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에게 ‘개고기 아저씨’라고 불렸던 남자는 어느새 꿈을 꾸고 있었다.
꿈이라는 것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지만, 결코 깨어나고 싶지 않은 꿈.
그가 미궁을 내려가는 것을 포기하던 때의 꿈이었다.
그가 ‘나는 더 이상 미궁을 내려가지 않겠어.’라고 이야기하기 직전이었다.
그 순간이 영원토록 이어지는 꿈이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미래를 바꿀 기회를 붙잡을 수 있도록.
‘같이 미궁을 계속 나아가자!’라고 이야기할 수 있도록 시간이 멈춘 꿈이었다.
미궁 43층, 침엽수림이 우거진 숲속이었다.
제대로 앞을 보기 힘들 정도로 장대비가 내리는 날씨였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쏟아지는 빗물은 시간이 멈춘 것처럼 멈춰있었다.
동료들 앞에 서서,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기 직전의 자신이 보였다.
아마 이대로 저 육체로 들어가면, 시간이 다시 흐르는 구조의 꿈이겠지.
바꾸고 싶은 과거였다.
그야 저 이후, 자신을 43층에 남겨두고 밑으로 내려간 동료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남자는 차마 ‘같이 미궁을 계속 나아가자!’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무서웠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이 꿈에서 깨어날 용기를 가질 수도 없었다.
바꾸고 싶은 과거였으니까.
과거의 선택을 바꿀 용기도, 자신의 선택을 긍정하고 꿈에서 깨어날 용기도 없었다.
그저 영원히, 이 멈춰버린 시간 속에서 계속 멈춰 서 있을 수밖에 없는 꿈이었다.
그는 꿈일지라도, 끔찍한 미래를 알고 있더라도, 미궁을 내려가자고 말할 수 없었다.
미궁의 구조를 깨달아 버린 남자의 입장에서는 더 이상 내려가는 선택을 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예지에 가까운 깨달음이었다.
미궁은 미궁을 돌파한 사람에게 초인적인 힘을 부여했다.
한층, 한층 나아갈 때마다 더욱 강한 힘을 부여했다.
모험가가 평소 원하던 것을 이루어 주었다.
강한 힘, 멋진 외모, 마법과 검술, 강력한 아이템.
꾸준히 미궁을 드나들기만 하면 영원히 자기 것이 되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공짜로 얻는 것은 없었다.
힘을 얻은 인간은 이상해졌다.
자만과 선민의식?
그런 평범한 ‘이상’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광인.
인간에 대한 끝없는 증오와 맥락 없이 횡설수설하는 정신 이상.
그리고 그 정신 이상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는 순간, 미궁이 잡아먹어 버렸다.
다시는 미궁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그것을 알고 있어도 미궁을 내려가는 것을 멈출 수는 없었다.
‘강한 힘’에는 중독성이 있었으니까.
30층을 넘어서 미궁을 내려가는 것을 멈춘 사람은 그가 유일했다.
게임처럼 차근차근 조심스럽게 나아가면 간단하게 클리어할 수 있었던 미궁의 난이도.
그리고 힘을 얻으면 미쳐버리는 사람들.
그 두 가지를 놓고 생각하니, 미궁의 목적이 명확해졌다.
미궁은 인간을 무언가 다른 존재로 변질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변질에서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자를 골라내는 것이다.
그래서 남자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다.
그는 이미 자신을 잃어버리고 있었으니까.
일본에서 도대체 무엇을 하고 살았는지, 어떤 사람이었는지 더 이상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을 잃어버리고 얻어낸 예지가 그를 미궁의 구조에 대한 깨달음으로 이끌어 주었다.
그는 멈춰 서서 긴 시간 동안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고 있었지만, 하늘이 흘리는 눈물 같은 장대비는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 멈춰버린 꿈속이었지만, 아직도 그의 귓가에는 나무와 흙을 세차게 때리는 장대비의 소리가 달라붙어 있었다.
벌써 몇 년이나 지났지만, 이 침엽수림의 모습은 그의 눈에 선명하게 화인처럼 남아있었다.
남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제자리에 서서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하고 있었다.
***
소녀는 학교 옥상에 올라서서 밑을 내려다보았다.
붉게 타오르는 저녁놀이 세계를 황혼 색으로 물들였다.
소녀는 미궁 도시의 황혼을 정말 좋아했었다.
일본과 똑같은 것은 황혼밖에 없었으니까.
미궁 도시의 황혼과 하루를 마무리하는 소란스러운 소음을 좋아했었다.
