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는 꿈을 꾸고 있었다.
사실 꿈이 아닐 것 같기도 했다.
흐릿한 시야 속에서 ‘흑색 검’은 소녀를 지키기 위한 분투를 이어가고 있었다.
사방에서 몰아치는 거미들.
그리고 자기 몸을 사방으로 늘려가며 거미들을 요격하는 흑색 검.
거미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흑색 검’은 소녀를 지키느라, 거미들을 제거하기가 힘들어졌다.
그러자 더욱더 거미들이 늘어나는 속도가 빨라지는 악순환이 가속되기 시작했다.
도저히 거미들을 막아낼 수 없는 순간이 오자, 흑색 검이 소녀를 빤히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
마치 간식을 몰래 먹으려는 강아지가 주인의 눈치를 살피는 느낌이었다.
소녀를 한참 바라보던 흑색 검은 순식간에 모습을 바꿨다.
소녀의 손바닥보다 조금 큰 정도의 노란 색으로 눈을 빛내는 귀여운 요정.
날개는 없지만, 소녀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그 순간 소녀의 뇌리에는 어떤 장면이 떠올랐다.
예전에 화분으로 떨어졌던, 정체불명의 검은 오브젝트.
그 오브젝트도 귀여운 소리로 울었었지.
삐-, 하는 소리로.
그때부터 계속 나를 쫓아오고 있었던 거구나.
그리고 꿈은 순식간에 끝나버렸다.
소녀를 지키기 위해 요정에서 괴물이 되어버린 흑색 검.
그리고 그 흑색 검이 더욱 거대한 회색 괴물에게 잡아먹히는 것으로 꿈은 끝나버렸다.
***
눈이 내리는.
아니, 눈이 하늘로 올라갈 정도로 추운 날씨에 쓰러진 소녀와 패륜 사신은 추운 것처럼 서로 서로의 체온을 나누는 것처럼 꼭 껴안고 있었다.
패륜 사신을 어떻게 괴롭혀야 잘 괴롭혔다고 소문이 날까?
매우 매우 중대한 고민을 하며 살펴보았더니, 소녀 쪽의 상태가 심상치 않아 보였다.
소녀는 반쯤은 오브젝트로 보여서 튼튼할 줄 알았는데, 몸에서 열이 엄청나게 나고 있었다.
우선 사람이 죽어가니까, 치료부터 해야겠지.
치료를 위해서 푸른 사신을 불러내려고 했지만, 미궁 속이라 그런지 무언가 막힌 것처럼 강력한 저항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강제로 공간을 찢어버리고, 미니 사신 정원과 통하는 게이트를 억지로 만들어 냈다.
미니 사신 정원과 미궁이 연결되자, 수줍은 표정의 푸른 사신이 튀어나오고 그 뒤를 이어서 황금 사신들도 해맑은 표정으로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아픈 곳, 모두 나아주세요.>
푸른 사신은 아픈 소녀를 보고 깜짝 놀라서, 치유를 염원하는 문자열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소녀의 호흡이 안정되는 것을 확인하자, 푸른 사신은 미궁이 마음에 안 드는지 순식간에 정원으로 돌아가 버렸다.
열린 게이트를 통해서 우르르 튀어나온 황금 사신들은 양손을 번쩍 들고 나를 향해 의지를 뿜어내며 달려들었다.
‘엄마다!’
황금 사신들은 나랑 얼마 헤어지지도 않았는데, 굉장히 반가운 표정으로 내 몸에 잔뜩 달라붙었다.
‘그래, 그래 엄마야.’
나는 황금 사신들을 하나하나 쓰다듬어 준 뒤, 미니 사신 정원으로 집어 던졌다.
‘!’
황금 사신들은 배신당한 표정으로 날아가서, 미니 사신 정원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엄마는 모험을 계속 해야 하니, 어쩔 수 없단다.
나는 황금 사신이 이해해 주길 바라면서, 미니 사신 정원을 닫아버렸다.
‘엄마!’
점점 쪼그라드는 게이트를 향해 황금 사신들이 절박한 표정으로 마구 뛰어왔지만, 빠른 속도로 닫히는 게이트를 넘어오지는 못했다.
자, 이제 소녀도 치료했으니, 패륜 사신을 괴롭힐 시간이군.
나는 소녀의 품에 안긴 패륜 사신을 천천히 빼낸 뒤, 볼을 짜부라지도록 마구 문질러서 검은 사신의 잠을 깨웠다.
상당히 피곤했는지 잠에서 잘 깨어나지 않고 있던 패륜 사신이었지만 내가 계속 볼을 문질러주니 멍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며 잠에서 깨어났다.
아직도 하얀 장작이 몸에 남았는지, 패륜 사신의 눈동자는 오드아이가 돼서 빛나고 있었다.
한쪽은 하얀색, 한쪽은 노란색.
다른 색 장작을 골고루 먹으면 이런 식으로 변하기도 하네.
조금 특색이 있어 보여서 신기했다.
‘엄마다….’
내 얼굴을 본 패륜 사신은 안심한 것 같은 얼굴로 헤헤 웃었다.
