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희 연구소 깊숙한 곳.
꽤 오랫동안 주인이 없던 쓸쓸한 격리실에 주인이 돌아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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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까지만 해도 왠지 모르게 텅 빈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던 격리실이 오랜만에 가득 찬 것처럼 느껴졌다.
격리실에는 언제나 수많은 미니 사신이 머물고 있어서 비어있던 것도 아니었고.
회색 사신이 딱히 시끄럽거나 몸집이 큰 것도 아니었지만, 예린이 느끼기에는 확실히 그랬다.
옴뇸뇸.
회색 사신은 굉장히 피곤한 표정으로 예린이 품에 푹 안겨서, 팝콘을 집어 먹으면서 TV를 보고 있었다.
[자세한 조사 결과, 흔적조차 남지 않고 사라졌던 실종자 중 상당수가 붉은 번개의 섬에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일본 오브젝트 협회에서 섬에서 발견된 실종자들은 여러 가지 조사와 건강 검진 등을 마친 뒤 가족들의 품으로 돌려보낼 예정이라고 발표했습니다.]
TV에서는 얼마 전까지 회색 사신이 있었던 붉은 번개의 섬에 대해서 떠들고 있었다.
직접 붉은 번개의 섬에 들어가서 겪었던 당사자면서, 회색 사신은 묘한 호기심을 가진 채, 계속 뉴스를 보고 있었다.
[특급 오브젝트, 붉은 번개의 섬의 생존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일종의 미션을 수행하는 방향의 오브젝트였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일본에서는 이것을 일종의 미궁 도시라고 설명했습니다.]
미궁 도시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 예린의 입속에 숨겨져 있던 회색 사신의 더듬이가 즐거운 것처럼 좌우로 살랑거리기 시작했다.
[일본 오브젝트 협회는 붉은 번개의 섬을 미궁 도시 관광지로 개발하기에 앞서, 섬의 오브젝트 지정을 해제했습니다.]
[겨우 일주일 만에 내린 결론이라, 국내 오브젝트 전문가들은 물론 일본 내부에서도 성급한 판단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뉴스에서 미궁 도시를 관광지로 만든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 거친 풍랑 속에서 살랑거리는 해초처럼 회색 사신의 더듬이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마치 맛있는 푸딩을 먹었을 때처럼 흔들리는 더듬이를 느끼면서, 예린은 나중에 미궁 도시가 오픈하면 회색 사신이랑 같이 찾아갈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세간에서는 위험할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예린은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제까지 사신이가 다녀간 곳은 대부분 오브젝트로부터 안전해졌으니, 꽤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붉은 번개의 섬을 파괴한 것으로 보이는 회색 사신이 갑자기 일본으로 간 이유는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일본의 오브젝트가 잔뜩 나오고 있던 뉴스였지만, 어느새 화면이 바뀌어 회색 사신을 비추고 있었다.
거대한 소용돌이가 사라져 버리고, 그 사이에서 나타난 회색 사신의 모습을 촬영한 영상이었다.
섬을 둘러싼 구름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자마자 보낸 드론이 찍은 영상이라 화질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회색 사신이라는 것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영상이었다.
영상 속의 회색 사신은 온몸을 검은 사신들에게 깨물리고 있었다.
물론 지금 격리실에서 쉬고 있는 회색 사신의 몸에도 검은 사신들이 잔뜩 달라붙어 있었다.
날카로운 이빨을 이용해서 마치 빨판상어처럼 회색 사신에게 달라붙은 검은 사신들이었다.
도대체 회색 사신이 어떤 장난을 쳤길래, 이렇게 오랜 시간 깨물리고 있는 거지?
회색 사신이 붉은 사신으로 변신해서 주황 사신의 머리카락에 불을 붙였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회색 사신이 아프진 않을까 해서 검은 사신의 발을 잡고 잡아당겨 봤지만, 예린의 힘으로는 떼어놓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단단히 깨물고 있었다.
마치 회색 사신에게 몹시 화났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만 같았다.
***
참새가 지저귀는 소리.
따뜻한 침대의 온기.
맛있는 토스트의 식욕을 돋우는 향기.
