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29
<드디어 미쳐버린 게냐?>
내 이야기를 들은 할배가 처음으로 내뱉은 말은 내가 제정신이 맞는지에 대한 의심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2왕자를 병신왕자라고 부르는 게 어떻겠느냐는 이야기를 내뱉은 거니까.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왕족을 모욕했다며 단두대에 올라가도 이상하지 않은 일.
허나 나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지 않은가. 루시 알른이라는 인간은 이전부터 수도 없이 이러한 짓을 저질러 왔다.
현왕에게는 가축이라는 소리를 내뱉었고, 유력한 왕위계승자인 1왕자를 향해선 음침한 스토커라는 모욕을 가했으며, 3왕자에겐 불쌍하다며 그의 콤플렉스를 건드리는 말을 했지.
이 모든 일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루시는, 나는 여전히 이 곳에 서 있었다. 목이 베이기는커녕 수많은 귀족들이 모인 한 가운데에 당당히 얼굴을 내비쳤다.
이제 와서 2왕자에게 병신왕자라고 한들 무엇이 달라질까?
물론 나를 바라보는 2왕자의 시선이야 따가워지겠지. 상대가 그 병신왕자이니만큼 자신을 모욕한 상대에게 보복하기 위해 수작질을 부릴지도 모르고.
근데 그거 지금이랑 별 다를 거 없지 않아? 어차피 2왕자를 모른 체 하더라도 그 녀석의 부하들이 수작질을 부릴 거 아냐.
<…여아야.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알겠다만 그 부하에게 견제를 받는 것과 2왕자 본인에게 미움을 사는 것은 전혀 다른 종류다.>
‘그런가요?’
<그래. 작금 그대를 향하는 견제는 수면 아래에 머무르고 있다. 자신들의 주인에게 들켜선 안 되니까. 허나 그대가 2왕자에게 미움을 산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수위를 낮출 이유가 없단 거네요.’
으음. 그렇구나. 2왕자의 호감을 없애버리면 견제도 사라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귀찮아질 가능성이 있는 건가.
이래서 정치 초짜의 생각은 안 된다니까.
무작정 던져 본 말이었기에 할배의 만류를 듣자마자 포기한 나였지만 할배는 달랐다.
<…아니. 아니지. 지금의 여아는 포기하기에는 아쉬운 인재야.>
‘할아버지?’
<잠시 있어봐라. 생각을 좀 해 볼 테니.>
그는 무언가 번뜩인 것 마냥 혼자서 중얼거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나를 경유해서 카리아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현 1왕자의 계승권이 굳건한지 물어봐라.>
<2왕자의 세력은?>
<2왕자가 1왕자를 상대로 승리한 적이 있는가.>
몇 번의 문답 끝에 공상에서 빠져나온 할배는 웃음기 어린 어투로 이렇게 말했다.
<정정하마. 그대의 생각은 꽤 괜찮은 것일지도 모르겠군. 좋다. 녀석을 병신왕자라고 불러보자꾸나.>
‘…안 괜찮다면서요?’
<내가 한 가지 사실을 잊고 있어서 판단을 잘못 내렸다.>
‘뭔데요?’
<지금의 그대가 척을 져서 좋을 게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
*
할배가 계획을 세우고서 다음 날.
나는 지금 내게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불렀다.
앞으로 내가 저지를 일에 대해 설명을 해주기 위해서.
공적인 자리에서 2왕자에게 병신왕자라는 단어를 박아버릴 계획을 세운 것이다.
일을 저지르면 큰 소란이 일게 되고 이들에게 설명을 요구받을 테니 미리 부른 것이다.
개인실로 이들을 불러 모은 나는 내 계획에 대해서 설명을 하려 했다만 그 생각은 처음부터 삐그덕거렸다.
내가 2왕자를 병신왕자라 부를 것이라 이야기를 하자마자 격한 반응이 새 나왔으니까.
“…잠시. 루시 알른. 내가 들은 이야기가 정말로 맞는 거냐?”
아서는 머리가 아픈 듯 미간을 잔뜩 찌푸린 미간을 꾹꾹 눌렀다.
‘네. 맞아요.’
“만날 불쌍하다는 이야기를 듣다 보니 자기 청각도 불쌍하다고 생각한 건가요? 걱정마세요. 이번엔 불쌍왕자님의 귀가 맞았으니까.”