소녀는 눈을 감고,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학생들이 운동장에서 왁자지껄하게 돌아다니며 소란을 피우는 소리.
학교 너머 길거리에서 차량과 사람들이 분주히 돌아다니는 소리.
그런 평화로운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잘 말린 나무로 거칠게 고기를 굽는 소리와 술을 마시며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왠지, 일본이 멀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이런 꿈같은 환상 속에서 계속 머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매일 밤 그리워하고 그리워했던 일상이었지만.
미궁 도시에서 만났던 모든 인연을 없었던 것으로 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리고 이곳에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분투하고 있을 귀여운 검은 요정이 없었으니까.
오랜만에 온 학교는 즐거웠다.
그러니까.
소녀는 세계를 향해 작별 인사를 했다.
다음에 진짜로 만날 때까지 안녕.
***
검은 사신은 미니 사신 정원을 뚜방뚜방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렇게 뛰어다니는 미니 사신들의 앞에는 세상에서 가장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미니 사신들이 뛰어노는 것을 바라보는 회색 사신이 있었다.
놀다가 지친 미니 사신들에게 푸딩을 한입씩 먹여주는 자애로운 엄마.
돌아다니면서 아이들의 푸딩을 뺏어 먹지 않고, 오히려 과자를 나눠주는 엄마.
미니 사신들이 같이 먹자고 푸딩을 가져오면, 그걸 들고 도망가 버리는 게 아니라 같이 나눠 먹는 엄마.
정말 행복한 미니 사신 정원이었다.
미니 사신들과 놀다가 지친 검은 사신이 정원 밖으로 나가자, 세희 연구소에서 일하던 애착 인간이 자신을 반겨주었다.
옴뇸뇸.
애착 인간의 손바닥 위에 앉아서, 애착 인간이 주는 푸딩을 냠냠 먹었다.
행복해.
엄마가 이상할 정도로 상냥해져서 행복했다.
애착 인간이 하루에 딱 한 시간만 일하도록 연구소 규정이 바뀌어서, 정말 행복했다.
애착 인간과 계속 같이 있을 수 있다니!
하지만 평온한 세희 연구소의 하늘이 찢어지면서, 그런 행복한 순간의 끝이 와버렸다.
찢어진 하늘 위에는 장난기가 가득한 노란 눈동자가 검은 사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악몽이었다.
검은 사신은 그 순간 깜짝 놀라서 잠에서 깨어나 버렸다.
***
티라노의 원한을 잘 알았겠지!
나는 티라노 모양으로 뭉개진 미궁 보스를 내려다보며, 소리 없는 포효를 질렀다.
그렇게 미궁 보스를 박살 내고 정신을 차리니, 그제서야 뒤늦게 온몸을 태우는 고통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헤일로에서 뻗어 나오는 힘이 내 몸을 사정없이 태우고 있었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헤일로를 벗어서 바닥에 집어 던졌다.
헤일로가 주는 고통은 몇 번을 써도 줄어들지 않고, 고통스럽기만 했다.
분명 내 능력이니까, 쓸수록 익숙해져야 하는데도 그랬다.
너무 아파서 다시는 쓰기 싫었는데, 티라노의 복수에 눈이 돌아가서 무심코 머리 위에 불러내 버렸다.
벗어던진 헤일로가 하늘로 돌아가자, 나는 시선을 돌려서 검은 사신들이 잔뜩 뛰어노는 난장판을 돌아보았다.
침대로 변해서 잠이든 소녀를 돌봐주는 패륜 사신.
승리를 자축하며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즐거워하는 검은 사신들.
그리고 더없이 행복해 보이는 표정으로 잠이든 검은 사신들이 보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행복한 표정으로 잠든 검은 사신들을 보면 조금 기분이 이상했다.
뭔가 나를 욕하고 있는 기분이 든단 말이지.
‘이 녀석들이 왜 이러는지 알아?’
내가 이 아이들은 왜 계속 잠들어 있냐고 묻자, 검은 사신들은 깜짝 놀라서 잠이 든 검은 사신에게 달려들었다.
그제서야 잠이 든 검은 사신들에게 생각이 미친 모양새였다.
황금 사신들이나 검은 사신들은 자기들이 터프한 걸 알아서 그런지, 자기들의 부상에는 무덤덤한 경향이 있는 것 같았다.
푸른 사신이 다치면 갓난아기가 다친 것처럼 케어하는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어깨를 흔들고, 뺨을 붙잡고 쭈욱 늘리고.
