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17
학생을 가챠 티켓 취급하는 것이 루카라는 캐릭터라는 건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지겹도록 설명했으니까.
하지만 아직까지 말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 유저들에게 루카 교수가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가에 대해서.
놀랍게도 유저들의 취급은 루카가 학생을 대하는 태도와 비슷했다.
가챠.
관련되는 순간부터 리스크가 밑도 끝도 없이 올라가지만 리턴도 높은 NPC.
고점 플레이를 하고 싶다면 한 번쯤 얼굴을 들이밀게 되는 녀석.
게시판에 욕이 올라온다면 그 지분의 4분의 1정도는 차지하는 캐릭.
그것이 루카라는 녀석의 정체성이었다.
루카는 유저에게 지속적으로 위기를 선사한다.
위험한 던전으로 집어던지던가. 청부업자에게 위협을 당하게 하던가. 불행한 사고를 선사하던가 하는 식으로 기습적인 인카운트를 만들어주지.
성장할 시간이 제한되어 있는 게임에서 인카운트가 늘어난다는 것은 성장 한계치가 높아진다는 것이니 유저의 입장에서는 반겨야 할 일이다.
문제는 물리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위기가 등장할 때가 있단 것이다.
예를 들자면.
그래. 연금술사가 나오던 그 던전.
나는 그 던전에 관한 모든 정보를 외우고 있었지만 그 던전을 공략할 수 없었다. 당시의 내가 공략할 수 있는 던전이 아니었으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최대한 뻐팅기며 살아남을 방법을 강구하는 것뿐이었지.
그마저도 실패해서 뒤질 뻔했고 허접 주신에게 목줄이 걸리는 것으로 간신히 목숨을 부지했고 말이다.
루카와 연관이 되는 순간부터 유저는 이런 일을 비일비재하게 겪어야 한다.
방금 전에 세이브를 했는데 루카가 준비한 억까를 마주했을 때. 그리고 그 이전 세이브 파일은 한참 전의 것일 때.
그 순간의 심정을 아는가?
난 알고 있다.
각 직업별 최고 고점 캐릭터를 만들겠다는 장대한 목표를 가졌을 때에 지겹도록 루카 교수의 얼굴을 마주했으니까.
루카 교수를 만나면 볼 수 있는 이벤트에 관한 공략을 올렸을 정도로 저 개자식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나다.
이 녀석의 행동 양상은 완벽히 암기하고 있다.
루카가 게임 속과 같은 인물이란 것에 감사한 것도 이러한 이유다.
루카가 게임 속과 완벽히 같은 인물이라면 그의 행동을 유도할 수 있을 테니까.
셀 수 없는 시도 끝에 선택지가 제한된 게임 속에서도 행동을 조절하는 데 성공했었는데, 바라는 대로 선택지를 고를 수 있는 현실이라면?
쉽지.
주변의 푸른빛이 사라지고 주변의 풍광이 모습을 드러낸다.
앙상하게 말라 이파리마저 걸치지 못한 나무.
말라서 쩍쩍 갈라진 대지.
바닥에 흩어져 있는 몇 안 되는 잎은 밟는 순간 먼지가 되어버릴 것 같았고, 죽음으로 가득한 숲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무겁고도 음울하다.
칼이 왔다면 분명 새된 비명을 지르다 얼굴을 붉힐 것 같은 장소.
죽어버린 숲.
쪼잔 악신이 개입할 수 있는 던전이 아니라 여러 위험이 도사리는 필드.
내가 던전에 관한 축복이 있다 생각하고 그를 사용할 수 없는 곳을 택할 거라고는 생각했는데 설마 여기일 줄이야.
운이 좋았네.
“약속시간을 잘 맞춰 주셨네요. 좀 더 기다려야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뒤편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갤 돌리니 루카 교수의 모습이 드러났다.
“침착한 체를 하시는 건가요? 아님 이런 상황을 예측해서 침착하신 건가요?”
‘놀란 척이라도 해드릴까요?’
“왜 페도 변태. 내가 지르는 비명소리가 듣고 싶어? 푸하핫. 그럼 그냥 고백이라도 하지. 진심을 담은 비명을 들려줬을 텐데.”
“…뭐 어느 쪽이든 좋습니다. 양 쪽 다 비범해 보이니까요.”
루카는 애써 내 목소리를 못 들은 체 하면서 말을 이었다.