“진짜 형님을 병신 왕자라고 부르겠다고?! 그대는 생각이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아서가 고함을 지르는 바람에 방 안이 울렸다.
소리가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장치를 해두어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바깥으로 소리가 새어나갔으리라.
왕자란 녀석이 왜 이렇게 조심성이 없는지 원.
“…저도 비슷한 생각입니다. 알른 영애. 제발 자기보다 높으신 분들은 정상적인 이름으로 불러주시면 안 될까요?”
아서의 외침에 겨우 정신을 차린 듯 조이가 애매한 목소리를 냈다.
최애캐의 부탁이니 만큼 최대한 들어주고 싶기는 하지만 저건 불가능한 부탁이었다. 메스가키 스킬이 사라지지 않는 한 나는 내 마음대로 누군가를 부를 수 없으니까.
“다들 진정하세요. 영애께서 다 생각이 있으시겠죠.”
이 속에서 유일하게 평온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은 페이비였다. 그녀는 일단 나를 믿어보자는 말을 꺼냈다.
왜 저런 의견을 내뱉는지는 어렵잖게 추측할 수 있었다.
내가 주신의 사도라는 것을 알고 있는 그녀다. 정신 나간 말을 지껄이는 나를 보고 허접 주신이 무슨 계시를 내렸다 판단한 거겠지.
안타깝게도 이번엔 허접 주신이 이야기한 게 없었지만 난 그를 설명하지 않았다.
내가 스스로 이런 미친 짓을 떠올렸다는 것을 어찌 고백하겠는가. 그냥 모든 죄를 허접 주신에게 떠넘기는 편이 쉽고 편하잖아.
솔직히 말해서 허접 주신의 잘못이 없는 것도 아니야. 진즉에 메스가키 스킬을 조정해 주었다면 내가 이런 결심을 할 일도 없었을 테니까!
과실 비율로 따지자면 걔가 9고 내가 1!
…이건 너무 양심이 없나? 7대3정도로 할까?
“페이비. 알른 영애께서는 깊게 생각하고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에요.”
“그래! 생각이 있기는 뭐가 있나! 이 녀석이 나를… 아니. 잠시. 진짜 생각이 있는 것인가?”
“왕자님?”
이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소울 아카데미에 들어오고서 내가 걸어 온 행적이 나쁘지 않단 것이다.
나는 언제나 좋은 결과로써 스스로를 증명했으니까.
그것이 본의건 본의가 아니건 간에.
“조이. 생각해보세요. 알른 영애께서 무언가 일을 벌였을 때 결과가 안 좋았던 적이 있나요?”
“…그것도 그렇네요.”
“우선 영애의 이야기를 모두 다 들은 후에 판단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해요.”
내 행적에 페이비의 설득이 더해지니 아서나 조이라 할지라도 일단은 들어보자는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
그를 확인한 나는 한 호흡을 쉬고 나서 다시금 입을 열었다.
‘아무 이유 없이 이런 일을 하려는 건 아니에요…’
“이유 없이 병신왕자를 병신왕자라고 부르려는 건 아냐. 그 바보 변태 자식이 나한테 찝쩍거리는 것도 짜증나는데 그 부하들까지 날 귀찮게 군단 말이야.”
내 이야기를 들은 조이와 아서는 짐작 가는 부분이 있는 것인지 고개를 끄덕였다.
저 두 사람이 있는 위치가 위치이니 2왕자가 내게 관심을 가진다는 소식 정도는 들은 거겠지.
“확실히 작은 형님의 입장에선 루시 그대가 매력적인 대상이지. 큰 형님을 상대로 승리했다는 상징성부터가 너무 커.”
“저나 페이비가 영애를 아낀다는 게 널리 소문이 퍼지기도 했고요. 영애를 끌어들이면 저희 둘에게 접근할 수 있을지 모른다 생각하겠죠.”
저 두 사람이 이야기한 것은 할배가 내게 해 준 설명과 같았다.
지금의 나는 2왕자에게 너무도 매력적인 대상이다.
앞서 여러 번 이야기했던 것처럼 현재 왕위계승권은 사실상 1왕자의 것으로 확정지어진 상태다.
맏이라는 명분. 1왕자를 본 이라면 누구나 인정할만큼 압도적인 능력. 그를 지지하는 굳건한 세력.
어느 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데 어찌 2왕자에게 기회가 찾아올까.
