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22
“감히 대 알른 백작 가문의 영애께 폐를 끼치다니!”
땅에 이마를 박은 채 자비를 청하는 루카를 보고 있자니 머리가 복잡했다.
내가 아는 루카라는 캐릭터는 이럴 녀석이 아니다.
소울 아카데미에 존재하는 몇 안 되는 흑막형 캐릭터인 이 녀석은 최후의 결전을 벌일 때를 제외하고는 결코 추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언제나 여유를 부리는 모습이야말로 이 녀석이 트롤캐릭임에도 인기를 끈 이유니까.
“이 평민 나부랭이가 주제를 몰랐습니다!”
그러니까 이건 변수였다. 게임에 존재하지 않는 변수. 좋으냐 나쁘냐를 따진다면 좋은… 좋은가?
아마 좋은 쪽이겠지. 루카가 어떤 생각으로 이러는 건지는 모르겠다만 최소한 죽을 걱정은 할 필요 없어 보이니까.
“제발! 제발 목숨만 부지시켜 주십시오!”
근데 얘 진짜 왜 이러는 거야? 이해가 안 되네.
베네딕이 그렇게 위협…적이지.
나와 가까운 사람들의 영향력이 그렇게 크…긴 하네.
내가 실종되었을 때 루카가 연관될 가능성이 높…잖아?
뭐지? 얘 왜 날 납치한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좆되는 요소밖에 없는 것 같은데.
아냐. 상대는 소울 아카데미에서 수많은 트롤링으로 유저의 입에서 곡소리를 만들어 낸 놈이라고.
날 여기로 데려왔다는 건 나름의 계획을 짜두고서 움직였다는 소리일 터. 루카의 성격을 고려해보면 이런 상황도 분명 염두해 두고서 왔을 텐데.
루카의 의중이 이해가 되지 않아 고민을 거듭하던 중 문득 한 가지 가정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설마 얘 메스가키 스킬한테 도발 당한 건가? 이성을 잃어버리고 무작정 일을 저질러 버린 거야?!
그렇게 가정을 해보니 지금의 상황이 이해가 됐다.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무작정 움직인 거라면 루카도 답이 없다.
어쨌든 내 뒤에 도사리는 세력은 상당하니까.
당장 알른 가문과 파트란 가문 둘만 뭉쳐도 루카에게는 충분한 위협이다.
아무리 이 녀석이 이리저리 인맥이 넓다 하더라도 루카 본인 자체는 평민 출신의 교수일 뿐이니 말이다.
만약 이 가정이 옳다면 지금 난 말 한 마디로 루카의 인생을 박살내는 게 가능한 갑 중의 갑인거 아냐?
순간 마음이 들떴지만 난 바로 입을 여는 대신 할배를 불렀다. 내 생각이 옳은지를 검증하기 위해서.
<네 생각이 옳을 듯 하구나.>
‘그쵸?!’
완벽한 갑이 되었음을 확인하고 환호성을 지르는 와중에도 루카는 계속해서 비굴한 말을 내뱉었다.
“무어라도 하겠습니다!”
무엇이든 하겠다니. 이 정도면 제발 갑질을 해달라고 비는 수준 아냐?
루카! 너 사실 여자아이한테 명령당하고 싶은 욕구가 가득한 변태였구나!
하여튼. 주신부터가 변태라 그런가 이 세상에 변태가 가득하다니까.
쓸 구석이 넘쳐나는 노예를 바라보며 히죽거리고 있으려니 할배가 헛웃음을 흘렸다.
<무얼 할 생각인지는 모르겠다만 아카데미로 돌아가 네 호위를 부르고 나서 일을 진행하거라. 그래서 안전할 테니.>
‘넵! 알겠습니다!’
그것도 그렇네요. 여기서 갑질을 하다 루카가 훼까닥 돌아버리면 루카의 인생은 끝나겠지만 내 인생도 끝날 테니까.
‘루카. 일단은…’
“페도 교수. 사죄 받는 사람을 길바닥에 세워두는 게 맞아? 풉. 어린 나도 아는 걸 모르다니. 완전 어른 실격~”
“…그렇군요! 일단 아카데미로 돌아가겠습니다!”
루카가 사용한 것은 순간이동 마법이 담긴 스크롤이었다.
그 마법은 우리를 순식간에 루카의 교무실로 데려다 주었지만 여느 때처럼 극심한 멀미를 동반했다.