“저는 스스로를 보석을 세공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빛나는 원석을 찾아내어 아름답게 가공하는 것이야말로 제 평생의 목적이자 숙원이죠. 오랫동안 이런 일을 해왔던지라 전 이 세공이라는 직업에 자부심을 지니고 있습니다.”
언젠가 들었던 대사.
얌전히 도움이나 바치라는 말을 했을 때부터 나올 것이라 예상했던 대사.
저 대사를 들은 나는 상황이 차곡차곡 맞춰지고 있단 생각에 웃어버렸다.
자. 루카. 넌 이제 보석은 얌전히 세공사의 손길을 따라야 한다고 말할 거야.
“보석은 말을 해선 안 됩니다. 얌전히 세공사의 손길을 따라야 하죠.”
푸하핫!
그래. 이래야지.
소울 아카데미의 썩은물인 내가 빙의를 한 거잖아.
무언가를 계획하면 이렇게 딱딱 맞아떨어지는 게 정상아냐? 왜 만날 내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일이 튀어나가는 지 원.
“세공사의 손에 이런저런 투정을 더하는 보석은 필요치 않습니다. 만. 그냥 폐기해 버리기에는 알른 영애. 당신이라는 보석의 빛이 너무도 밝군요. 그래서 시험을 해보기로 했습니다. 당신에게 스스로를 세공할 능력이 있는지를.”
거기까지 이야기를 끝마친 루카는 느릿하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약속드리죠. 당신이 이 곳에서 성과를 보인다면 저는 당신이 스스로를 세공하는 것을 허락하겠습니다.”
그가 뒷걸음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점차 그 형상이 흐려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완벽히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그렇게 나는 이 숲에 홀로 남겨졌다.
<그래서 이게 네가 계획한 일이라고?>
‘네.’
<신탁이냐?>
‘비슷하죠?’
평소에는 무턱대고 허접 주신의 핑계를 댔지만 이번엔 아니다.
어쨌든 루카 교수에게 시련을 받으라고 한 건 허접 주신이니까. 난 그저 주신이 하는 말을 성실히 수행했을 뿐이야.
<딱 봐도 제대로 설명해 줄 용의가 없어 보이는구나.>
‘딱히 그렇진 않은…’
<괜한 소리는 됐으니 내가 묻는 것에나 대답해라. 위험하더냐?>
‘아뇨. 전혀.’
확실하게 단언할 수 있다.
이번 일에서 그 어떤 변수가 생기더라도 난 죽지 않는다.
그걸 어떻게 확신하냐고? 귀한 장비를 강화하는데 아무런 준비 없이 내던져버릴 리가 없잖아.
루카가 대놓고 자신의 속을 드러냈다는 것은 그만큼 날 가지고 싶단 이야기다.
시험을 통과하건 통과하지 않건 날 이런 누추한 곳에서 죽게 내버려두지는 않으리라.
언젠가 강화를 위해 공을 들여 성대한 무대를 준비하고 그 곳에 날 내던지겠지.
대신 이 시련을 실패하는 순간 루카는 날 자기 입맛대로 다루기 위해, 그리고 내 입막음을 하기 위해 정신에다 무언가를 할 것이다.
게임에선 그랬다.
본심을 보이고 나면 입막음을 위해 무언가 마법을 사용하거든?
그걸 쓰고 나면 루카가 말하는 걸 거절할 수 없게 되더라고.
이걸 파훼하기 위해서는 정신계열 스킬 혹은 이를 잘 다루는 NPC에게 찾아갈 필요가 있는데 나한테는 얼빠 여우가 있다.
루카가 수작을 부리더라도 해결할 수 있단 거지.
<이를 통해 얻게 되는 것이 있느냐?>
‘네. 많죠.’
허접 주신이 내어준 퀘스트를 편하게 클리어할 수 있는 건 물론이고 내 성장에 가속을 더할 수 있을 테니까.
학생 신분으로는 들어가기 어려운 던전. 본래라면 이 시점에서 들어갈 수 없는 지역. 강자와의 다툼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전투 경험.
루카를 상대로 주도권을 잡는 데 성공한다면 이 모든 걸 내 입맛대로 고를 수 있다.
게임에서 무한한 리트 끝에 타협해야 했던 것을 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단 거다.
물론 중간중간 루카가 개입하면서 개짓거리를 하겠지만 허접 주신이 퀘스트를 내어준 이상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무얼 해야 하는지 아느냐?>
‘그것도 알죠.’
이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살아남는 것.
이 필드에서 다음 날 아침까지 버티는 것.
