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모래로 흩어져 버리는 모험의 끝.
하늘마저 전부 모래로 변해 무너져 내리는 순간 깨달을 수 있었다.
‘아, 환각 속의 시련이었구나.’
그리고 ‘눈’이 보여줬던 파괴 조건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미궁 오브젝트에 대한 파괴 조건이 아니라, 환각을 부수는 조건이었다.
<이 세계에서 사망한다.>가 의미하는 것은 죽음으로써 환각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는 뜻이었겠지.
그런 깨달음과 함께 환각 속에 파묻혀 있었던 의식이 떠오르기 시작하면서 환각에서 나올 수 있었다.
그렇게 잠에서 깨어나니, 나를 둘러싸고 하늘 끝까지 닿을 것처럼 높이 치솟은 소용돌이, 그리고 그 중앙에 당장이라도 모래로 풍화되어 버릴 것 같은 건물의 잔해가 보였다.
당연히 균열이 열려 있었던 흐르는 모래로 가득한 공간이나 미궁의 정육면체 방 내부 중 하나일 거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를 반겨준 것은 소용돌이와 폐허, 그리고 검은 사신들이었다.
검은 사신들이 내 배 위에 잔뜩 달라붙어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아마 환각에 들어간 나를 돕기 위해서, 소용돌이를 뚫고 들어온 거겠지.
환각 속에 개입하는 게 상당히 힘들었는지, 장작의 빛도 굉장히 약해져 있었고 형상도 조금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린 상태였다.
‘힘들었나 보네.’
나를 도와주려고 너덜너덜해진 검은 사신들을 하나씩 들어 올려서 장작을 듬뿍 집어넣어 준 뒤, 쓰다듬어 주는 동안 갑자기 색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 검은 사신이 오지 않았다면, 진작에 환상 속에서 사망해서 편해지지 않았을까?’
냉철한 나답게 매우 똑똑하고 논리적인 생각이었다.
흠.
나는 장작을 너무 잔뜩 먹여서 빵빵해진 검은 사신들을 하나씩 들어 올려서 모래 속에 파묻기 시작했다.
히히.
모래 위로 마치 식물의 싹이 돋아난 것처럼 검은 사신의 머리가 잔뜩 돋아나 있는 것을 보니 조금 재미있었다.
시련을 통과하느라 힘들었던 스트레스가 전부 해소되는 기분이었다.
검은 사신들이 깨어나면 더욱 재미있는 반응을 보여주겠지.
나는 추후의 즐거움을 남겨두고 폐허 속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다른 소리를 듣기 힘들 정도로 귓가를 끊임없이 울리는 거친 바람 소리.
태양 빛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아서 평범한 사람은 천지 분간이 힘들 정도의 어둠.
인간이라면 제대로 돌아다니기 힘든 환경이었지만, 눈에서 빛을 뿜는 나에게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환경이었다.
폐허는 꽤 넓었지만, 완전히 풍화되고 무너져 버려서 제대로 남은 구조물이 거의 없었다.
건축은 잘 모르지만, 규모로 보면 왕성처럼 거대한 건물이 아니었을까?
그런 풍화된 폐허에서 유일하게 꽤 형상을 유지하고 있던 곳이 있었다.
갈리고 풍화되어서 그 화려함은 모두 사라져 버렸지만, 그 거대한 의자의 형태는 유지 중인 왕좌.
노랗게 색이 바랬고 갈라지고 부스러져서 당장이라도 모래로 변할 것 같지만 모래로 가득한 폐허에서 유일하게 단단한 돌로 만들어진 바닥.
그리고 그 바닥을 장식하듯이, 왕좌를 향해서 길을 만들고 있는 거대한 기둥들.
마치 왕의 알현실 같은 느낌이었다.
그 왕좌 위에는 완전히 너덜너덜해진 옷을 걸치고 있는 해골이 커다란 바위 못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뼈 마디마디 전부 전혀 움직일 수가 없도록 꼼꼼하게 못 박혀 있었다.
내가 못 박힌 당사자가 아닌데도, 절로 인상이 찌푸려질 정도로 끔찍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해골의 손 위에는 하얗게 빛을 뿜어내고 있는 빛의 고리가 올라가 있었다.
이 해골이 빛의 고리를 이용해서 미궁과 시련을 만들어 낸 노인으로 보였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런 짓을 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뭔가 중요한 이유가 있었겠지?
자기 몸을 못 박아 버릴 정도로 필요한 일이었던 거겠지.
뭐, 내가 시련을 통과한 것으로 원하던 일을 성취했기를 가볍게 빌어주었다.
***
나는 천천히 왕좌 앞에 놓인 아홉 칸의 계단을 올라가서 헤일로 위에 손을 올렸다.
그 순간 헤일로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주변 현실을 잡아먹기 시작했다.
마치 폐허의 한가운데서 보이지 않는 손이 시간의 흐름을 섬세하게 되감는 것 같은 변화가 펼쳐졌다.
부스러지기 직전의 낡고 누렇게 변색된 바닥은 광택이 나는 대리석 바닥으로 변모했고, 광택이 나는 표면은 어느새 비치기 시작한 태양 빛을 과시하듯이 반사하고 있었다.
끊임없는 풍화에 굴복하기 직전이었던 기둥은 새하얀 색으로 다시 태어났고, 그 견고한 형태는 이미 잃어버렸던 위엄과 힘을 되찾았다.
하늘을 그대로 보여줄 정도로 그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던 천장은 다시 한번 그 모습을 되찾아, 그 화려한 색채의 천장화와 함께 돌아왔다.
