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바로 앞에서 공간이 찢어지며 나타난 균열은 명백히 나를 초대하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왠지 그런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들어갈지 말지 고민하고 있었다.
환상에서 나오고 보니, 모험은 이미 충분히 즐긴 것 같은 느낌이 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티라노사우루스도 없는 미궁을 더 이상 진행할 필요가 없을 것 같기도 했다.
공간의 균열에서 고개를 돌려서 검은 사신들 쪽을 바라보자, 검은 사신들은 마냥 즐거워 보였다.
갑자기 환경이 변해서 당황스러워하지도 않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치열한 사투를 치렀던 것 같은데, 그것도 까먹은 것처럼 해맑은 표정으로 뛰어다니고 있었다.
미궁 내부가 잘 다져진 모래로 변해버리자, 검은 사신들은 마치 모래벌판을 볼풀처럼 활용하면서 놀고 있었다.
모래 속을 수영장처럼 헤엄치고, 조그마한 모래 알갱이를 주워서 던지면서 놀고 있었다.
뭐, 이해가 되기는 했다.
볼풀은 피할 수 없는 재미와 매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나이 들고 나서 볼풀이 재미없는 것은 규모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어른들도 넉넉히 들어가서 놀 수 있을 만큼 거대한 볼풀이라면 다들 좋아할걸?
전 연구원이었던, 내 의견이니까 분명히 정답일 것이다.
나중에 세희 연구소에 초거대 볼풀을 만들어달라고 해야지.
히히.
그렇게 다들 즐겁게 모래를 활용해서 놀고 있었지만, 혼자 덩그러니 떨어져서 우울하게 앉아 있는 검은 사신이 있었다.
나에게 패륜 펀치를 날렸던 패륜 사신이었다.
패륜 사신은 애착 인간 소녀에 대한 걱정 때문인지, 우울한 표정으로 몸이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린 상태였다.
패륜 사신은 시무룩한 모습으로 소녀 얼굴 근처에 앉아서, 잠이 든 채 깨어나지 않고 있는 소녀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우울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패륜 사신이 뭔가를 느낀 것처럼 고개를 번쩍 들고 소녀 쪽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으… 으음”
거의 들리지도 않을 만큼 작디작은 애착 인간의 목소리였지만, 패륜 사신은 그 소리를 듣자마자 눈을 크게 뜨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애착 인간에게 달려들었다.
모래 위를 뚜방뚜방 달려서 애착 인간의 볼에 ‘착’하고 달라붙었다.
그와 동시에 잠에서 깨어난 소녀의 몸에서 점점 감정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패륜 사신의 애착 인간인 소녀가 점점 잠에서 깨어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그 감정을 느낀 패륜 사신은 행복한 표정으로 소녀의 볼에 자신의 볼을 문지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나도 갑자기 예린이가 보고 싶어졌다.
빨리 여기 일을 마무리 짓고, 세희 연구소로 빨리 가야겠어.
***
소녀가 눈을 뜨자마자 본 것은 모래가 강물처럼 흐르는 하늘이었다.
그리고 볼에서 느껴지는 말랑말랑한 감각.
볼에 달라붙은 무언가를 잡아서 떼어내자, 그러지 말라는 것처럼 버둥거리는 진동이 느껴졌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그 감촉과 움직이는 반응에서 소녀는 손에 잡힌 것이 무엇인지 알 것만 같았다.
일어난 지 얼마 안 돼서 잘 보이지 않는 눈을 깜빡이며 손에 잡힌 작은 존재를 바라보자, 해맑은 표정으로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오브젝트가 보였다.
검은색 피부.
하얗고 노랗게 빛나는 오드아이.
호감을 숨기지 않고 올곧게 뿜어내는 표정.
흑색 검이자, 자신을 지켜주는 수호천사, 검은 요정이었다.
“내가 깨어나는 걸 기다리고 있었구나?”
소녀는 반가운 마음에 작게 웃으며 검은 요정의 볼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간지럽혀 주었다.
그러자 검은 요정은 해맑게 웃으면서 자신의 작은 손으로 소녀의 손가락을 꼭 붙잡았다.
그렇게 잔뜩 놀아준 소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서 주변을 살펴보자, 미궁에서 정신을 잃었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환경인 것을 깨달았다.
거꾸로 내리는 눈과 뒤집힌 나무는 온데간데없었고, 서늘한 추위는 살짝 땀이 날 정도로 따뜻한 기온으로 바뀌어 있었다.
“!”
하지만 가장 놀라운 것은 따로 있었다.
“회색 사신!”
회색빛 피부를 가지고, 노랗게 빛나는 안광을 뿜어내는 한국의 특급 오브젝트!
소녀는 손아귀에 잡힌 검은 요정과 회색 사신을 번갈아 가면서 살피더니, 한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검은 요정’은 ‘검은 사신’이었구나.
