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18
죽어버린 숲에 떨어지고서 2시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저녁 무렵에 숲에 떨어진 탓에 이미 태양은 휴식을 취하기 위해 집으로 돌아가 버렸고 2교대 근무에 혹사당하는 달이 그 자리를 대신 지키고 있었다.
부정한 이들은 야간근무를 하는 달을 사랑하는지라 저것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에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이 곳을 돌아다니며. 살아있는 자를 향한 원망을 드러내며. 그것들이 가진 것을 빼앗기 위해 움직이지.
굶주린 사자들 사이에 떨어진 먹잇감인 나는 본래라면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전투를 수행해야 할 터이나.
‘…왜 이렇게 안전하죠?’
숲 한 가운데에 서 있는 나는 기이할 정도로 여유로웠다.
몬스터들이 나를 찾아오지 않은 것은 아니다. 죽은 자는 산 자의 생기에 이끌리는 게 보통인지라 많은 녀석들이 내 목숨을 가져가기 위해 달려들었지.
나는 친절하게 그들을 주신의 품 안으로 돌려보내 주었다. 뚝배기를 깨주었다는 것이다.
당장 방금 전에도 악령 네 마리를 정화해 허접 주신의 일거리를 늘렸으니. 숲의 악령들은 분명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내가 여유롭다고 느끼는 이유는 전투가 너무도 간단했기 때문이었다.
악령이고, 그들에 홀린 짐승이고, 뭐고 간에 메이스에 뚝배기가 깨지고 나면 형체를 잃어버렸다.
비교적 강한 놈들은 일격에 정화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오래 버티지는 못했다. 신성이 담긴 메이스 앞에 부정한 것들은 무력했던 것이다.
물론 몬스터들이 공격하는 나를 가만 바라보고 있지는 않았다. 나를 죽이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
근데 있잖아. 저주를 퍼부어봐야 스킬에 의해 가로 막히고, 마법적인 공격을 해봐야 부정한 마력은 신성에 의해 정화당하고, 그렇다고 물리력을 사용하자니 방패에 막혀버리는데 쟤네가 뭘 할 수 있겠냐. 얌전히 메이스에 얻어맞아야지.
상황이 이러니 난 두 시간 동안 계속해서 전투를 거듭했지만 자그마한 상처조차 입지 않았다.
<뭘 당연한 것을 묻고 있느냐. 그대에 비해 이 곳에 도사리는 것들이 약한 것 뿐.>
그럴 리가 없어요. 여기 레벨 대 꽤 높은 장소라고요? 아카데미 1학년이 감히 버틸 수 있는 곳이 아니라니까요?
아무리 제가 게임 기준으로 해도 빠르게 성장한 편이라지만…
어라? 나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강한가?
<이 정도면 이 곳에서 위험을 겪을 일은 없겠구나.>
‘그쵸?’
이제부터 내가 할 일을 아침이 올 때까지 전투를 거듭하는 것이다. 어림잡아도 한 나절 정도는 메이스를 휘둘러야 할 테지.
근데 그거 내가 매일 같이 하던 일이잖아?
알른 가문에 있을 때는 이틀 내내 잠도 안 자고 몸을 움직인 적도 있어. 그런데 한 나절? 개꿀이지.
포셀이 한 나절만 하자 그랬으면 이 새끼 자는 도중에 기습하려고 이러나 싶었을 걸.
‘생각한 것보다 너무 쉽네요.’
죽음의 위기와 처절한 싸움을 각오하고 있었는데 정작 돌아온 건 여유와 느긋함이라니.
<쉽다는 건 언제나 좋은 일이지.>
‘그건 그런데요.’
할배의 말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쉽다는 건 좋은 일이다. 꿀은 빨 수 있을 때 빨아야한다는 걸 어찌 모르겠는가.
그를 알고 있으면서도 이토록 떨떠름한 대답이 나온 이유는 단순하다.
이 곳의 악령을 사냥하는 일이 이토록 쉽지 않은가. 그렇다면 좀 고생할 각오를 한다면 이 숲을 정화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본래 이 죽어버린 숲에 정상적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우선 교회와 관련된 직업을 지닐 것. 명성이 높을 것. 일정 이상의 신성을 가질 것.
