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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18

우는 소녀, 목이 잘린 검은 사신, 흑색 검, 갑자기 나타나서 죽어가는 남자.

나는 이 장면을 보는 순간, 환상이라는 것을 깨달아버렸다.

아마 ‘모험을 하고 싶어!’ 라고 생각하는 내 마음을 읽어서 만들어 낸 환상이 아닐까 싶었다.

자극적이고 재밌는 모험을 하는 게 목적이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스펙타클한 모험을 원한 건 아니었는데 말이지….

나는 정통파 모험물에서 고난과 역경을 뺀, 즐거운 과실만으로 이루어진 모험을 원한다고!

하지만 내 눈앞에 펼쳐진 환상은 실망스러웠다.

즐겁지 않은 장면이라는 것을 제외해도 그랬다.

미궁 입구에서 봤던 중년 남자가 갑자기 튀어나온 건, 그럴 수도 있다고 치자.

내 뒤를 따라와서 미궁에 들어왔을 수도 있으니까.

물리 면역급 튼튼함을 자랑하는 검은 사신의 목을 잘라버린 건, 그럴 수도 있다고 치자.

미궁에 공간 절단 트랩이나 공간 절단을 사용하는 몬스터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래도 흑색 검과 검은 사신이 동시에 있는 건, 너무 이상하잖아.

소녀의 손에 흑색 검이 쥐어져 있는데, 검은 사신이 하나 더?

왜 검은 사신이 두 마리야?

너무 이상하잖아!

내가 그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현재 보이는 광경이 조금씩 일그러져 보이기 시작했다.

현실감이 가득했던 풍경이 점점 얄팍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얄팍함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는 순간, 세계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세계가 무너져 내린 뒤 보이는 것은 짙은 안개, 그리고 내 앞에 서서 걱정스러운 말을 건네는 소녀의 모습이었다.

“괜찮아요?”

분명 나를 조금 꺼리는 것처럼 느껴졌던 소녀였지만, 지금은 내 양손을 꼭 쥐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소녀가 하는 일본어가 자연스럽게 이해가 되었다.

그 일본어를 듣는 순간 자연스럽게 깨달아 버렸다.

아, 아직도 환상 속이구나.

아직도 환상 속이라는 것을 깨닫고 황금 나무의 능력을 사용해서 환상 너머를 바라보자, 현재 상태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안개가 가득한 바닥 위, 검은 사신이 변신한 침대 위에 잠이 든 것처럼 쓰러져있는 소녀.

그 옆으로 얼음처럼 차가운 바닥에 누워서 처량하게 잠을 자고 있는 내 모습이 보였다.

왜 나는 침대 없어!

엄마에 대한 취급이 너무 박한 것 같아서 조금 섭섭했다.

게다가 내 갑옷을 이루고 있던 검은 사신들이 미니 사신 모습으로 돌아와서, 내 뺨을 때찌때찌하고 있었다.

검은 사신들은 ‘빨리 일어나!’라고 외치는 표정으로 뺨을 마구 때리고 있었다.

왠지 저 표정을 보니 별로 일어나고 싶지 않아졌다.

위급한 상황도 아닌 것 같으니까, 천천히 일어나도 괜찮겠지.

딱히 침대가 없어서 그런 건 절대로 아니다.

아무튼 아니었다.

황금 나무의 능력을 끝내고 고개를 들자, 소녀가 내 손을 잡아당기며 해맑게 웃었다.

“가죠. 가서 빨리 모험해요!”

이미 환상이라는 걸 알고 있는 나에게는 그 말이 정말 재미있는 모험을 준비했다는 소리로 들렸다.

히히.

***

참새가 지저귀는 소리.

따뜻한 침대의 온기.

맛있는 토스트의 식욕을 돋우는 향기.

언제나 소녀가 꿈꿔왔던 것들이었다.

소녀는 잠에서 서서히 깨어나고 있었지만, 이 행복한 온기와 꿈을 좀 더 붙잡아 두기 위해서 억지로 잠에 취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노력에도 불구하고 커튼을 뚫고 들어오는 햇빛에 소녀는 눈을 떠버리고 말았다.

“어라?”

눈을 뜨면 다시 추운 미궁 속으로 돌아가게 될 거로 생각했지만, 미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보이는 것은 언제나 꿈꿔왔던 광경.

집.

고개를 돌려서 달력을 보니, 미궁에 빨려들었던 다음날이었다.

“모두, 꿈이었구나….”

소녀는 왠지 복잡한 기분이 들어서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개고기 아저씨도, 라멘집 아줌마도, 소녀에게 친절했던 다른 모든 사람도 꿈이었다니.

뭐, 그게 당연하겠지.

