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23
일 자체는 단순했다.
내가 제출했던 종이의 누락.
평범하게 생각해보면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분실을 했을 뿐이라 봐도 되겠지.
아직 수강신청 기간이 끝난 것도 아니기에 다시 적어서 제출하면 그만인 일이었지만 얼마 전 루카에게 평민들이 날 미워한단 이야기를 들어서 그런가 이 작은 일이 마음에 걸렸다.
자그마한 의심은 하루가 지나감에 따라서 점차 커져 갔다. 여러 사소한 일들이 이어진 것이다.
점심 때 먹으려던 음식이 타서 나온다던가. 갈 이유도 없는 곳에 불린다던가. 내가 애용하는 의자에 앉자마자 의자가 부서진다거나.
이런 이들이 겹치고 겹치다보니 저녁 무렵이 되었을 무렵에는 지금의 나와 관계없어야 할 게임 속 평민 스토리가 떠오를 지경이었다.
그래서 나는 처음으로 되돌아가기로 했다.
수강신청 서류의 누락부터 말이다.
소울 아카데미에서는 평민 학생들을 위한 일자리를 내어주고 있다.
사람이 부족해서 그런 것은 아니고 소울 아카데미에 재직하는 평민 중에서 재정적인 문제가 있는 이를 돕기 위함이다.
여러 귀족 자제들이 주축이 되는 아카데미와 인근 거리의 물가는 일반적인 평민들이 버틸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따로 장학금이 주어진다고 하지만 그것으로는 삼시세끼를 먹는 것조차 빠듯한 게 현실.
무언가 장비 하나라도 사게 되면 일주일을 굶을 각오를 해야 하니. 지원을 받지 못해 장학금만으로 살아야 하는 평민 학생들은 항상 가난을 껴안고 살아야 한다.
아카데미는 이런 학생들을 위해 일자리를 준비해 두었다. 그것도 어지간한 일자리보다 훨씬 더 좋은 조건을 지닌 일자리를 말이다.
다른 곳에 비해 일도 편하고 보수도 좋은데다가 아카데미 생활에 도움이 되는 여러 요소도 존재하기에 평민 학생들은 굳이 바깥으로 나가지 않고 아카데미 내에서 일을 한다.
당연하게도 아카데미는 학생들에게 전문적인 일을 시키지 않는다. 저들이 하는 일은 대부분 단순하고 귀찮은 서류 작업 같은 거지.
예를 들자면 수강 신청 서류를 정리하는 것 같은 일 말야.
<너무 비약적인 논리인 것 같구나. 그저 오늘 하루 불행이 이어졌을 지도 모르는 일 아니냐.>
‘저도 알아요. 그렇지만 한 번 눈으로 확인해 보려고요.’
나도 할배처럼 생각한다. 보통이었다면 오늘 뭐라도 꼈나하고 말겠지.
그렇지만 이렇게 과민반응을 하는 이유는 게임 속 퀘스트에 비슷한 내용이 존재한 탓이었다.
소울 아카데미에서 평민 캐릭터를 고르고 게임을 진행하다보면 고학년들의 괴롭힘을 마주하게 된다.
자잘한 것부터 꽤나 큰 것까지. 이 괴롭힘에 저항하고 싸우는 게 평민 캐릭터 초반부의 내용이지.
그 시작을 알리는 것이 바로 수강신청서의 누락이었다.
비슷하지 않아? 수강신청서의 누락을 알게 된 순간부터 이어진 불행이라니 말이야.
이게 쓸데없는 걱정이라면 좋겠지만 만약 내 추측이 정확하다면. 어느 미친놈이 제 주제를 모르고 나를 건드린 것이라면.
자신이 건드린 사람이 누구인지 알려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행정업무를 총괄하는 교수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용무를 알아차리고 말을 꺼냈다.
“알른 영애. 수강신청 서류 때문에 오셨습니까?”
내 악명을 잘 아는 듯 교수가 굽신거리는 동안에 난 뒤편의 학생들을 살폈다.
칸막이 뒤에서 고갤 숙인 채 서류에 집중하고 있는 남자 하나. 내가 앞에 있어서 안절부절 못 해 하는 여자애 하나.
