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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3

내가 생각하는 그라시스는 썩 좋은 나라가 아니었다.

서로 반목하고 싸우기 바빴던 왕족들과 귀족들이 유일하게 입을 모아 하는 말이 있었다.

과거에는 찬란했고, 건국왕은 위대했고….

그렇지만 끝은 서로 달랐다.

왕국이 힘이 약해진 이유로 왕족들은 귀족들의 방만함과 오만함을 꼽았고.

귀족들은 왕을 비롯한 왕족 일가의 무능력함과 사치스러움을 꼽았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것도 아니고, 서로 똥칠한 놈들끼리 싸우고 있는 걸 보고 있는 나로서는 우습다 못해 한심하게 느껴졌다.

오만하든, 방자하든, 무능력하든, 사치스럽든.

전부 본인들에게도 해당하는 말 아닌가?

그리고 애초에 시작부터 망조가 든 나라가 있기나 할까.

집 기둥이 다 무너진 지금에 와서 옛날엔 잘 나갔다느니, 찬란했다느니….

그래서 어쩌라는 거야?

정 그렇게 과거가 좋으면 시간을 역행하는 마법을 만들어서 과거로 돌아가든가, 그렇게 할 능력도 없는 놈들이 나불대기는.

그런 이유로 나는 그라시스를 좋은 나라라고 생각하지 않고, 좋아하지도 않았다.

전생의 기억이 떠오르고 인지를 할 수 있게 된 후, 내가 네 살짜리 여자아이의 몸으로 어두운 뒷골목의 한 허름한 판잣집에 있단 걸 알았을 때부터 난 그라시스라는 나라를 좋아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빈민들은 내일은커녕 당장 오늘 저녁을 걱정하며 살았다.

구걸, 소매치기, 도둑질, 강도… 때에 따라선 도시 밖에 나가는 일도 심심찮았으니 안정적인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다가 운이 나쁘면 죽고, 운이 좋으면 그날 하루는 배를 채울 수 있는 거고.

그러니 내 부모라는 작자들이 굳이 나를 키운 것은 일종의 투자였을 것이다.

오늘 한 개의 마시멜로를 먹지 않고 참으면 훗날 열 개 이상의 마시멜로로 돌아온다고 믿은 거겠지.

우습게도 나와 정반대의 성향인 셈이다.

투자금을 어떤 식으로 회수할 생각이었을까.

그들이 말했던 것처럼 위험을 알리고 죽는 역할이었을 수도 있고, 고기 방패나 미끼 따위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노예상이나 창관에 팔아버렸을지도 모르지.

정답을 알 순 없었다.

정답을 아는 이들은 거리를 밝히던 달조차 숨어 유난히 어둡던 어느 날 밤, 산처럼 쌓인 쓰레기 더미 위의 쓰레기가 되어버렸으니까.

빈민가의 말에 따르면 운이 나빴던 것이다.

새장 속의 카나리아보다 먼저 죽은 광부라니….

역시 세상은 참 웃기는 일투성이야.

하지만 그건 그거고, 새에게 모이를 주는 사육사들이 사라졌으니 남겨진 새는 살 방법을 모색해야 했다.

새는 작고 좁은 새장에서 나와 자기와 비슷한 처지인 고아들의 무리로 들어갔다.

무리에서의 생활은 생각보다 편했다.

내 환심을 사기 위해 먹을 거를 선물하거나 편의를 봐주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기 때문이다.

힘을 써서 강제로 취하지 않은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다.

아마 어린아이 특유의 풋풋함이 아니었을까?

순수한 어린아이일수록 오히려 잔인하다는 말도 있지만 난 그렇게 믿고 싶다.

그렇게 이 년이란 시간이 흘렀을 때, 마물의 무리가 내가 사는 도시를 침공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리 위협적인 무리는 아니었다.

대비만 잘 되어 있었으면 아무 피해 없이 막을 수 있는, 딱 그 정도.

그러나 평소처럼 술을 마시고 나자빠져 있던 감시병은 위험을 알리는 종을 치지 못했고, 문을 닫을 경비병도 그 옆에 같이 나자빠져 있었다.

언제든지 들어오라고 문을 훤히 열어준 꼴.

당연히 마물들은 초대를 거절하지 않았고, 도시가 피바다가 되는 건 한순간이었다.

* * *

“하아… 하아…!”

다리가 무겁다.

묵직한 모래주머니를 찬 것 같은 느낌에 시선을 내려봤지만 그곳엔 먼지와 오물로 얼룩진 다리만 보일 뿐이었다.

어째서.

그런 의문은 굳이 갖지 않았다.

그다지 중요한 의문도 아닐뿐더러 거기에 대해 고찰할 시간에 한 걸음이라도 더 내딛는 게 살길이었기 때문이다.

도시에 처음 비명이 울려 퍼졌을 때, 나는 곧바로 성벽에 난 작은 개구멍으로 향했다.

도시 안으로 물건을 몰래 들여올 때 쓰는 통로였다.

사실 도시에 비명이 들리는 건 그다지 특별한 일이 아니다.

귀족과 부딪힌 빈민이 질렀을 수도 있고, 무식한 용병들이 싸우다 낸 비명일 수도 있고… 하여간 그라시스에선 제법 흔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일단 달렸다.

어쩌면 내 새로운 이름처럼 남들이 느끼지 못하는 위기를 느낀 걸지도.

뭐가 됐든 그 덕에 무사히 도시를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키르르륵!

캬악!