패륜을 저질러 놓고, 웃어서 넘기려는 계략인 건가?
나는 그런 감성팔이에 속아 넘어가지 않고, 입을 크게 벌려서 패륜 사신을 물어버렸다.
냠냠, 마치 먹어버릴 것처럼 우물우물.
그러자 패륜 사신은 깜짝 놀라서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약한 엄마가 강한 엄마처럼 우리들을 잡아먹는다는 둥, 마구 발버둥 치던 패륜 사신은 이내 포기한 것처럼 축 늘어져서 움직임을 멈췄다.
‘바이바이. 엄마.’
갑자기 너무 슬픈 분위기를 뿜어내길래, 입 속에서 꺼내보니 패륜 사신은 눈을 꼭 감고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통통.
나는 눈을 감은 패륜 사신의 머리통을 두들기며 서운한 감정을 뿜어냈다.
괴롭힐지는 몰라도, 다치게는 안 하는데….
아니지, 다친 적이 있긴 했었네.
아무튼! 내가 의도해서 다치게 한 적은 없었는데, 미니 사신들은 나에 대한 믿음이 너무 부족했다.
내가 머리를 톡톡 두들기고 있었더니, 패륜 사신이 하얗고 노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의지를 전달해 왔다.
‘엄마, 안 먹어?’
‘안 먹어!’
내 대답에 패륜 사신은 행복한 것처럼 히히 웃었다.
도대체 불변구 안에 누워있는 커다란 놈은 미니 사신들에게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지?
패륜 사신을 괴롭히는 건, 이쯤으로 해둬야겠다.
이상하게 검은 사신은 괴롭히면 꼭 피폐물 같은 분위기가 돼버린단 말이야.
내가 패륜 사신을 놓아주자, 다른 검은 사신들도 패륜 사신에게 우르르 몰려들어서 같이 놀기 시작했다.
‘아프지 않아?’
‘괜찮아!’
검은 사신들은 하얗게 빛나는 눈을 보면서 걱정스러운 의지를 주고받았다.
“으음.”
미니 사신들이 꽁냥거리는 것을 보고 있었더니, 어느새 쓰러졌던 소녀가 정신을 차리려는 것이 느껴졌다.
‘검은 사신 갑옷!’
나는 황급히 양팔을 벌리고 서서, 검은 사신들을 호출했다.
그러자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검은 사신들이 갑옷의 부품으로 변해서 몸에 달라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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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륜 사신은 깨어나기 시작한 소녀를 행복한 표정으로 바라보더니, 소녀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꿈틀꿈틀 그 모양을 바꿔서, 검은색으로 이루어진 검이 되어버렸다.
황금 사신처럼 정신 오염도 없이 애착 인간이랑 붙어 다닐 수 있던 게 조금 신기했는데, 무기로 변신해서 붙어있었던 거구나.
“흐아암.”
소녀는 상반신을 일으키며, 굉장히 푹 잔 것 같은 표정으로 일어났다.
***
소녀가 눈을 뜨자마자 본 것은 두 가지였다.
품 안에 안겨있는 흑색 검.
그리고 전신을 검은색 갑옷으로 가린 정체불명의 존재.
소녀는 비몽사몽이었던 때라서 정확하지는 않아도 꽤 많은 것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흑색 검의 분투와 폭주, 그리고 검은 갑옷의 등장과 폭주의 해결.
소녀는 정확히 보지는 못했어도, 저 검은 갑옷이 자신과 흑색 검을 도와줬다는 것은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투구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노란 빛을 보는 순간, 소녀는 잔뜩 긴장해서 검은 갑옷과 거리를 벌렸다.
미궁에서 만났던 몬스터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력한 오브젝트인 것이 물씬 느껴졌다.
이성적으로는 ‘구해줘서 고맙습니다.’라고 해야 하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검은 갑옷에서 풍기는 분위기가 너무 강렬해서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고 있었다.
검은 갑옷은 뭔가를 기대하는 것처럼 소녀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소녀가 계속해서 두려워하자, 기대를 내려놓은 것처럼 시선을 내리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그 모습을 본 소녀는 왠지 검은 갑옷의 오브젝트가 뭔가 실망해서 시무룩해진 것처럼 느껴졌다.
인사해야 하는데!
소녀는 이를 악물고 감사를 건네려고 했지만, 도무지 입이 열리지 않았다.
꼬르륵.
소녀가 너무 긴장한 탓일까, 입이 열리기는커녕, 배에서 소리가 울렸다.
소녀가 배를 움켜쥐고 멋쩍은 미소를 짓자, 검은 갑옷은 조그마한 주먹을 꾹 쥐었다가 펼쳤다.
펑!
그러자 텅 빈 손아귀 안에 맛있어 보이는 커다란 푸딩이 생겨나 있었다.
꼬르르륵.
‘푸딩이라니! 정말 맛있어 보여.’
미궁 도시는 먹을거리가 모자라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디저트가 부족했다.
소녀는 미궁에 들어와서 간식거리를 먹은 적이 거의 없었을 정도였으니까.
먹고 싶다, 하지만 무서워.