그런 특급 오브젝트에 휩쓸리다니, 평범한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아.

소녀는 팔뚝으로 눈물을 닦아내고는 애써서 방긋 웃었다.

“어서 내려오렴!”

때마침 밑에서 엄마가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네!”

소녀는 아쉬운 마음을 애써 밀어두고 활기차게 대답했다.

평범하고 행복한 일상의 시작이었다.

***

소녀의 인도를 따라서 뚜방뚜방 계속 걸어 나가자, 점점 안개가 흐려지더니 생소한 풍경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이제까지와 달리 탁 트인 풍경이었다.

차가운 바람이 칼날처럼 불어오는 절벽, 그리고 그 밑으로 거친 파도 소리를 토해내는 차가운 겨울 바다.

그 절벽 위에 놓여 반대편 절벽을 향해 끝없이 이어지는 거대한 다리.

그리고 그 다리 건너편에 위치한 화사한 봄의 도시.

멀리서 봐도 저 건너편의 도시에는 녹색 풀과 형형색색의 들꽃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눈이 하늘로 오르고, 앙상한 겨울나무가 뒤집힌 환경과 전혀 다른 분위기의 도시였다.

“와아, 미궁 속에 이런 곳이 있는 줄은 몰랐어요!”

나를 이끌던 소녀도 눈을 호기심으로 빛내며 처음 본다고 감탄하고 있었다.

다리 위를 천천히 걸어 나가며 도시에 다가갈수록, 날씨가 변하기 시작했다.

바닷물마저 얼어붙을 것 같은 날씨는 점점 온화한 날씨로.

피부를 할퀴는 것처럼 불어오는 칼바람은 부드럽게 쓰다듬는 산들바람으로.

다리 위를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봄에 한 걸음씩 다가가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봄의 도시 안으로 걸음을 옮기자, 전혀 예상하지 못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길가에 난 들풀들이 산들바람에 흔들리고, 새하얀 건물 위로 봄볕이 따사로이 내리쬐고 있었다.

그리고 그 봄이 만개한 도시에서 수많은 사람이 웃음을 숨기지 않으며 소란스럽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평범하다고 하면, 평범하다고 할 수 있는 중세 판타지의 도시였다.

하지만 확실하게 이질적인 부분들이 산재해 있기도 했다.

우선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특이했다.

“모험가님! 숙소는 정하셨나요? 정말 조용하고 깨끗한 여관이 있는데, 어떠신가요?”

나를 향해 호객하는 사람만 봐도 그랬다.

이 도시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의 신장이 어린아이처럼 극단적으로 작았다.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나보다 조금 작거나, 나보다 조금 큰 수준의 사람들만 가득.

덕분에 1m 정도인 내 신장이 평범해 보였다.

특이한 것은 저들의 모습만이 아니었다.

저들이 사용하는 언어도 이상했다.

한국어, 일본어,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부터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까지 온갖 언어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이상하게 듣고 이해하는 게 가능했다.

사람이 하는 말을 감정으로 유추하는 것보다는 훨씬 편안했다.

나는 여관을 호객하는 여자의 손에 붙들려서 끌려가면서도 왠지 재미있는 모험이 될 것 같은 생각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

하늘을 꿰뚫을 기세로 쏘아지는 화살이 백호 무늬 티라노사우루스의 몸통에 박혀 들어갔다.

그러자 티라노가 고통스러운 소리를 지르며 몸을 움츠리며 고개를 숙였다.

“지금이에요!”

귀가 뾰족하고 키가 120cm 정도인 엘프 궁수가 나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티라노를 향해 높이 뛰어올라서 그 머리 한가운데에 쌍검을 박아 넣었다.

그 순간, 모든 힘을 소비한 티라노는 그대로 바닥에 몸을 누이며 쓰러졌다.

미궁 97층 보스, 백호 무늬 티라노사우루스가 그렇게 죽었다.

어느새 나는 환상 속 미궁을 97층까지 주파한 상태였다.

이 환상 속 세계는 정말 마음에 드는 것투성이였다.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는 나는 ‘침묵의 쌍검사’로 유명해졌다.

도시에는 ‘침묵의 쌍검사’인 나의 모습을 본뜬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도시 내의 식당에서는 푸딩과 마시멜로, 푸딩처럼 맛있는 것들만 팔았다.

보스 몬스터들은 내가 좋아하고, 객관적으로 최고로 멋있는 티라노사우루스만 나왔다.

나와 같이 모험을 겪은 동료들은 나의 지시라면 의심 없이 수행할 정도로 나를 믿어주었다.

내가 매일 의자를 빼거나 다리를 거는 장난을 쳐도 그랬다.

‘엄마!’

정말 이상적인 미궁이었는데….

‘엄마!!’