‘평범한 아침’의 요소들이 침대 위에 누워있는 소녀에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소녀는 이미 잠에서 깨어나 있었지만, 이 행복한 분위기를 조금 더 느끼기 위해서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하지만 이불 속에서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는 하얗고 노란색의 눈동자가 있었다.
삐-!
마치, 어서 일어나라는 것처럼 작게 우는 검은 사신이었다.
매번 아침마다 깨우는 검은 사신이 괜히 얄미워서, 소녀는 이불 속의 검은 사신을 집어 들고는 마구 간지럽히기 시작했다.
“에잇!”
소녀가 간지럽히는 게 간지러운 건지, 아니면 소녀가 자신이랑 놀아주는 것이 즐거운 건지, 검은 사신은 소녀의 손아귀에서 그저 해맑게 웃었다.
그렇게 이불 속에서 검은 사신과 뒹굴다가, 잠에서 완전히 깨어버린 소녀는 머리 위에 검은 사신을 올려놓고 침대에 앉아서 멍하니 창문 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구경했다.
이런 일상적인 풍경을 멍하니 볼 때, 소녀는 가장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여기는 미궁이 아니구나.’
‘일상, 그리고 집이구나.’
이런 안심감이 드는 것이다.
미궁 도시에서 나와서 일본으로, 일상으로 돌아온 지 꽤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방에 누워서 잠들 때면 ‘미궁 도시’에서 갑자기 깨어날 것 같은 기분이 자주 들었다.
겨우 3개월 정도 미궁 도시에 갇혀있었던 소녀도 이런 데, 1년 혹은 10년씩 있었던 사람들은 어떤 기분일지, 소녀는 상상하기도 힘들었다.
이미 사회로 나온 소녀와 달리 아직 다른 미궁 도시의 피해자들은 사회로 나오지 못했다.
사회의 규칙에서 너무 동떨어진 생활을 해온 모험가들이었기에 검사해야 할 것이 많다고 들었다.
모험가들은 법률 같은 규칙이 익숙하지 않고, 힘으로 해결하는 일이 잦았으니 말이다.
게다가 미궁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모험가’들은 소녀가 보기에도 평범한 인간과는 격이 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마 소녀도 미궁을 많이 클리어했다면, 아직도 잡혀있지 않았을까?
소녀가 모험가들의 사회 복귀에 대해서 자세히 알게 된 것은 ‘개고기 아저씨’ 때문이었다.
아저씨가 언제쯤 사회로 나오는지 알아보려고 간단하게 사람들에게 물어본 것이다.
하지만 소녀가 알아본 바에 따르면 아저씨가 사회로 나오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현재 생존한 모험가’ 중에서 가장 많은 층을 돌파한 사람.
섬에 납치된 지 거의 15년.
아저씨는 사회에 빨리 나오기 힘든 조건들만 잔뜩 가지고 있었다.
빨리 아저씨도 일본에서 보고 싶은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차가운 창문에 손을 대서 냉기를 느끼며 밖을 내다보고 있었더니, 때마침 밑에서 엄마가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서 내려오렴!”
“네!”
소녀는 검은 사신을 팔찌로 바꿔서 손목에 차고, 활기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평범하고 행복한 일상의 시작이었다.
***
미니 사신들이 잠든 깊은 밤, 이른 시간에 TV를 보다가 잠들어버려서 그런지, 너무 빨리 잠에서 깨어나 버렸다.
우물우물.
뭔가 씹는 느낌이 들어서 뺨을 만져보니, 검은 사신이 여전히 달라붙어 있었다.
‘아직도 붙어있네.’
검은 사신들이 엄청나게 작고 규칙적인 소리로 ‘삐이-.’ 거리는 걸 보면 자는 게 분명한데, 나를 단단히 물고서 놓지 않고 있었다.
유령화를 사용하면 손쉽게 떼어낼 수 있겠지만, 그럼 더 화를 내겠지.
겨우 모래에 파묻었다고 이렇게 오랫동안 화를 내다니!
평소에는 푸딩 하나면 화를 풀던 아이들이었는데, 사춘기인가?
뚜방뚜방.
검은 사신들을 잔뜩 매달고 세희 연구소 안뜰에 도착하자, 달빛 아래 은은하게 빛나는 풍경이 나를 반겨주었다.