이 둘의 얼굴은 내게 익숙했다. 아카데미 내 여러 퀘스트를 진행하다 보면 자연스레 행정실에 들릴 일이 많거든.
여자애 쪽은 이름이 부여되어 있을 정도로 비중이 있는 애이기도 하고.
“정리를 위해 확인을 하다 깜짝 놀랐답니다. 영애께서 서류를 안 내시다니.”
‘저 분명 제출했었는데요.’
“띨빵 교수. 난 서류 제출했거든? 날 너 같은 멍청이로 생각하지 말아줄래?”
“…그랬습니까? 죄송합니다. 중간에 누락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내가 서류를 제출할 때 행정 교수는 그 때 자리에 없었다. 그걸 알면서도 굳이 행졍 교수를 먼저 지적한 것은 자연스럽게 다음으로 넘어가기 위함이었다.
‘이 여자애한테 줬어요. 그쵸?’
“이 멍청한 꼬마한테 줬단 말야. 야. 꼬맹이. 기억 하지?”
자기보다 작은 아이에게 꼬맹이란 소리를 들은 벨마는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허둥지둥거렸다.
그녀의 심약한 성격을 알고 있는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대답을 기다렸지만 그녀는 얼굴을 창백히 물들인 채 식은땀을 흘릴 뿐이었다.
“제가 기억합니다.”
그 기다림의 끝에 대답이 튀어나온 것은 여자애의 뒤편이었다. 서류 작업을 하고 있단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목소리를 낸 것이다.
“영애께선 수강신청 시작 날에 방문하셨습니다.”
“비츠. 그게 정말이니?”
“예. 분명합니다. 알른 영애께서는 자연스레 눈길을 사로잡으시는 분인지라. 잊을 수가 없죠.”
남자의 말이 이어짐에 따라 푸르죽죽해졌던 벨마의 얼굴이 이제는 검은 색으로 물들었다.
그를 보고 있던 나는 화를 내야 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아니. 게임 속 CG니까 묘사가 과장됐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진짜 얼굴색이 저렇게 변하는 거야?! 얘 반응 재밌네. 놀리기 좋게 생겼어.
“벨마. 너도 기억하고 있잖아.”
“ㅇ…아. 저. 그게. 그러니까.”
간신히 평정을 되찾은 난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기시감을 느꼈다.
“설마 잃어버린 거야?”
게임 속 대사랑 거의 비슷하네. 대본을 읊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렇다는 건 내 추측이 옳았다는 이야기인가.
이야. 설마 귀족으로 스타트를 했는데 평민 쪽 스토리라인에 참여하게 될 줄은 몰랐어.
“벨마. 비츠의 말이 정말이니?”
비츠의 추궁이 끊어지기 무섭게 행정 교수가 말을 이어 받는다.
저가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이번 일은 벨마 개인의 실수다.
이 어리숙해 보이는 여자애가 서류를 잃어버렸고 그것 때문에 혼날까 무서워 입을 다물고 있었다.
“…으. 그게. 그.”
“가벼운 일이 아니야. 벨마.”
“정말 죄송합니다. 알른 영애. 아무래도 중간에 실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평범한 귀족이라면 저들의 의도에 넘어갔을 것이다. 어리숙한 평민이 실수를 저질렀다 생각하고 말겠지.
좋은 사람이라면 다음번엔 이러지 말란 소리를 할 것이고 혹여 화가 난 사람이 목소리를 높일 수도 있겠지만 그 중심은 벨마가 될 뿐. 행정교수나 옆의 남자아이는 관리를 제대로 하란 소리를 듣고 말았을 것이다.
여긴 소울 아카데미 내부니까. 일단 겉으로나마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교칙을 정해둔 곳이니까. 귀족의 지위로 저들의 목을 날리는 게 불가능하니까.
허나 나는 평범한 귀족과는 거리가 멀다. 모든 신분으로 소울 아카데미에 스토리를 보았던 썩은물이지.
당연하게도 이들의 뒷사정에 관해서도 잘 알고 있다.
평민 집단에 속했다 한들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다 같은 평민은 아니다.
귀족도 함부로 대하기 어려운 거상과 하루 먹고 사는 걸 걱정해야하는 농민이 어찌 같은 평민일 수 있겠는가.