게임 속 루카가 유저를 이 곳에 내던질 때 요구하는 사안이 그거니까 이번에도 비슷하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자신이 있느냐?>
‘그걸 말이라고 해요?’
이미 상황은 내가 계획한대로 흘러가고 있다.
쪼잔 악신의 개입은 불가능.
사람들이 발길을 꺼리는 곳인지라 모험가의 변수는 없음.
거기에 필드마저도 나와 상성이 맞는 곳이다.
죽어버린 숲에 등장하는 주요 몬스터들은 악령. 악령에 홀린 몬스터. 그리고 언데드.
어느 쪽이건 신성에 취약한 놈들이지.
그리고 나는 고강한 신성을 품은 주신의 사도이자 성기사고.
‘전 여기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어요.’
이미 지금 내가 있는 위치가 어딘지는 확인을 끝마쳤다.
바란다면 자력으로 이 곳에서 탈출해서 소울 아카데미까지 돌아가는 것도 가능하다.
그런데 무얼 걱정하겠는가.
<그럼 됐다.>
할배는 그리 답을 하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이런 것을 계획할 때는 미리 이야기를 해달라며 투덜거렸다.
<네가 갑작스러운 위기를 겪는 것이 한 두 번이더냐? 심장이 덜컥거리는 기분이었다.>
‘할아버지 심장 없잖아요.’
<비유다! 대충 알아들어라!>
할배와 만담을 하고 있으려니 저 멀리서 불온한 기운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방학 내내 할배랑 신성이란 기운을 다루는 연습을 한 탓일까. 내 몸은 신성과 반대되는 죽음의 기운을 예민하게 감지했다.
<하아. 됐다. 실전에서 연습할 기회가 생겼다고 여기자꾸나. 여아야. 준비해라.>
‘넵.’
심호흡을 하며 심장에서부터 온몸으로 신성을 퍼트린다.
루엘류 신성 투술의 기초. 피를 따라 신성을 순환시키는 것으로 몸을 강화시키는 것.
난 아직 할배처럼 손끝 발끝까지 신성을 퍼트리며 그를 조절하지는 못하지만 그 흉내정도는 낼 수 있다.
신성에 의해 강화된 몸에 활력이 차오르는 게 느껴진다.
알른 가문에서 연습해봤던 대로야.
숨을 따라 내뱉어진 신성에 겁을 먹은 듯 뒤로 물러나는 불온한 기운을 본 나는 웃음을 지으며 싸울 준비를 했다.
인벤토리에서 방패를 꺼내고, 작게 만들어 목에 걸어 두었던 메이스를 떼어 내 손에 맞게 키운다.
마음 같아선 갑옷도 입고 싶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을 것 같네.
– 키에에에엑.
산 자가 지닌 생기를 바라는 것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과거 숲이 아름다움을 지녔을 적에는 꽃 사이에서 노니었을 이들. 허나 숲이 죽음으로 가득참에 따라 살아남기 위해 추악하게 변해버린 요정들.
밴시.
나는 웃음을 지으며 추악한 탐욕이 어린 시선의 개수를 셌다.
세 마리인가. 이 정도면 몸 풀기로 적당하네.
“으엑♡ 생긴 거 역겨워♡ 시체 냄새 나♡ 이딴 게 요정?♡ 요정여왕도 요정인 줄 모르고 퇴치해 버릴 것 같은데?♡”
몸에 차오르는 고양감과 함께 밴시 한 마리가 내게 달려들었다.
이 녀석들은 삶보다는 죽음에 가까운 이들. 실체가 없는 유령에 가까운 존재.
때문에 통상적인 공격으로는 피해를 입힐 수 없지만 그건 내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못한다.
신성이 담긴 메이스는 죽음을 품은 자를 지나치지 않으니까.
퍼억! 통쾌한 소리와 함께 밴시의 머리에 메이스가 적중함과 동시에 충격을 버티지 못한 그 몸이 흩어진다.
이건 좀 곤란하네.
너무 잡몹이잖아. 몸풀기 정도는 해줘야 할 거 아냐.
자신들의 동료가 처참히 박살난 것에 겁먹은 것일까. 밴시가 뒤로 물러서려 하지만 난 그를 허락하지 않았다.
“어디가는 거야 할망구들?♡ 쭈글거리는 주름이 부끄러워서 도망치는 거구나?♡ 푸핫♡ 미안해?♡ 너희같은 추녀보다 예뻐서?♡”
경험치 통 주제에 어디서 도망치려고!
얌전히 내 몸풀기 상대가 된 후에 뒤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