그러고 보니 그 유명한 회색 사신이랑 꽤 닮았는데, 왜 눈치채지 못 한 걸까?
하지만 이상하게도 회색 사신과 검은 사신은 비슷한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아, 표정 때문이구나.
회색 사신은 어딘지 불만이 가득해 보이는 무표정.
검은 사신은 주변을 저절로 환하게 만드는 해맑은 표정.
게다가 검은 사신의 매력 포인트인 귀엽게 날카로운 이빨들까지!
회색 사신을 직접 보기 전까지는 비교해 볼 생각도 못 할 정도로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그나저나 검은 갑옷의 오브젝트가 회색 사신이었나 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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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사신의 흑색 검과 비슷한 질감의 검은 갑옷.
1m 남짓한 신장.
사라져 버린 검은 갑옷의 오브젝트, 그리고 그 자리에 대신 나타난 회색 사신.
100%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당히 개연성 있는 예측을 하기에는 증거가 충분했다.
게다가 모랫바닥에는 검은 갑옷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수많은 검은 사신들이 모래 속을 헤엄치고 있었다.
모래 알갱이를 던지고 노는 검은 사신.
모래 속을 헤엄치는 검은 사신.
그리고 모래 속에서 커다란 사람을 발굴하고 있는 검은 사신.
“어?”
검은 사신들이 발굴하던 갑옷은 소녀가 본 기억이 있었던 갑옷이었다.
개고기 아저씨 잡화점 구석에 걸려있던 엄청나게 오래되어 보이는 갑옷이었다.
“아저씨!”
소녀가 깜짝 놀라서 확인해 보자, 개고기 아저씨는 그저 잠이 들었을 뿐이었다.
소녀는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소녀 자신도 꿈속에 갇혔었으니, 아저씨의 상태는 금세 알아볼 수 있었다.
미궁의 환상 속에 갇힌 거겠지.
소녀는 어깨 위에 검은 사신을 올려두고, 검은 사신들이 뛰어노는 것을 구경하며 아저씨가 깨어나는 것을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미궁 초보인 자신도 깨어났으니, 미궁에 엄청 해박한 아저씨도 금세 일어날 거라고 믿었다.
***
‘역시 들어가야겠지.’
나는 결국 저 균열에 들어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 미궁 오브젝트는 인간을 죽이고 싶어서 안달 난 오브젝트는 아닌 것 같았지만, 충분히 인간에게 해로워 보였다.
검은 사신 갑옷 자동 사냥으로 손쉽게 돌파하긴 했지만, 1층에 나왔던 제비만 해도 너무 강했다.
보통의 사람에게 무기 좀 쥐여준다고 해치울 수 있는 수준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들어가야겠다고 마음먹자마자 그대로 손을 균열 속으로 밀어 넣었다.
공간이 마구 흔들리고 찢어지는 불안정한 균열이었다.
미니 사신도 통과하기 힘들 정도로 거친 통로였다.
통로의 상태를 확인하니 더욱 들어가기 싫어졌다.
그래도 시간을 끌면 더욱 들어가기 싫어질 것 같아서, 나는 그대로 온몸을 균열 속으로 밀어 넣었다.
***
서걱. 서걱.
불안정한 공간 속에서 물리 면역을 가진 내 피부가 마구마구 잘리고, 재생되길 반복했다.
소용돌이에 휩쓸린 인간이 이런 기분일까?
나는 거친 폭풍에 휘말린 종이배처럼 이리저리 부딪치고 뒤집히면서 공간 속을 나아갔다.
그리고 종착지에 도착하자, 그 불안정한 공간의 흐름이 멈추고 단단한 바닥에 발을 딛고 설 수 있었다.
모래로 만들어진 단단한 바닥.
별과 달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밤하늘.
그 밤하늘 아래, 아홉 칸짜리 야트막한 높이의 단상 위에 놓인 왕좌.
그리고 그 모래 왕좌와 몸이 뒤섞여 버린 채, 모래로 침식되어 버린 왕좌의 노인.
모든 것이 풍화되어 버린 모래의 왕국과 그 왕좌였다.
그리고 저 엄청난 존재감을 가진 왕좌와 노인이 미궁을 이루는 핵심인 것은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왔는가.]
그때 공간 전체에서 굉장히 지친 것 같은 의지가 느껴졌다.
수백 년 동안 한가지 목적을 위해 달려왔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한 듯한 고통이 서린 의지였다.
[그럼, 시작하지.]
그 의지가 전해져오자, 사막을 가득 채운 모래들이 천천히 모여들더니 날카로운 창으로 변했다.
그리고 천천히 나를 조준하더니, 꽤 빠른 속도로 쏘아져 왔다.
‘뀩’
나는 그 모래 창을 바라보며 공간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하지만 공간을 다루는 내 능력은 발휘되지 않고, 내 손은 허공을 움켜쥘 뿐이었다.