검은 사신들의 잠을 깨우려고 온갖 시도를 해보고 있었지만, 검은 사신들은 잠에서 깨어날 낌새가 없었다.
자신들이 처리할 수 없는 문제인 것을 깨달았는지, 검은 사신들은 각자 잠이든 검은 사신을 짊어지고 내 앞으로 우르르 모여들었다.
‘큰일!’
‘잠드는 방울!’
검은 사신들의 이야기를 듣자, 상황이 이해되었다.
나처럼 티라노 모험 꿈을 꾸고 있다는 뜻이네.
꿈은 행복하고 현실은 냉혹하지만, 어쩔 수 없이 깨워야겠어.
정말 행복한 얼굴이지만 어쩔 수 없지.
딱히, 부러워서 그러는 건 아니니까!
해결 방법은 간단했다.
황금 나무의 능력을 이용해서 꿈속으로 들어간 뒤, 공간 절단 능력으로 꿈을 박살 내면 끝!
우선 검은 사신들의 꿈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황금 나무의 능력을 사용하자, 검은 사신들이 화들짝 놀라서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했다.
공간 절단을 하지도 않았는데, 어째서?
잠에서 깨어난 검은 사신들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나와 눈을 맞추고 이상한 것을 봤다는 것처럼 눈을 마구 비볐다.
그리고 눈을 잔뜩 비비고 나서 다시 나를 바라보더니, 또르르 눈물 한 방울을 흘렸다.
도대체 검은 사신은 꿈속에서 뭘 봤길래 저런 반응이지?
이상하게 기분이 나빠져서 뭔가 물어보려고 하는 순간, 미궁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쿠르르.
새하얀 벌판과 거꾸로 뒤집힌 나무들이 있는 미궁 2층과 어울리지 않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치 억겁의 시간 속에 오랜 시간 방치된 돌과 모래의 톱니바퀴가 드디어 돌아가기 시작하는 느낌이었다.
마치 망가진 TV 화면처럼 사정없이 깜박거리던 미궁의 전경은 어느새 돌과 모래로 이루어진 풍경으로 바뀌어버렸다.
모래로 만든 눈송이가 하늘로 날아오르고 있었고, 돌을 깎아 만든 앙상한 나무가 천장에 틀어박혀 매달려 있었다.
그렇게 드러난 정적이고 견고해 보이는 돌과 모래는 점점 부스러져서 흐르기 시작했다.
사막의 태양 아래 흐르는 모래의 강물처럼, 모래알 하나하나가 차르륵거리는 소리를 내며 쏟아져 내렸다.
그렇게 부스러진 모래는 다시 장엄한 기둥을 이루며 하늘로 솟아올랐고, 중력을 거스르는 모래의 바다가 하늘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모래의 대격변이 멈추자, 모래로만 이루어진 엄청난 넓이의 평원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차르륵.
그 평원 위에 하늘을 대신 채우는 모래는 여전히 모래 위를 기어다니는 뱀 같은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었다.
모래의 대지와 모래의 하늘.
그런 특이한 사막 한 가운데서, 공간이 찢어진 틈새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나를 초대하듯이 내 코앞에 만들어진 균열은 나를 부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
끊임없이 흐르는 모래로 이루어진 공간.
그곳에 있는 의자에 앉아있는 노인이 모래로 가득한 눈을 뜨고 미궁 내부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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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색 검을 주시하고 있던 노인의 시선은 어느새 검은 갑옷을 입은 회색 사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회색 사신이 검은 사신 갑옷을 벗어 던지고 그 모습을 드러내자, 무표정했던 노인의 얼굴에 한줄기 놀란 것 같은 감정이 흘러갔다.
[회색의 육체.]
[호문쿨루스.]
[최후의 연금술사를 본뜬 모습.]
노인은 웃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하지만 모래로 바뀌어 버린 육신은 웃음소리를 토하지 못했다.
오히려 벌어진 턱이 그 형상을 유지하지 못하고 모래로 바뀌어서 부스러져 흘러내렸다.
[하하하.]
[그런가. 성공했는가.]
[가장 성공할 수 없을 것 같은 아이가 성공했구나.]
[그렇다면 나도 그 성공에 걸어보겠다.]
노인이 지팡이를 흔들자, 미궁에서 그 힘이 점점 회수되어 노인에게 돌아오기 시작했다.
[9개의 왕관을 짊어질 자격을 가졌는지, 기대해 보겠다.]
자신의 몸조차 모래로 흘러내리면서, 노인은 만족스러운 염파를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