 서서 루카를 바라본다 한들 달라지는 게 없을 것 같았기에 집무실 의자에 앉았더니 그제서야 루카가 입을 열었다.
“영애께서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재능 있는 사람을 좋아한답니다. 선생으로 일하는 게 서투를 적에는 편애가 심다하는 주의를 자주 들을 정도였죠.”
잘 알고 있다.
루카는 스스로를 인재라는 보석을 세공하는 사람이라고 믿는다.
게임이 시작되기도 전 멀고도 먼 과거.
자신의 앞에서 찬란하게 빛나던 보석을 본 순간.
그리고 자신이 그 보석처럼 빛날 수 없음을 깨달은 순간.
루카는 세공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스스로 보석이 될 수 없다면 그 무엇보다 찬란하게 빛나는 보석을 만들겠노라 마음먹었다.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사실입니다만 보석은 세공하기 전부터 그 값어치가 결정되어 있습니다. 원석이 아름다우면 보석도 아름답고 원석이 못나면 보석도 못나지요.’
루카와 관련된 퀘스트를 진행하다 보면 이런 대사를 들을 수 있다.
이것이 그의 신념이다.
그래서 루카는 재능 있는 자를 사랑했다. 역사에 남을 보석을 남기기 위해서는 인재가 필요하다고 믿었으니까.
“그리고 영애께서는 제가 본 그 어떤 사람보다 빛나는 재능을 지니고 계십니다.”
루카가 말한다.
자기가 당신이라는 원석을 세공해 주겠다고.
당신을 그 누구보다 빛나는 보석으로 만들어주겠다고.
가문은 물론이고 왕국, 아니 대륙의 역사에 이름을 새길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제가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당신의 재능이 완성될 수 있도록.”
가죽으로 된 의자에 앉아 루카의 얼굴을 살핀다.
나는 카리아처럼 상대방을 살피는 것만으로 생각과 감정을 읽어내진 못한다.
그렇지만 루카의 생각은 알 수 있다.
왜냐고? 내 귀에 흘러들어오는 대사를 기억하고 있으니까.
이 인간이 어떤 상황에서 이 대사를 입에 담는지 아니까.
지금 루카는 나를 갈망하고 있다.
내가 지닌 재능을 믿고, 진정 내가 그 누구보다 빛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자신의 소원을 이루어 줄 수 있을 거라 여기고 있다.
우리 두 사람의 관계는 우리가 앉아있는 위치와 같다.
앉은키는 내가 훨씬 더 작았지만 나는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그는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를 확신한 순간 나는 이 상황이 내가 바라는 대로 흘러가고 있음을 느꼈다.
이게 게임이었을 적에는 그저 루카가 끈질기게 부탁하는 것으로 끝이었다.
역으로 루카에게 무언가를 제안한다거나 할 수는 없었지.
허나 지금은 아니다.
여기는 현실이니까.
불가능한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틀렸어요. 루카 교수.’
“페도 교수. 칙칙하고 냄새나는 방에 나처럼 귀여운 여자애가 들어와서 기쁜 건 알겠지만 그래도 생각은 해야지.”
등받이에 등을 기대면서 턱을 괸다.
‘당신이 절 돕는 게 아니에요.’
“멍청한 잔챙이인 너 따위가 날 돕겠다고? 푸하핫. 주제를 모르는 것도 정도가 있지.”
“예?”
‘제가 도움을 허락하는 거에요.’
“멍청한 변태도 알아들을 수 있게 이야기 해줄 게. 네가 날 돕는 게 아냐. 내가 너한테 돕는 걸 허락하는 거야.”
나에게 도움이 될만한 것을 가져와라. 그럼 가르치는 것을 허락하겠다.
오만하고 거만한 이야기였지만 이 이야기를 들은 루카는 화를 내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나를 바라볼 뿐.
믿음직스러운 표정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조차 잊고서. 황망한 눈으로. 몸을 앞으로 기울인 채. 내 얼굴을 노려봤다.