이러한 차이는 아카데미 평민 집단에서도 똑같이 드러난다.
나름 좋은 집안에서 태어난 이들. 교양이 있는 이들. 어딘가 특출난 부분이 있는 이들. 이런 사람들은 평민 집단 내부에서 우대 받으며 모두들 좋은 관계를 형성하려 한다.
허나 이와 반대되는 사람들은 다르다. 그들은 차별 받는다. 귀족이 평민을 혐오하는 것보다 더 심하게. 너 따위가 있기에 평민이 무시당하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괴롭힘에 노출되지.
벨마의 케이스가 그러했다. 농민의 아이로 태어나 운 좋게 소울 아카데미에 입학한 그녀는 멸시와 괴롭힘의 대상이 되었다.
게임 속에서 서류가 누락된 것은 벨마의 잘못이 아니었다.
같이 일하는 평민 남자가 그를 명령했고 벨마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따랐다.
그리고 친구를 배신한 나쁜 년이 되고 말았다.
그 동안 행정 교수는 뭘 했냐고?
아카데미에서 일을 하는 평민 학생 중에는 그대로 소울 아카데미에 재직하는 케이스가 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행정 교수가 그런 사람이다.
학창 시절 이 곳에서 일을 하다 그대로 직원이 되어 행정 교수가 된 그는 아카데미 내 평민 집단 내부의 상황에 훤했고, 평민 집단에서 벌이는 일에 여러 도움을 주곤 했다.
게임 속 서류 누락 사건 때도 그랬다.
남자가 교수에게 미리 양해를 구했고 교수가 그를 허락했기에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지.
이번에도 그럴까?
아직은 모른다.
마음속으로는 반쯤 확정짓고 있지만 뚜렷한 증거가 나온 것은 아니니.
게임의 스토리와 다른 식으로 흘러간 경우를 수도 없이 보았던 나는 짐짓 확정을 짓고 행정 교수의 얼굴을 후려치지 않았다.
만에 하나 이 사람이 무고하다면 조금이나마 올라갔던 평판이 다시 바닥을 칠 게 분명하니까.
다른 사람들은 그렇다치고 내 주변 사람들에게는 폭력이 정당했다고 인정할 만한 사유가 있어야하지 않겠어?
난 조이가 날 경멸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아!
“정말 죄송합니다. 영애.”
“이를 어찌 사과드려야할…”
“너희는 너네 목소리가 좋다고 생각하나 봐?♡ 듣고 있으면 귀에 저주가 걸리는 느낌이거든?♡”
“…예?”
“재잘재잘 시끄러우니까 닥치라고♡ 이것도 이해를 못 하다니 혹시 지능이 고블린보다 낮은 거야?♡ 생긴 건 고블린보다 못하긴 한데♡”
직설적인 매도에 두 사람이 입술을 떨었지만 그렇다고 화를 내지는 못했다. 우리 사이에는 격의 차이가 분명히 존재했으니까.
시끄러운 소음을 없애버린 나는 허벅지 위에 수채화를 그리는 벨마의 턱을 잡아 강제로 고개를 들게 만들었다.
“생긴 것부터 띨빵해 보이는 꼬맹이네♡ 푸훗♡”
메스가키 스킬의 도발은 절대적이다. 나보다 한참 강한 상대에게까지 먹히는 이 도발은 무생물마저 열이 받아서 나를 볼 수밖에 없도록 만들지.
“이딴 게 어떻게 아카데미에 들어온 거야?♡ 아무리 개허접 아카데미라지만 이건 좀♡”
그렇다면 소심한 여자애에게 도발을 걸면 어떻게 될까.
“아카데미에 합격한 다른 사람들한테 사과해♡ 저 따위가 여러분들과 똑같은 장소에 있어서 죄송하다고 사과해♡”
겁을 먹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대뜸 울음부터 터트리고만 이 아이를 도발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종이 하나 제대로 못 챙기는 띨빵이가 아카데미에 다녀서 미안하다고 자퇴로 사죄해♡”
“저는 실수 같은 거 하지 않았어요! 전!…”
벨마의 입에서 우느라 쉬어버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녀는 자신이 소리치고도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지만 그거면 충분했다.
아무래도 여기는 게임 스토리랑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