정말로 이상적이고 정말로 행복한 미궁이었는데….

‘엄마, 일어나!’

긴박해 보이는 검은 사신의 외침이 들려왔다.

나는 저절로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저 양손을 하늘로 들어 올렸다.

“왜 그러세요?”

80cm로 가장 작은 신장을 가진 우리 파티의 마법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이바이, 나만의 행복한 티라노 모험.’

나는 그대로 허공을 움켜쥐고 찢어버렸다.

그러자 행복한 꿈은 무너져 내렸고, 내 눈앞에는 티라노가 아닌 미궁 보스가 보였다.

***

파파파파팍!

하늘에서 검은색 화살이 음속을 뛰어넘은 무서운 기세로 마구 떨어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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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한 돌바닥이 폭탄에 맞은 것처럼 마구 비산했다.

삐-!

하지만 검은 화살에서는 다급해 보이는 ‘삐-‘소리가 울렸다.

물리 면역만 아니면 우습게 관통할 정도의 위력을 가진 화살이었지만, 맞질 않으니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티끌 하나 없는 유리보다 투명한 얼음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거미의 몸통.

그 거미의 몸통 위로 새하얀 눈보다 하얀 피부를 가진 인간의 상반신이 매달려 있었다.

거미의 몸통에는 인간의 육체로부터 뻗어 나온 하얀 줄기들이 징그럽게 파고들어 있었다.

띠링.

거미 인간이 쥐고 있는 지팡이에서 청명한 방울 소리가 울렸다.

오브젝트와 인간을 가리지 않고 환각에 빠트리는 방울 소리였다.

사나운 표정으로 거미 인간과 대치하고 있던 검은 사신 중, 일부가 비틀거리더니 풀썩 쓰러져 버렸다.

엄마가 장난도 안 치고, 한없이 상냥한 가짜 사신 정원으로 끌려들어 가버린 것이다.

안 그래도 거미 인간을 상대하기에 부족한 검은 사신의 숫자가 더욱 부족해졌다.

더 이상 저 거미 인간을 막을 수 없어!

검은 사신들은 고개를 돌려서 엄마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때찌때찌.

검은 사신 하나가 엄마를 애타게 부르며 때찌때찌를 하고 있었지만, 엄마는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일어나지 못한다.]

[꿈속에서는 벌써 10년이 흘렀다.]

[편안한 환상에 그토록 오래도록 취해버린 자는 절대로 돌아오지 못한다.]

거미 인간은 입을 열지도 않고 염파를 보내서, 검은 사신들을 조롱했다.

[그리고 설사 일어난다고 해도, 욕망에 충실한 너희의 주인은 절대로 나를 이길 수는 없다.]

검은 사신은 그런 조롱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소녀를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그 순간 미궁의 하늘이 갑작스럽게 갈라지며, 그 뒤의 모래로 만들어진 벽이 드러났다.

물론 순식간에 그 흔적은 사라져 버렸지만, 잠깐이라도 미궁 2층을 유지하던 공간이 찢긴 것이다.

[눈동자의 힘으로 만들어진 공간이?]

거미 인간이 깜짝 놀라서 회색 사신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자, 바닥에 누워 하늘을 향해 손을 뻗어 올린 회색 사신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손이 점점 검게 물들기 시작하면서 굉장히 불길한 기운이 회색 사신을 중심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이 기운에 닿은 자는 너무나도 슬프고, 아쉬운 감정에 휩쓸려 버릴 정도의 압도적인 감정의 폭풍이었다.

그리고 어느새 온몸이 검게 물들고, 장작이 빨갛게 타오르는 괴물이 천천히 바닥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누구나 보는 순간 공포에 질릴 만큼 흉흉한 분위기를 두른 괴물을 보고, 거미 인간은 방울을 빠르게 흔들었다.

띠링. 띠링. 띠링.

하지만 머리 위에 헤일로를 쓴 채, 붉은 불꽃을 피눈물처럼 줄줄 흘리는 괴물에게는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어… 어떻게?]

온몸에 하얀 불꽃이 달라붙은 거미 인간은 굉장히 당황해서 방울을 미친 듯이 흔들었지만, 검은 괴물은 뚜벅뚜벅 걸어서 다가올 뿐이었다.

띠링띠링띠링띠링띠링띠링.

그리고 분노한 괴물에 의해서 조그마한 티라노 모양으로 압축되어 버렸다.


           


Seoul Object Story

Seoul Object Story

서울 오브젝트 이야기
Score 9.2
Status: Ongoing Type: Author: Artist: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Humans, once the masters of Earth, were losing their place to the inexplicable phenomena known as Objects. And this is a story about becoming an Object and living worry-free in the Seoul of such a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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