이런 조건을 충족한 후에 특정 NPC를 만나게 되면 죽어버린 숲과 관련된 퀘스트를 습득할 수 있다.
그 내용은 언데드에 사로잡힌 숲을 정화시켜 달라는 것.
이 퀘스트를 습득할 즈음이면 유저도 꽤나 성장한 상태인지라 어렵잖게 보스를 사냥할 수 있다.
정확히는 ‘사냥’만 할 수 있다.
첫 번째 보스를 죽여도 숲은 정화되지 않는다.
그 때부터는 회차 플레이를 돌아야 한다.
보스 죽이고 단서 찾고 보스 죽이고 단서 찾고.
이 짓거리를 대충 다섯 번 정도 반복하면 이 숲에서 죽음을 몰아내는 게 가능했지.
아. 옛날 기억나네.
게임이 출시되고 나서 얼마 안 되었을 때 사람들 이 퀘스트 무슨 생각으로 만든 거냐면서 진짜 쌍욕을 해댔었는데.
숲이 더럽게 넓어서 보스 하나 잡는 것만 해도 삼십 분이 걸리는 데 왜 그걸 다섯 번이나 반복하게 하냐면서. 그런 주제에 보상은 왜 이렇게 짜냐며.
그래도 공략이 있으면 바로 찐 보스를 찾아갈 수 있었기에 정보가 공유됨에 따라 이 퀘스트에 대한 욕은 사라졌다.
이후에 이게 다른 퀘스트와 연계된 것이었다는 게 밝혀지기도 했고.
생각해보자.
아드리 관련 퀘스트 수행하면서 스킬 받았으니까 전제조건은 채웠고.
신성 투술은 박투술의 상위. 분명 격이 높은 스킬일 테니 보스 타격하는 데 아무 지장 없을 것이고.
위치야 당연히 알고.
문제가 되는 거라면 내가 그 보스를 상대할 수 있을까 인데.
팔짱을 낀 채 고민을 이어나갔지만 내 귓가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상하다. 이렇게 고민하고 있으면 허접 주신이 뭐 하라고 던져주던데.
1학기 끝났다고 더 이상 그런 서비스 안 해주는 거야?
쪼잔하네 진짜.
얌마.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이 그렇게 쪼잔하면 아랫사람들한테 사람 취급 못 받아. 좀 베풀고 그래야 네가 시키는 걸 따를 맛이 날 거 아니냐.
그런다고 지금 주지는 말고. 나쁜 말 해놨는데 띠링하는 소리가 들리면 경기날 것 같거든.
사실 결정은 이미 내렸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한나절 동안 가만 서 있는 건 비효율의 격치인 것 같더라고. 그리고 나 같은 썩은물은 이런 비효율적인 시간 낭비를 견디지 못하지.
몬스터가 오긴 하는데 쟤네 잡아도 경험치를 얼마나 주겠냐.
원샷원킬나는 놈들이다. 경험치 바 0.01%는 채울 수 있을까?
그러니 이 숲을 정화하겠다. 퀘스트는 주어지지 않았지만 퀘스트를 수행하겠다.
사서 고생을 하다 보면 약해 빠진 악령 나부랭이를 상대하는 것보다 많은 걸 얻을 수 있을 테니까.
*
밤이 어둑해지고 별이 떠오를 때면 루카는 과거 자신의 곁에 있었던 별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했다.
찬란하디 찬란한 재능의 총아.
무술도. 마법도. 여러 지식도. 배우기 시작하면 저 멀리로 훌쩍 나아가서는 최고의 자리에 오르더니 시시하다면서 그를 내버리고 다른 곳으로 향하던 사람.
과거 혼란의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분명 용사의 호칭을 지니게 됐을 이.
루카는 우연찮게 그의 옆을 차지했고, 항시 그의 뒤를 어떻게든 뒤따르기 위해 발악하다가, 자신은 저렇게 빛날 수 없음을 깨닫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대신 그가 선택한 것은 별을 만들어 내는 일이었다.
아름다운 원석을 찾아내어 자신의 손으로 세공해 밤하늘에 박아 넣는 것. 언젠가 자신이 보았던 별보다 빛나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
루카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이게 타협에 불과하다는 걸. 패배자의 발악일 뿐이란 걸. 발버둥쳐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 속에서 자위하는 것 뿐이란 걸.