“저. 알른 영애? 다른 분을 데려오는 건.”
내가 칼을 데려오겠다고 말하니 루카가 곤란한 기색을 드러냈다.
‘싫으세요? 그럼…’
“싫어? 그럼 나 그냥 바보 아버님한테 가서 이야기한다? 변태 교수가 나한테 최면을 걸고 이상한 일을 하려고 했다고.”
“예?! 아니 그건.”
‘왜요? 틀린 말 아니잖아요?’
“네가 한 일만 이야기한 거잖아? 뭐야. 찔려? 뭐 이상한 생각이라도 했나 보지? 푸하핫. 구제 불능의 페도 변태구나?”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허나 을의 위치에 선 루카는 갑의 횡포 앞에서 무력했다.
게임 속에서는 항상 여유로운 체 하던 녀석이 부들거리는 꼴을 보고 있자니 절로 웃음이 지어지네.
하. 내가 게임을 할 적에 이루지 못했던 꿈을 빙의하고 나서야 이룰 수 있게 되다니.
신앙심이 차오르는 게 느껴진다.
처음에는 이 퀘스트를 내어 준 주신님께 감히 망발을 부렸지만 지금은 아냐.
분명 주신님께서는 바로 앞 밖에 보지 못하는 어리석인 사도와는 달리 이런 미래를 내다보셨던 거겠지.
루카. 너는 모르겠지만 난 너한테 아주 많은 원한을 지니고 있단다.
네가 개 같은 퀘스트만 만들어주는 바람에 새로 키워야 했던 캐릭터가 몇이나 되는 줄 아니?
당연히 모르겠지.
걱정 마. 나도 정확하게 알지는 못하니까. 그걸 일일이 세고 있기에는 시행횟수가 너무 많았거든.
근데 첫 최고점 캐릭터를 만들 때 얼마나 많은 캐릭터를 지웠다 만들었는지는 기억해.
159.
공략을 위해 정리해 두었던 내 엑셀 시트지 마지막에 자리한 숫자.
이 짓을 수십 번은 반복했으니 너 때문에 사라진 내 캐릭터는 수천에 달하겠지.
알겠어? 루카 네가 지닌 원한은 나 하나의 것이 아냐.
너 때문에 사라져야 했던 수천 개의 캐릭터의 원한이야!
각오해! 철저하게 갑질을 해 줄 테니까!
칼은 새벽에 호출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아가씨의 부름이라면 당연히 움직여야죠! 라는 말과 함께 바깥으로 나왔다.
루카가 벌인 일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주지는 않았다.
시험이랍시고 귀족 영애를 납치해 죽을 지도 모르는 장소에 떨어트린 것. 그리고 그 죄를 감추지 위해 정신을 건드리려 한 것. 어느 쪽이건 대죄라 불러 마땅한 일이다.
이런 일을 칼이 듣는다면 당장에 검을 뽑아들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난 루카는 칼에게 이렇게 소개했다.
‘인사하세요. 칼…’
“허접. 인사해. 네 허접 후배인 허접 변태야.”
“후배…입니까?”
대충 내 대단함을 깨닫고 날 따르기로 맹세할 예정인 녀석이라는 이야기를 했더니 칼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가씨의 위대함을 아는 사람이 늘어나는 건 기쁜 일입니다만 허접 후배라니.”
내 생각에 그건 분명 질투와 견제의 표정이었다. 칼은 자신이 하나 뿐인 허접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분명 처음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겉도 속도 멀쩡한 녀석이었는데.
“저어. 알른 영애? 허접 변태라니요. 저희는 아직 아무런 협의도 하지 않았을 텐…”
“변태란 사실에 자부심이 넘치나 보네♡ 알겠어. 난 착하니까 바꿔 줄게. 어디 보자~ 페도 변태♡ 역겨운 로리콘♡ 마조 쓰레기♡ 중에 마음에 드는 거 있어?♡ 바란다면 전부 다 합쳐줄 수도 있어♡ 어때? 나 정말 친절하지 않아?♡”
“허접 변태로 하겠습니다.”
내가 바꾸고 싶다고 호칭을 바꿀 수 있는 건 아니지만 허접 변태가 마음에 든다니 걱정할 필요는 없겠네.
루카의 교무실로 돌아온 난 우선적으로 루카에게 맹약을 강제했다.
이것이 루카의 목줄이 되어줄 것을 확신했기 때문에.