정신이 나간 듯한 모습에 살짝 압도된 나였지만 메스가키 스킬은 당혹을 허락하지 않았다.
겉으로 드러난 나의 감정은 공포가 아닌 비웃음이었다.
그를 본 루카가 나를 따라서 웃음을 지었다. 항상 짓고 다니는 친근한 웃음이 아니라 광기가 묻어난 진득한 웃음을 말이다.
“과연. 그렇군요. 이해했습니다. 알른 영애.”
그리 말을 한 루카는 자신의 얼굴을 쓸어 내렸다.
손바닥에 가려진 얼굴이 다시금 드러났을 때 루카의 얼굴은 너무나도 평온했다. 방금 전의 광기가 신기루였다는 것처럼.
“조금 있으면 교실로 교수님들이 향할 시간이군요. 일단 돌아가시고 방과 후에 다시 와주십시오.”
*
내 계획은 이러했다.
루카가 루시 알른이라는 사람을 자신의 소원을 이루어 줄 보석이라 생각하고 있다면 결코 놓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부여잡으려 할 것이다. 그는 자신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필사적인 인간이니까.
그렇다면 그 감정을 이용한다. 갑의 위치에 서서 받을 시련을 선택하겠다. 최대한 안정적이고 효율적으로 강해질 수 있는 법을 찾겠다.
그를 통해 나를 억까하려는 허접 주신에게 엿을 먹이겠다.
이런 나의 계획은 지금까지는 나름대로 잘 풀리고 있는 것 같았다.
루카 교수의 광기 어린 눈빛이, 웃음이 그를 증빙했다. 이대로만 간다면 내가 바라던 대로 갈 수 있겠지.
그리 생각을 하면서 썰어 놓은 스테이크를 포크로 집어 들던 그 순간 누군가가 책상을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누구야? 이 교양 없는 인간은?
내 고요하고 즐거운 식사시간을 망치지 말라고.
“루시 알른.”
불만을 담아서 고개를 든 나는 한 쪽 눈썹을 내린 채 서 있는 아서의 모습을 발견했다.
찾아오려면 조금 더 빨리 찾아오지. 왜 밥 먹는데 방해를 하고 난리인거냐. 오랜만에 먹는 아카데미의 식사라서 기대하고 있었단 말이야.
‘뭔가요? 왕자님.’
“뭔가요. 불쌍 왕자님. 꼿꼿이 허리를 피고 작은 키를 자랑하시는 건가요? 귀엽다고 칭찬해 드릴까요?”
남자치고는 작은 키를 지적당한 아서는 얼굴을 벌겋게 물들인 채 무어라 소리치려다 고함 대신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허락도 구하지 않고 내 앞에 앉았다.
“루카 교수가 말을 걸었다고 들었다.”
‘네. 맞아요.’
“그걸 어떻게 아시는 거죠? 음침 외톨이 왕자님을 따라 스토커가 되려는 건가요?”
“…어쩌다 보니 듣게 된 거다.”
그게 벌써 소문으로 퍼진 거야?
이야. 역시 루시다. 안 좋은 쪽으로 워낙 유명하다 보니까 이야기도 빨리 나도는구나.
“어쨌든 축하하마. 그 자가 손을 내민 사람은 대부분 대성한다더군.”
그야 그렇지. 대성하지 못하면 뒤지니까.
루카는 평균 회귀를 부르짖는 RPG게임의 유저다. 성공할 확률이 높던 낮던 간에 일단 강화버튼을 누르고 보지.
그 물건이 될 물건이라면 강화에 성공할 거라 생각하니까.
실패한다면? 그건 애초부터 안 될 녀석이었던 거다.
루카는 불운에 짜증을 내곤 다른 장비를 찾으러 가겠지.
이게 루카의 제안을 거절하려고 생각했던 이유이고, 그에게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이유다.
나 자신이 강화기 속 장비가 된다고 생각하니까 섬뜩하더라고.