퍼억.
커다란 모래의 창이 내 배를 관통해 버리자, 나는 꼬치가 된 채 데굴데굴 바닥을 구를 수밖에 없었다.
거친 모래 위를 데굴데굴 구르자, 내 몸 위로 수많은 상흔이 생겼다.
‘어째서?’
배에 뚫린 구멍과 피부의 생채기는 순식간에 아물었지만, 내 머리에는 수많은 의문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어째서 공간을 절단할 수 없는 거지?
어째서 물리 면역이 작동하지 않는 거지?
교주 때처럼 능력이 봉인된 건가?
하지만 능력 봉인과는 뭔가가 다른 것 같았다.
막막한 상황에 봉착하자, 나는 습관적으로 ‘눈’을 사용해서 노인의 파괴 조건을 확인했다.
<계단을 올라 왕좌 곁에 올라선다.>
<이 세계에서 사망한다.>
그러자 내 눈은 파괴 조건 두 개를 뱉어냈다.
마치 오류 난 프로그램처럼 글씨가 서로 겹쳐서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이런 적이 없었으니까, 둘 중의 하나는 가짜라고 바로 눈치챌 수 있었다.
그리고 조건을 확인하는 순간, 왕좌가 있는 계단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한 가지였다.
나도 내 죽는 조건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장작이 다 떨어지면 죽지 않을까?’라고 예측은 하고 있었지만 확실하지 않았다.
게다가 모래 창은 위력적이었지만, 모래가 모여드는 데 상당히 시간이 걸렸다.
아무리 내 키가 작고 운동을 못해도 9칸의 계단에 올라서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작은 발바닥이 모래를 밀어내는 감각과 함께 내 몸은 빠른 속도로 앞으로 나아갔다.
벌서 계단 앞에 도착했는데도, 천천히 움직이는 모래는 모여들 기미도 없었다.
이겼다.
당장 모래 창이 날아와도, 이 정도면 올라갈 수 있어!
그렇게 첫 계단에 발을 딛는 순간, 온몸을 태우는 고통이 전신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마치 이대로 계단 위에 짓눌려 버릴 것 같은 압력이 느껴졌다.
검게 물든 두 손과 붉게 타오르는 장작.
머리 위를 확인해 보니, 하얗게 빛나는 빛의 고리가 있었다.
헤일로가 내 머리 위에 떠오른 것이다.
역시 강력한 오브젝트는 간단히 이길 수는 없는 걸까?
하지만 이 정도는 견딜만했다.
나는 이를 악물고 계단 위로 다시 한 걸음을 옮겼다.
한 칸 위의 계단에 다시 한번 발을 디디는 순간.
퍼엉.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 아아아.
두 눈이 갈기갈기 찢어진 것처럼 아팠다.
나는 두 손으로 양 눈을 쥐어뜯으며, 소리 지르는 것처럼 입을 크게 벌렸다.
아 그렇구나.
두 눈이 터져버렸어.
내 머리 위에 떠오른 두 개의 헤일로.
내 온몸은 당장이라도 폭발해 버릴 정도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사라져 버린 두 눈에서 붉은 장작이 쉬지 않고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파.
아파아파.
내가 오른 계단은 두 칸.
내 머리 위의 헤일로도 두 개.
그리고 계단은 총 아홉 개!
하, 하하하.
헤일로 아홉 개?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역시 <이 세계에서 사망한다.>가 정답이었던 거야.
헤일로가 나를 짓누르는 무게는 점점 무거워져만 갔다.
이제 더 이상 계단 위에 서 있는 것도 힘들어졌다.
장작을 모두 쏟아내면 죽지 않을까?
나는 장작을 억지로 토해내기 위해서 내 심장에 손을 박아 넣었다.
그러자 고통으로 거칠게 타오르는 장작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대로 장작을 뽑아버리려는 순간.
내 어깨 위에서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삐-!
균열 너머에서 애착 인간과 놀고 있어야 했던 패륜 사신이었다.
‘엄마 포기하면 안 돼!’
패륜 사신은 단단한 의지를 내뿜더니, 내 머리카락을 빠른 속도로 기어 올라가서 굳은 표정으로 내 머리 위의 헤일로 두 개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있는 힘껏 뛰어올라서 내 머리 위의 헤일로 하나를 붙들어서, 자기 머리 위로 옮겼다.
검은 사신에 비하면 무지막지하게 커다란 헤일로였지만, 패륜 사신이 건드리기 무섭게 헤일로는 미니 사신에게 알맞은 크기로 줄어들었다.
작은 헤일로가 머리 위에 올라간 패륜 사신은 나처럼 온몸이 찢기고, 두 눈에서 장작이 핏물처럼 쏟아지고 있었지만, 해맑게 웃으면서 의지를 뿜어내었다.
‘이제 괜찮아!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