음지에서 살 작정을 한 인간에겐 맹약이 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불명예를 신경 쓰지 않으니까.
허나 루카는 다르다. 인재를 세공하는 것을 업으로 삼은 그에게 타인의 신뢰를 사는 것은 아주 중요한 요소다.
그런데 맹약을 어겨서 그 흔적이 남게 된다면?
아카데미에서 쫓겨나는 것은 물론 여러 인재들에게 경멸을 사 말을 거는 것도 버겁게 되겠지.
그러니 루카는 맹약을 어기지 못한다. 그건 자신의 인생을 부정하는 길이니까.
맹약의 조건은 할배의 도움을 받아 상당히 까다롭게 달았다.
상세한 내용은 꽤 길었지만 그 내용을 요약하면 이랬다.
1. 날 해치지 않을 것.
2. 내가 시키는 바를 따를 것.
3. 날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
사실상 노예 계약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 끝난 후 나는 루카에게 첫 번째 명령을 내렸다.
지금 네가 나에게 줄 수 있는 시련에 대해 보고하라고.
그러자 루카는 시간을 달라고 부탁했다.
지금 바로 이야기를 할 수도 있지만 그러면 빠지는 부분이 생길 거라고. 서류를 정리할 시간을 준다면 최선을 다해 보고서를 만들어 제공하겠다고.
“일주일 정도만 주시겠습니까?”
여기서 제대로 된 갑이라면 일주일은 무슨! 3일안에 끝내! 라고 외쳤겠지만 난 차마 그럴 수 없었다.
과거 클라이언트에게 고통받았던 과거가 떠올라서 불가능했다.
이게 바로 영혼에 새겨진 을의 흔적인가. 을로 평생을 살던 기억이 있어서 그런가 도저히 완벽한 갑이 되는 게 불가능해!
어쨌건 저 보고서가 만들어지기 전까진 무언가를 부탁할 수 없었다. 리스트를 보고 제일 효율적인 걸 고르고 싶었으니까.
당장 할 일도 없겠다. 기숙사로 돌아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순간 루카가 나를 붙잡았다.
“계약에 따라 미리 말씀 드려야 하는 게 있어서 말입니다.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뭔데요?’
“뭔데.”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아카데미 평민 집단 사이에서 영애의 평판이 좋지 않단 겁니다.”
평민 집단이 무엇인지는 안다.
귀족들로 가득한 아카데미에서 살아남기 위해 평민이 뭉친 곳.
이야기만 들으면 좋은 단체일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저기는 일종의 군대다. 평민들이 살아남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는 핑계를 대며 윗 학년이 아랫 학년을 종처럼 부리는 곳 말이다.
아카데미에서 생활하는데 나름 도움은 되지만, 넘쳐나는 악폐습이 장난이 아니라 도저히 좋은 말을 해줄 수 없지.
근데 거기서 내 평판이 나쁘다는 건 무슨 소리야? 루시의 평판은 원래 나쁘잖아?
고갤 갸웃거리던 나는 페이비의 편애를 받는 게 마음에 안 드는 것 같다는 루카의 설명을 듣고서 납득하고 말았다.
으음. 그러니까 일종의 질투 같은 건가.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겠네. 그 쪽에서 시비를 걸면 박살내주면 그만이니까.
“다른 하나는 2왕자님께서 어떻게든 알른 영애를 끌어들이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인간 포기 안 했어?! 말 안 걸 길래 그냥 포기한 줄 알았더니 아니었던 거야?!
으으. 제발 2왕자가 신경 꺼 줬으면 좋겠다.
내가 걔를 병신 왕자라고 불렀을 때 어떤 일이 생겨날지 보고 싶지 않단 말이야.
*
루카가 이야기한 두 가지 위협 중 하나가 이빨을 드러낸 것은 루카와 맹약을 한 후로 5일이 지났을 무렵의 이야기다.
나는 두 폭탄 중에서 2왕자가 먼저 나를 찾아올 것이라 생각했다.
그 근육 바보는 한 번 결정 내리면 행동에 거침이 없으니까.
허나 내 예상은 틀렸다. 아무래도 평민들이 내게 가진 질투가 생각보다 컸던 모양이다.
“아가씨. 혹시 수강신청서를 제출하지 않으셨습니까? 그 쪽 교수분이 아가씨의 신청서가 안 보인다고 해서 말입니다.”
그 시작은 아주 자잘한 괴롭힘에서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