세월 속에서 바스러져 버렸던 붉은 천이 바닥을 가로질러 진홍색 비단 강물처럼 기둥 사이를 흐르기 시작했다.
그 붉은 천은 천천히 폐허의 중심부로 이어졌고, 그 종착지는 이미 색을 잃어버린 거대한 왕좌였다.
붉은 천이 왕좌에 닿는 순간, 왕좌는 권력과 권위로 빛나던 위풍당당한 모습을 되찾았다.
그와 동시에 왕좌 위에서 침묵하고 있던 왕도 눈을 뜨기 시작했다.
살과 힘줄이 풍화된 뼈를 감싸 안았고, 화려한 왕관이 부활한 군주의 이마에 내려앉았다.
다시 태어난 왕이 회복된 왕좌에 앉아, 나를 천천히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환각!’
만약 환각 속에서 시련을 겪지 않았다면, 시간을 뒤로 돌렸다고 착각했을 만큼 존재감이 강렬한 환각이었다.
그야말로 ‘눈동자’급의 환각!
그러고 보니 환각은 부쉈어도, 미궁을 만든 오브젝트를 부수진 않았었지.
저 왕좌의 노인이 오브젝트였던 건가?
환각은 내가 눈치채지 못했으면 몰라도, 알고 있는 상태에서는 안 통한다고!
자신만만한 미소를 베어 물며 모든 능력을 무효화하는 헤일로를 불러오려는 순간, 잔뜩 갈라진 노인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왔군. 시련의 통과자여.”
왠지 적의가 없는 목소리, 그리고 성취와 후련함을 느끼는 노인의 감정.
싸울 생각이 없어 보여서 가만히 있자, 노인은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시련의 통과자여. 신의 눈동자를 넘겨주기 전에, 질문을 하나 해도 되겠나?”
“….”
어차피 나는 말을 못 해서 가만히 있었더니, 노인은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염파를 보내왔다.
[말하지 못해도 상관없네. 생각만으로도 대화할 수 있으니까 말이야.]
왠지 하기 싫다고 해도 강제로 질문을 할 것 같은 느낌이라, 가만히 있었더니 별 시답잖은 질문이 날아들었다.
[두 명의 사람이 서로서로 죽여달라는 소원을 빌고 있다고 가정해 보지.]
[둘 중 한 명은 훌륭한 명분과 타당한 이유를 가지고 소원을 빌고 있다네.]
[반대로 다른 한 명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저 분노와 질투만으로 소원을 빌고 있어.]
[만약 자네가 소원을 들어준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나는 그 질문을 듣자마자 생각했다.
‘내가 왜 그딴 걸 신경 써야 하지?’
만약 소원을 들어줄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냥 ‘무시’할 것이다.
물론, 이건 마음속에만 담아두기로 하고, 어르신에게 말할 법한 대외적으로 쓸만한 답변을 상상하던 도중, 갑자기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답이다.]
미니 사신들에게 보내듯이 염파를 쏘아 보내지도 않았는데, 노인은 마치 대답을 들었다는 것처럼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우리들은 그런 신을 원했어.]
그 순간 노인이 모래로 변해 쏟아져 내리는 것과 동시에 모든 환상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
갑자기 왜 저러는 거지?
***
‘엄마에게 도움이 필요해.’
전 세계의 미니 사신들에게 들어온 한줄기 의지.
애착 인간을 찾기 위해서 서울 탐험을 하고 있던 황금 사신도 예외는 아니었다.
황금 사신은 그 의지를 듣고, 하던 일도 멈추고 엄마를 향해 도움의 장작을 뻗었다.
엄마가 짊어진 것은 대단히 무거워서 온몸이 타오르는 것처럼 굉장히 아팠지만, 엄마를 도울 수 있어서 굉장히 뿌듯한 기분이었다.
너무 아파서 몸을 웅크리고 견디다가, 결국 정신을 잃어버렸어도 그랬다.
바닥에 몸을 웅크리고 잠든 황금 사신은 엄마를 도와주는 꿈이라도 꾸는 것인지, 헤실헤실 웃으면서 뭔가를 먹는 것처럼 입을 우물거렸다.
그렇게 행복한 꿈을 꾸던 황금 사신은 이내, 잠에서 깨어나서 눈가를 슥슥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조그마한 양팔을 양옆으로 쭉 뻗으면서 기지개!
그렇게 약간 비몽사몽인 느낌으로 잠에서 깨어난 황금 사신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살피다가, 깜짝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
여기 어디야!
분명 서울의 골목길을 걸어 다니고 있었는데, 어느새 이상한 곳으로 옮겨져 있었다.
소독약 냄새가 풍기고, 하얗고 깨끗한 장소였다.
황금 사신은 전혀 와본 적이 없었던 곳이었지만, 비슷한 장소를 하나 알고 있었다.
‘세희 연구소?’
황금 사신이 현재 있는 곳은 세희 연구소의 다른 오브젝트 격리실을 닮아있었다.
‘?’
고개를 갸웃하며 물음표를 그리는 황금 사신 앞에 세희 연구소 연구원처럼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이 나타났다.
“후. 후후. 황금 사신 격리만 성공하면! 나도 어엿한 연구소를 설립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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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일그러진 미소를 띤 여자였다.
보통은 피할법한 분위기를 풍기는 여자였지만, 황금 사신은 그 여자를 보면서 양손을 쭉 뻗었다.
‘안아줘!’
그저 인간이 좋은 황금 사신은 헤실헤실 웃으며 안아달라고 폴짝폴짝 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