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Chapter 22

진상 의뢰인이 풀어놓은 파리 떼의 일부는 파리지옥 같은 무저갱 속에 떨어졌고, 남은 파리들은 날개가 뜯겨 죽었다.

뱀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젊어서 혈기 왕성한 건 사실이었지만 뱀이 경고한 것만큼 날카롭진 않았다.

객관적으로 보면 제법 강한 녀석은 맞았다.

아마 그 나이 또래에서는 적수를 찾기 힘들었겠지. 그래서 기고만장해져서 이곳까지 쳐들어온 것일 테고.

하지만 언젠간 마스터에 올랐을지도 모를 인재라 해도 지금은 하늘 무서운 줄 모르는 풋내나는 애송이였다.

…그들보다 훨씬 어린 내가 이런 말을 하고 있으니 기분이 묘하네.

아니지, 이럴 때 쓰라고 전생의 기억이 있는 거 아니겠어?

정확하게 기억 나는 건 아니지만 대략 스물은 넘었던 것 같으니 정신연령은 내가 더 높은 거로 하자.

정신연령도 높고 이룬 경지도 높으니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 이 말이야.

여하튼 진상 의뢰인의 의뢰도 완벽하게 완수했고 대검 삐약이의 부리도 다물게 했다.

저니와 남자는 사뭇 진지한 태도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으며 제국의 편에 붙지 않은 덕에 살아남은 사도들은 나를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

뭐가 그리 궁금하길래 먹이를 바라는 아기새처럼 머리를 불쑥불쑥 내미는 건지.

나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금세 신경을 껐다.

“음….”

그나저나 이 시체들을 어떻게 한담.

들짐승이나 몬스터가 뜯어먹게 두는 것도 방법이지만 워낙 수가 많아서 다 먹기 전에 썩을 것 같다.

시취나 전염병의 위험을 생각하면 역시 처리해야 할 텐데.

“귀찮네….”

내가 마법사였다면 한꺼번에 태워버리면 끝일 텐데, 이럴 때면 검을 선택한 게 조금 아쉽게 느껴지더라.

불을 지필 수단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이런 일에 쓰기엔 너무 과한 데다 여파를 생각하면 오히려 더 귀찮아질 게 분명하다.

그러니 어쩔 수 있나, 몸으로 때워야지.

‘이래서 검사란 족속들은.’

…갑자기 노망난 뱀이 비웃는 느낌이 들어서 매우 불쾌해졌다.

하는 수 없이 시체를 질질 끌어서 갈라진 땅에 던져 넣었다.

파리가 파/리가 된 덕에 그다지 힘이 많이 들진 않았다.

우리 강산 맑게 푸르게.

내가 자연보호 환경보호를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으니 지켜보던 사도들도 하나둘 뜻깊은 일에 동참했다.

“오, 이 검 봐봐. 능력치 개 쩌는데?”

“갑옷은 못 쓰겠네. 돈 같은 건 없나?”

파리 떼의 시체를 열심히 뒤적거리는 걸 보면 제사보단 젯밥에 관심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아무튼 도움이 된 건 사실이니까.

이제야 내가 아는 리베리 용병들답네.

사도다 뭐다 해도 역시 용병의 본능은 저버릴 수 없는 모양이야.

마지막으로 왕파리까지 던져 넣은 나는 손을 툭툭 털었다.

흙을 퍼와서 메우는 건 귀찮은 일이니 나중에 기름을 가져와서 부어야겠다.

보람찬 일도 끝났으니 이제 퇴근해야지.

“아참.”

아직 할 일이 하나 남았지.

* * *

나는 내가 뱀 새끼를 싫어하는 것과 별개로 녀석의 실력이 뛰어나단 것은 인정한다.

음, 아니다. 싫어하는 건 너무 온화한 표현이니까 ‘찢어 죽이고 싶은 것과 별개로’ 정도로 정정하자.

만약 녀석의 실력이 조금이라도 부족했다면 가리드와 맞붙었을 때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됐거나, 내 손에 찢겨 죽은 지 오래일 것이다.

이래서 마스터 딱지가 귀찮다니까.

한쪽이 나서면 다른 한쪽도 나서고, 싸우면 서로 죽을 각오를 해야 하니 함부로 나설 수도 없고.

어쩌다 맞붙었다 하면 주변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건 예삿일이니 상호확증파괴 같은 느낌으로 서로 눈치만 살살 살피는 것이다.

물론 자랑스럽다 못해 멸망해 버린 나의 조국 그라시스는 예외였다.

마스터고 뭐고 나가서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거든.

그러니 뱀 새끼를 죽이지 못한 건 그런 이유는 아니었다.

일대일로 싸우면 반드시 죽일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지만 녀석도 그걸 알아서 작정하고 나를 피해 도망 다녔기 때문이다.