그걸 몰랐다면 루카가 이만큼 감정적으로 움직일 일도 없었겠지.
밤의 숲을 산책하듯 돌아다니는 루시 알른을 구경하는 루카는 절찬리에 자신이 벌인 일을 후회하고 있었다.
감정적이었습니다. 이런 일을 할 거라면 더 철저한 준비를 했어야 했어요.
이 순간의 기억을 지우긴 하겠지만 혹여 그 마법에 문제가 생긴다면, 그래서 알른과 파트란 두 가문에게 추궁 당하게 된다면 자살하는 것 말고는 답이 없을 테니까.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아뇨. 그래도 저는 똑같이 움직이겠죠.
알른 영애와 단 둘이서 대화를 한 순간. 제가 보았던 별과 한없이 닮아있는 그녀를 본 순간. 제게 주어진 선택지는 재능의 편린을 확인하는 것뿐이니 말입니다.
“지금까지는 무난한가요.”
루카가 보았을 때 루시 알른이라는 사람은 천재가 맞았다.
아무리 신성을 품고 있다고 하지만 저 어린 나이에 이 숲을 가볍게 거닐 수 있다니.
방패과 메이스를 다루는 실력.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음에도 지친 기색 하나 보이지 않는 얼굴. 어둠 속에서 찾아드는 여러 습격 속에서도 느껴지는 당당함.
루시 알른은 이미 아카데미의 1학년 수준을 한참 초월해 있었다.
루카가 판단하기로는 지금 저 상태로 3학년에 가져다놔도 뛰어난 성적을 거두지 않을까 싶을 지경이었다.
허나 이 정도로는 안 된다.
아직 부족하다.
루카가 루시 알른에게 기대하는 것은 단순한 천재성이 아니다.
밤하늘에 올라 그 누구보다 밝게 빛날 재능. 자신이 보았던 별을 흐리게 만들 빛. 세공사의 자존심을 포기하게 만들 압도적인 것.
루카는 루시가 그런 것을 보여주길 바랐다.
어두운 숲이 무섭지도 않은 건지 무작정 앞으로 향하는 루시를 살피던 루카는 문득 그녀가 가는 장소가 위험한 곳임을 깨달았다.
저기는… 분명 이 곳의 여러 악령을 이끄는 녀석이 있는 장소일 텐데요.
잘 됐군요. 그녀가 그 놈을 만났을 때에 어떤 식으로 대응하는 지 보도록 할까요.
여러 기대를 가지고 루시의 모습을 살피던 루카였지만 그의 기대는 조금도 충족되지 못했다.
거기에 그가 바라던 처절한 전투는 존재하지 않았다.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압도적인 신성의 앞에 찍어 눌러져 흩어져버리는 악령의 모습 뿐.
이 숲의 수많은 악령의 우두머리에 서 있던 존재는.
‘꺄아아~♡ 너무 무섭다~♡ 이딴 걸 저주라고 내뱉는 악령이라니♡ 푸하핫♡ 너무 허접한 거 아냐?♡’
자신을 비꼬는 소녀의 목소리 앞에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정화되고 말았다.
“…저게 무슨?”
몇 합을 겨루지도 않고 악령을 처리해버린 루시 알른은 실망스럽다는 것처럼 악령이 있던 자리를 바라보다 이내 다른 곳으로 움직였다.
그제서야 루카는 자신이 처음부터 커다란 착각을 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저 분은 우연히 여기에 도착한 게 아니었습니다! 처음부터 저 악령을 상대하고자 한 것이었어요!
뭡니까. 루시 알른. 당신은 이 숲에 대해 무얼 아시는 거죠?!
속으로 탄성을 내지르던 루카는 두근거리는 심장의 소리를 줄이며 그녀가 향하는 뒤를 따랐다.
그녀가 보여줄 것을 기대했다.
*
죽어버린 숲의 두 번째 보스가 먼지가 되어서 흩어지는 것을 본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얘네 왜 이렇게 약해 빠진 거지?
뭔가가 잘못된 거 아냐?
루카가 무슨 수작이라도 부려 놓은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