“겉치례는 이쯤 하면 됐고. 그대의 식사를 방해한 이유는 물어볼 게 있어서다.”
아서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자신의 품 안에서 종이를 꺼내 내 앞에 내밀었다.
“그대가 말하지 않았나. 2학기가 시작되면 무슨 수업을 들어야 하는 지 물어보라고.”
아아. 뭔가 했더니 들을 수업을 골라달라는 거였구나.
이건 시급한 일이 맞네. 접시를 옆으로 치운 나는 아서가 내민 종이를 받아든 채 머리를 굴렸다.
어디 보자. 아서는 마검사니까. 이거 들어야 하고. 이것도 들어야 하고. 그리고 이것도.
“…흠?”
아니 한 학기에 들을 수 있는 시간에 왜 제한이 있는 거지? 이래서야 몇 개를 포기해야 하잖아!
으으. 일단은 검술 쪽을 우선시하자. 검술과 함께 육체를 단련하면 체력이 오르니까. 이 편이 효율적이지.
“…루시 알른?”
이거랑 이건 빼고. 이건…
하아. 이걸 빼야 해? 진짜?
이거 꼭 들어야 하는데? 그렇지만 이걸 안 빼면 제한에 맞출 수 없어.
어떡하지? 어떡하면 좋지?
아. 그래. 혹시 왕자 권한으로 제한을 무시할 수 있는 지 물어볼까?
아무리 계승권하고 멀다지만 그래도 왕자잖아. 지위로 찍어 누르면 어떻게 될지도 몰라.
그를 묻기 위해 고개를 든 나는 질린 얼굴의 아서를 마주할 수 있었다.
“그대는 내가 수업 도중에 과로로 죽기를 바라는가.”
에이. 과장이 심하네.
사람은 이 정도로 안 죽어.
알른 가문 기사단에서 훈련하면서 느낀 건데 판타지 세상의 인간은 엄청나게 튼튼하더라고.
그래. 기분이다! 하나 더 빼줄게.
어때. 이 정도면 괜찮지?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날 암살하려 들다니. 내가 뭘 그리 잘못했는가. 말로 하게. 제발.”
그러니까 안 죽는대도 그러네.
안 돼.
안 바꿔줘.
돌아가.
“지옥에서 원망하겠다. 루시 알르으으은!”
네가 선택한 도움이다.
악으로 깡으로 버텨라. 아서!
*
2학기의 첫날을 끝마치고 수업 신청까지 끝마친 나는 약속한 대로 루카 교수의 교무실을 찾았다.
‘루카 교수님?’
“페도 교수?”
허나 그 곳에 루카는 존재하지 않았다.
제발 물건 좀 훔쳐가라고 이야기하는 듯 활짝 열린 문과 텅빈 교무실이 있을 뿐.
그 광경을 본 나는 묘한 기시감 속에서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루카 교수와 연관된 루트에 존재하는 퀘스트 중 하나를. 그리고 내가 기다리고 있었던 퀘스트를 말이다.
이렇게 빨리 결단을 내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잘 됐네. 루카 교수가 확실히 날 고평가하고 있구나.
<여아야. 안에 들어가선 안 된다. 저 안에 무언가 이상한 것이.>
‘알아요. 할아버지.’
저 안에 무엇이 준비되어 있는지. 그를 이용해 루카 교수가 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모두 다 알고 있다.
난 소울 아카데미의 썩은물이니까.
아아. 루카 교수. 게임하고 완벽하게 똑같은 사람이라서 너무 고마워!
너까지 무언가 변수를 지니고 있었다면 정말 머리가 아팠을 거야!
할배의 제지를 무시하고 앞으로 방 안으로 들어선 순간 건드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방문이 닫히더니 내 발치 아래에서 마법진이 빛났다.
저는 내게 익숙한 것이었다. 쪼잔 악신이 나를 골릴 때 워낙에 자주 사용했던 것인지라.
순간이동의 진.
자아.
루카 교수에게 이 썩은물이 지닌 가치를 알려줄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