싸움도 얼굴을 맞대야 성립하는 거지, 온갖 마법과 계략으로 시선을 돌리며 도망 다니는 녀석을 잡는 건 무리였다.

분하지만 전장을 지배하는 능력은 녀석이 더 우월했고, 그때의 나에겐 지켜야 할 게 아직 남아있었으니까.

서론이 길었는데 요지는 처음 말한 바와 같았다.

뱀 새끼의 실력이 출중하다는 것.

“이, 이게 뭐야?! 분명 이런 건 없었는데…?!”

명색이 마스터 메이지인 녀석이 친 결계인데 고작 도둑놈 몇 놈에게 뚫릴 리가 없지.

나는 열심히 결계를 두드려 대는 사도들을 보며 검을….

아 맞다. 부서졌지.

타박.

검을 뽑는 대신 다분히 의도적으로 소리를 내며 발을 내딛자 결계를 두드리던 놈들 중 몇이 고개를 돌렸다.

안색이 싸악 변하는 게 꼭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이라 꽤 재밌었다.

혹시나 했는데 집주인을 보고 저런 반응을 하는 걸 보면 역시나 떳떳한 놈들은 아닌 듯했다.

“…좆됐다.”

대충 망했다는 뜻이 아닐까.

한 녀석의 입에서 새어 나온 말의 의미를 짐작하며 몸을 날렸다.

가장 앞에 있는 남자의 멱살을 잡고 그대로 땅에 메쳤다.

멱살이 잡히는 순간까지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모르던 남자는 땅과 찐득한 포옹을 나누고 나서야 격한 숨을 토했다.

다음은 특이하게도 봉을 쥐고 달려드는 유별난 놈이었다.

봉이란 무기는 살상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다른 무기에 비해 살상력이 떨어지는 건 사실이었다.

피와 살점이 흩날리는 전투보다는 호신용에 어울리는 무기를 꼬나쥐고 달려드니 유별나다고 할 수밖에.

이런 건 피할 필요도 없다.

툭.

“어, 어엇?!”

직선으로 날아드는 봉의 옆면을 손등으로 치자 그대로 균형이 무너졌다.

사람이 봉을 다뤄야지 봉이 사람을 다루면 안 되건만, 봉이 낭창하게 흔들릴 때마다 주인의 몸도 덩달아 흔들렸다.

사실 주력은 봉술이 아니라 눈을 현혹하는 춤이었나.

싸우다 말고 춤을 추는 우스운 작태를 잠시 구경하다 딱 차기 좋은 위치까지 내려온 머리를 걷어찼다.

수박 터지는 소리를 뒤로 한 채 도망가는 놈의 뒷덜미를 잡아 다른 놈에게 던졌다.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리.

내 손을 떠난 도둑놈이 다른 놈과 만나 만수산 드렁칡 얽히듯 반가운 재회를 나눴다.

그나마 갖추고 있던 자세까지 완벽하게 무너진 상황.

남은 놈들을 모두 정리하는 것은 1분이 채 안 걸렸다.

애초에 남들 다 싸울 때 좀스럽게 남의 집에 숨어들 생각이나 하고 있던 놈들의 실력이 좋을 리 없었기에 내가 한 일은 싸움이라기보다 청소에 가까웠다.

이내 마지막 사도까지 빛무리에 휩싸여 사라졌다.

사도들은 이게 좋단 말이지. 시체 처리를 걱정할 필요가 없잖아.

“와아….”

…그래서 얘네는 언제까지 따라올 생각이지.

고개를 돌려 어미를 쫓아다니는 아기새처럼 쫄래쫄래 따라오는 녀석들을 뚱하게 바라봤다.

백번 양보해서 저니야 그렇다 치지만 대검 삐약이와 저 단검 놈은 왜 따라오는 거지.

“우리 보는 거 같은데…. 우리 보는 거 맞지…? 미션 때문에 따라오긴 했는데 개 쫄리네. 야, 넌 괜찮냐?”

“한 번 더 도전하면 싸워줄까? 또 싸워보고 싶은데.”

“나 지금 누구랑 얘기하니?”

둘의 대화를 잠자코 지켜보던 저니가 말했다.

“정말 싫었으면 처음에 쫓아가기 시작했을 때부터 조치를 취했겠죠. 그러니까 괜찮을 거예요. …아마도.”

“…저니 님은 왜 그렇게 태평하세요?”

“저요? 저야 뭐… 같이 밥 먹은 것만 해도 몇 번인데 설마 죽이겠어요?”

“…제발 죽였으면.”

“네?”

“예?”

“네?”

어째 딱히 의미가 있는 대화로 느껴지진 않았다.

아무튼… 지금이라도 불청객을 쫓아낼까 생각했는데 간만에 힘을 좀 썼더니 그것마저 귀찮아져서 내버려두었다.