하얀 마시멜로가 깔린 바닥, 미니 TV가 놓인 탁자, 내 전용으로 만들어진 의자가 형형색색의 달빛을 받아 신비로운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 빛을 따라 하늘을 올려다보니, 하늘 위에는 온갖 색들의 달들과 선명하게 보이는 빛의 고리가 3개 있었다.
나는 하늘로 손을 뻗어, 이번에 얻은 헤일로를 내 손안에 소환했다.
미궁 도시에서 얻은 헤일로였다.
헤일로의 능력은 노인이 보여줬던 것처럼 환영과 환각을 다루는 능력이었다.
하지만 ‘눈동자’이니 만큼 평범한 오브젝트와는 궤를 달리하는 출력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속을 정도의 강력한 환상을 만드는 것을 넘어서, 세계를 속이는 수준이었다.
일본에 갑자기 생겨난 섬이나 미궁 도시의 수많은 아이템처럼 평범한 물질들을 환상으로 만들고, 그것을 현실로 구현할 정도의 능력이었다.
그야말로 신의 능력으로 생각되는 ‘창조’에 가까운 힘이었다.
물론 한계는 명확했다.
내가 겪었던 아홉 계단의 시련처럼 격이 높은 물질은 만들지 못하고, 환각으로만 다룰 수 있었다.
뭐, 그래도 상당히 훌륭한 능력인 것은 분명했다.
내가 이 훌륭한 능력을 얻고 처음 한 생각은 ‘푸딩을 잔뜩 만들 수 있겠네!’ 였지만, 그런 행복한 생각은 금세 파기되었다.
겨우 푸딩을 먹으려고 헤일로를 머리에 쓰는 건 수지가 안 맞아.
인간 시절로 치면 몸에 불을 붙이고, 푸딩 하나 받겠다고 하는 셈이다.
하지만 즐거운 장난을 치기 위해서, 헤일로를 쓰는 건 고려해 볼 만했다.
아직은 재미있는 장난이 생각나지 않았지만, 현실을 속이는 환상이라면 정말 즐거운 장난을 칠 수 있겠지.
히히.
***
오도독. 오도독.
격리실에 갇힌 황금 사신이 딱딱한 사료를 갉아먹고 있었다.
싸구려 사료라서 딱딱하고 별로 맛은 없었지만, 황금 사신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그야, 애착 인간이 자신을 구경하고 있었으니까!
딱딱한 사료를 갉아먹듯이 조금 뜯어서 냠냠 먹고, 유리 너머에서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애착 인간을 쳐다보았다.
애착 인간의 관심과 함께라면 황금 사신은 뭐든지 즐겁고, 맛있었다.
황금 사신을 납치해서 가둬둔 여자는 사료를 먹는 황금 사신을 빤히 쳐다보면서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얌전하네?”
황금 사신을 격리하기 위해 만든 온갖 설비들이 무의미해질 것 같아서, 여자는 조금 아쉬움을 느끼고 있었다.
제대로 된 격리 성과를 내야지 제대로 된 연구소가 될 수 있을 텐데!
현재 갖춰둔 시설은 전부 위험한 동업자가 마련해준 것들이라서, 여자 입장에서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
그렇게 위험한 녀석들인 줄 알았더라면, 절대로 동업하지 않았을 텐데….
사실 황금 사신을 잡기 전까지는 해부 실험까지 하려고 준비해 뒀지만, 해맑은 얼굴로 싸구려 사료를 갉아먹는 모습을 보니 차마 그런 짓까지는 할 수 없었다.
“하, 어떻게 해야 하지?”
여자가 그렇게 중얼거리는 순간,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쿵쿵쿵.
거의 문을 주먹으로 부술 기세로 내려치는 난폭한 소리가 들려왔다.
연구소는 방음이 잘돼서 말소리까지 들리지는 않았지만, 분명 ‘당장 문 열어!’ 따위의 소리를 지르고 있겠지.
“윽.”
여자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원래부터 창백하던 안색이 더욱 창백해졌다.
얌전히 사료를 먹고 있던 황금 사신도 자리에서 일어나서 소리가 난 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