귀족들도 바보가 아니다. 2왕자의 세력에 붙어봐야 승산이 크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최소한 2왕자가 그 어떤 승부에서라도 1왕자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면 조금이나마 상황이 달라지겠지만 2왕자 개인의 능력이 전체적으로 1왕자보다 떨어진다는 것은 여러 번 증명된 사실.
현실이 이런지라 2왕자의 세력은 크지 못하다. 이길 가능성이 없다시피한 도박에 인생을 배팅하는 이들이 몇이나 되겠는가.
2왕자의 외가와 관계된 곳. 현 1왕자 중심 세력과 사이가 극도로 안 좋은 곳. 인생 한 방을 노리는 멍청한 곳. 이러한 집단이 아니라면 2왕자의 편에 설 생각을 하지 않는다.
거기에서 나다.
1왕자가 먼저 제안한 대결에서 승리를 거두었다는 상징성. 왕국의 수호자라 불리는 알른 백작가라는 배경. 파트란 가문, 주신 교회의 성녀, 거기에 유력 차기 검성과 친하다는 이점.
이 모든 것을 가진 나라는 사람은 2왕자의 입장에서 반드시 거머쥐어야 할 인재다.
만약 나라는 사람을 자신의 세력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면 패색이 짙은 승부에 반전을 만들어내는 게 가능하니까.
어제 이 모든 것을 설명해 준 후에 할배는 유쾌하다는 듯 웃으며 이렇게 이야기를 했다.
<그 놈은 이제 그대를 끌어들이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할 것이다! 2왕자의 부하 중 하나가 그대를 견제했다는 이야기를 하면 다음 날 그 놈의 목을 날릴 수도 있을 터!>
처음 2왕자가 내게 손을 내밀었을 때와는 이야기가 다르다. 겉으로 보이는 지위는 2왕자가 위이지만 실상은 그 쪽에서 매달리고 내가 생각해보는 입장이 된 것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내가 갑이고, 2왕자가 을이다. 그러니까 내가 2왕자에게 병신왕자라고 지껄이건 뭐라고 하건 간에 2왕자는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다.
<이를 이용해 먹으려면 뼛속까지 뜯어먹을 수 있을 것 같다만.>
‘그런 거 필요 없어요.’
지금 내가 원하는 물건들은 대부분 지위나 권력이 있다 해서 손에 넣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그러니 2왕자를 내 수족처럼 부리게 된다 하더라도 쓸데없이 귀찮아질 뿐.
<네가 바라는 것은 2왕자가 귀찮게 굴지 않는 것 뿐이지?>
‘정확해요.’
<그거야 간단하지.>
할배는 이야기했다.
나의 눈치를 보게 만들라고.
자칫 잘못하는 순간 2왕자에게서 멀어지는 것 뿐 아니라 1왕자의 손아귀에 들어갈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라고.
일단은 현상 유지를 하게 만든 후 차근차근 회유를 하게 하라고.
<상황을 동점으로 만드는 것이다. 네가 1왕자를 상대로 모욕을 주었던 것처럼 2왕자를 모욕하면 되는 것이야. 1왕자가 미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단순히 네가 이런 인간이라는 것을 보이면 돼.>
모든 설명의 끝에 할배가 제안한 것은 아카데미의 던전 공략을 가지고서 겨루는 승부였다.
내게 가장 유리한 전장.
소울 아카데미의 썩은물인 나는 절대 패하지 않을 것임을 확신할 수 있는 곳.
<2왕자는 결코 이를 거절하지 못할 것이다.>
어젯 저녁. 할배가 해주었던 이야기를 그대로 이들의 앞에 늘어놓았더니 좌중에 침묵이 자리했다.
뭐야? 다들 표정이 왜 이래?
조이랑 아서는 왜 믿기 힘들다는 것처럼 날 보고 있는 거고. 왜 페이비는 왜 웃으면서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는 건데?
좋은 반응 맞지? 그치?
나는 카리아가 아니라서 얼굴만 보고는 감정을 알아낼 수 없단 말야! 말로 해주라!
침묵이 부담스러워 주변의 눈치를 보고 있으려니 여태까지 딴짓을 하던 프레이가 대뜸 입을 열었다.
“저기. 루시.”
‘네?’
“뭔데. 바보 검사.”
“병신 왕자는 왜 병신 왕자인 거야?”
…이제 와서 그걸 물어보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