대충 그들이 보인 용기에 대한 보답인 셈 치자.

나는 결계 앞에 섰다.

결계의 형태가 가시적으로 드러나진 않았지만 일대를 감싼 기묘한 마나의 흐름이 느껴졌다.

“으음… 어떻게 해야 하지?”

문득, 뱀 새끼는 이렇게 될 걸 예상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내 허락이 없이는 출입할 수 없게, 다르게 말하면 내 허락이 있다면 출입할 수 있게 해놓을 이유가 없었으니까.

뱀 주제에 이 외진 곳까지 찾아올 추모객을 생각하는 인간미 넘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 리도 없고.

생각하면 할수록 뱀한테 말려든 느낌이 들어.

음흉한 냄새가 났지만 가리드의 묘를 보호하는 역할은 톡톡히 하고 있으니 일단은 넘어가자.

그렇게 마음 먹었음에도 내가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이거, 어떻게 통과하는 거지?”

고개를 기울이며 고민했다.

꼭 열쇠를 놓고 와서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어린애가 된 느낌이야.

사실 들어가는 거야 어렵지 않다.

문이 열리지 않는다면 문짝을 잡아 뜯으면 되는걸.

다만, 범죄자 검거를 위해 남의 집에 쳐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내 집 문이 열리지 않는다고 해서 막무가내로 문짝을 뜯을 순 없는 노릇이잖아.

역겨움을 감수하고 보안문을 달았는데 달자마자 뜯으면 무슨 소용이야.

다행히 내 고민은 길지 않았다.

반지를 끼지 않은 손, 그러니까 맹약의 증표가 있는 손을 내밀자 그에 공명하듯 결계가 한차례 요동쳤다.

푸르스름한 결계의 표면에 뱀 새끼의 문장이 희미하게 떠오르자 마차 하나는 너끈히 들어갈 구멍이 생겼다.

아까도 느꼈듯이 이런 면에선 역시 검보단 마법이 더 유용하긴 하다.

물론 더 우월한 건 검이지만.

내 뒤를 따르는 세 삐약이와 함께 결계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미 많이 와본 저니와 단검 놈은 별 흥미를 느끼지 않았지만 처음 와본 대검 삐약이는 주변을 연신 두리번거렸다.

암묵적인 허락은 했다지만 초대한 손님은 아니라서 집을 안내하는 수고는 들이지 않았다.

대신 절벽을 향해 걸어간 나는 가리드를 내려다보다가 문득 얼굴을 찌푸렸다.

처음 본 푸른색 꽃이 내가 떠난 묘비 앞을 조용히 지키고 있었다.

“흥.”

웃기지도 않은 짓을.

푸른색 꽃을 손에 들고 주먹을 꽉 쥐었다 펴자 언제 있었냐고 말하듯 꽃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어쩌면 가리드를 존경한다는 뱀 새끼의 말이 거짓말이 아닐지도 모른다.

또, 뱀과 싸운 걸 후련하게 여기던 가리드였으니 뱀 새끼가 자신을 찾아온 걸 기쁘게 생각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어쩌겠어.

죽은 자는 말이 없고, 떠난 이를 생각하는 건 남은 자들의 몫인걸.

어느새 내 뒤에 세 사도가 죽 늘어섰다.

이렇게 있으니 내가 이 셋을 거느린 듯한 모양새였다.

나를 따르던 녀석들이 봤다면 제 버릇 남 못 줘서 또다시 단장 행세를 하는 거냐며 혀를 찼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랬다면 단장의 권한을 마음껏 느끼게 됐겠지만.

가리드가 떠난 지 사 년하고도 반년.

내가 이곳에 자리를 잡은 지는 일 년하고도 반년.

지금 당장은 아니라 해도 곧 정든 곳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갑자기 커다란 바위가 얹힌 것처럼 숨이 콱 막혀왔다.

나는 물에 잠긴 사람처럼 허우적대다가, 그리운 이름 석 자를 겨우 짜냈다.

“가리드.”

거의 평생을 불러온 이름을 입에서 굴리다 문득 생각난 단어 툭 꺼내 놓았다.

“아빠.”

예전이었다면 창피해서 절대 안 했을 짓을 했지만 의외로 부끄럽진 않았다.

막상 내뱉으면 이렇게 간단한 것을 뭐 그리 힘들다고 눈을 돌렸는지.

늘 그렇듯이 후회란 놈은 언제나 뒤늦게 찾아와 나를 괴롭혔다.


           


I Became a Raid Boss

I Became a Raid Boss

레이드 보스가 되었다
Score 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One day, when I came to my senses, I found myself reincarnated in another world. After enduring a rough life post-reincarnation, I thought I could finally settle down, quietly tending to a flower garden in the mountains… …But something feels off.”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