그렇게 계속 이어지던 공포와 식욕의 승부는 결국 식욕의 승리로 끝났다.
그렇게 검은 갑옷이 넘겨준 푸딩을 정신없이 먹다 보니, 어느새 주변의 풍경이 변해있었다.
수많은 과자와 쿠키들.
하얗고 둥글고 커다란 무언가를 태우는 캠프파이어.
투명한 사탕으로 만든 플라밍고 횃불.
둥근 마시멜로가 둥실둥실 떠다니는 핫초코가 가득 담긴 쿠키 그릇.
싸늘한 미궁 2층에 온기가 감돌고, 달콤한 향기가 주변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와!”
소녀는 갑자기 나타난 신기한 것들을 바라보며 감탄하고, 맛있어 보이는 간식들을 마구 먹기 시작했다.
***
잔뜩 음식을 먹고 나니, 소녀는 더는 검은 갑옷이 무섭지 않았다.
투구 안에서 노랗게 타오르는 안광에서 오브젝트답지 않은 지성이 느껴졌다.
그리고 투구 속 안광의 노란색과 ‘흑색 검’의 노란색이 무언가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저랑 이 아이를 구해주신 분이죠? 고맙습니다!”
두려움을 떨쳐낸 소녀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고개를 꾸벅 숙이고 감사를 표했다.
회색 사신은 일본어를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감사를 표하는 감정을 읽어 들이고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는 그렇게 한참 동안 검은 갑옷에게 감사를 표하고는, 흑색 검을 손에 들고 조곤조곤 말을 걸기 시작했다.
“지금 이게 본 모습이 아니지?”
이미 모든 것을 알아낸 것 같은 감정을 뿜어내는 소녀.
그 모습을 본 흑색 검은 흐물흐물 녹아내리더니, 검은 사신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리고 공포에 빠진 작은 강아지처럼 두려워하며 오들오들 떨기 시작했다.
마치 버림받을 것을 두려워하는 것만 같았다.
그 모습을 본 소녀는 검은 사신을 꼭 껴안더니 말했다.
“나를 지켜줘서 고마워!”
그리고 귀여운 생물을 보는 것처럼 검은 사신을 마구마구 쓰다듬기 시작했다.
마구마구 쓰다듬어지는 검은 사신은 그간의 고생을 모두 보답받았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칭찬과 쓰다듬기 세례가 끝나자, 소녀는 검은 사신을 다시 검으로 만든 뒤,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저는 출구를 찾기 위해서 미궁 탐사를 갈 건데, 같이 가실래요?”
지도도 없고 경험도 없었지만, 소녀는 미궁을 돌아다닐 의지를 다지며 물었다.
***
소녀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뭔가를 말하고 있었다.
일본어라서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여러 가지 감정이 느껴져서 대충 분위기는 알 수 있었다.
각오와 용기.
권유와 희망.
내 희망 회로일 수도 있겠지만, 미궁을 같이 ‘모험’하자는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나도 드디어 모험 파티가 생겼어!
미궁 모험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소녀와 나는 미궁 2층의 탐사를 시작했다.
투방투방.
갑옷이 바닥을 경쾌하게 울리는 소리를 들으며 걸어 나갔다.
‘으으, 불편해.’
아무리 갑옷을 입고 있어도 불편한 느낌이 가시지 않았다.
미궁 탐험만 아니었다면 절대로 입지 않았을 것이다.
옷을 입지 않았을 때는 360도 시야를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은 투구에 뚫린 구멍으로만 시야가 열려 있어서 답답했다.
오브젝트 특유의 감각으로 사방을 정밀하게 감지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불가능했다.
더듬이만이라도 투구 밖으로 빼면 나아질 텐데, 이상해 보이겠지….
그래도 미궁 탐험이라고 생각하니, 투구 속의 얼굴이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게다가 동료가 있으니 두 배는 즐거웠다.
사람들을 좀 더 구해서 4인 파티를 채우면 4배로 즐겁겠지?
히히.
이런저런 잡다한 생각을 하며 미궁 2층을 걷다 보니, 안개가 자욱하게 깔리기 시작했다.
내가 안개가 조금 수상하다는 것을 느꼈을 때는 이미 주변에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안 돼! 내 첫 동료가 없어졌어!’
투방투방투방투방.
나는 안개 속을 빠른 속도로 걸어 다니며 소녀를 찾아다녔다.
“꺄아아아악!”
그러던 중, 소녀의 비명이 두꺼운 안개를 뚫고 들려왔다.
비명이 들린 곳으로 찾아가니, 기이한 장면이 나를 반겨주고 있었다.
검은 사신 소드를 든 채, 무릎을 꿇고 펑펑 울고 있는 소녀.
소녀를 지키는 듯한 모습으로 커다란 칼날에 복부를 관통당한 채, 피를 흘리고 있는 중년 남자.
목이 잘린 채, 바닥에 널브러진 검은 사신.
“아저씨! 아저씨!”
소녀는 피를 흘리는 남자를 보면서 계속 해서 소리치고 있었다.
그리고 검은 사신의 잘린 목에서는 노랗게 타오르는 불꽃이 핏물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뭔가 이상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