“흐, 흐으….”

이젠 날숨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먹잇감을 가지고 노는 취미라도 있는 건지 뒤를 쫓아오던 마물들이 멈춰선 나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피가 흐르는 주둥아리와 살점이 낀 발톱.

흐릿한 시야로 그것들을 바라보던 나는 이를 악물었다.

“…후우.”

아마 난 여기서 죽겠지.

죽고 싶지 않은 건 맞는데 미련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

다만, 무기력하게 죽고 싶진 않다는 마음만은 가지고 있었다.

품에서 단검을 꺼내 들었다.

쓰레기 더미를 뒤져 얻은 것인 만큼 상태는 좋지 않았지만 나에겐 구명줄이나 다름없었다.

숨을 가다듬고 두 손을 모아 단검을 꽉 쥐었다.

팟!

‘…!’

늑대의 형태를 한 마물이 달려들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빠른 속도에 무거운 몸을 급히 날리니 검은색 무언가가 눈앞을 휙 지나가며 볼이 화끈해졌다.

뚝뚝 떨어지는 피를 내버려둔 채 놈들을 주시했다.

‘확실해.’

이놈들은 지금 날 가지고 놀고 있어.

애초에 이놈들이 나를 쉽게 잡아먹을 생각이었으면 도시에서 탈출한 뒤 얼마 되지 않아 잡아먹혔을 것이다.

하지만 아슬아슬하게 도망칠 수 있게 속도를 낮추고, 한 번에 덮치면 될 것을 혼자서 덤벼든 데다가 공격을 일부러 빗맞히기까지.

바보가 아닌 이상 알아챌 수밖에 없잖아.

“하, 하하….”

무심코 웃음을 흘리던 나는 문득 어떤 사실을 떠올렸다.

내가 기억을 되찾은 후로 웃은 적이 있던가?

놀랍게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까먹어서 그런 게 아니라 한 번도 웃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떠올리지 못했다.

“…축하해.”

어쩐지 애들이 내 앞에서 기를 쓰고 재롱을 부리던 게 이상했는데, 걔네도 못한 걸 너희가 해냈네.

고맙게도 놈들이 기다려준 덕에 호흡이 진정됐다.

죽음의 위기가 닥치자 아드레날린이 돌아서 그런지 다리를 옭아매던 무게감도 이젠 느껴지지 않았다.

이렇게 사냥해서 먹으면 고기가 더 야들야들하나?

그런 짓 안 해도 내 살은 충분히 야들야들할 텐데.

나는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단검을 눕혀 마물을 겨누었다.

어차피 속도도, 힘도 내가 밀린다.

제대로 된 싸움법을 배운 적은 없지만 왠지 모르게 먼저 달려드는 게 정답이란 생각이 들어서 허벅지를 살짝 구부렸다가 그대로 땅을 박찼다.

타앗!

마치 용수철이 튕기듯 튀어 나간 몸이 빠른 속도로 마물과 가까워졌다.

마물의 눈동자가 내 몸을 따라 움직이고, 내 눈은 그보다 조금 느린 속도로 마물의 눈을 쫓았다.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워졌을 무렵, 놈이 옆으로 훌쩍 뛰며 단검의 녹슨 첨단을 피했다.

다리를 땅에 박아 넣듯이 길게 끌어 관성에 의해 끌려가던 몸을 억지로 잡아 세웠다.

대신 그대로 허리를 돌리며 놈이 뛴 자리를 향해 단검을 휘둘렀다.

이번에도 빗나갔다.

거리가 짧았을 뿐, 놈이 피한 것은 아니었다.

크륵, 하고 짧게 내는 소리가 꼭 나를 비웃는 것 같았다.

단검이 아니라 검이었다면, 하다못해 내 팔이 조금만 더 길었다면.

짧은 아쉬움을 접어두고 뒤로 훌쩍 뛰자 네 갈래의 발톱이 허공을 훑고 지나갔다.

“…후우.”

고작 세 번의 공방이 오갔지만 벌써 숨이 차기 시작했다.

…이래서 어린아이의 몸은 불편하기 짝이 없다.

팔다리가 짧아서 어른보다 많이 움직여야 하는데, 정작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찬다.

근력과 지구력은 말할 것도 없고.

그나마 장점을 꼽자면 회복이 빠르다는 건데.

회복도 싸움에서 살아남아 푹 쉴 때나 할 수 있는 거지 이런 상황에 그런 장점은 아무 의미도 없다.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한 번? 두 번?

부정적인 생각이 계속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내색하지 않고 단검을 고쳐잡았다.

살아남지 못한다면 적어도 한 놈은 길동무로 데려가야지.

교환비가 마음에 들진 않지만 그 정도만 해도 감지덕지라는 것 정도는 안다.

그만큼 심한 격차니까.

숨을 가다듬을 새도 없이 마물이 발톱을 휘둘렀다.

나도 나름 공격을 한다고 한 건데 놈 딴에는 별 위협도 되지 않았는지 놈의 느긋한 공격엔 아직도 나를 골리려는 의도가 가득했다.

챙!

“읏…!”

발톱을 막은 단검에서 시작된 강한 진동이 손을 타고 올라와 팔을 물어뜯었다.

하마터면 단검을 놓칠 뻔했다.

욱신거리는 팔을 무시하며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어떻게 해야.’

푸흣.

갑자기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않았다.

내가 생각을 잘못하고 있었구나.

어차피 길동무로 데려갈 생각이었다면 보신을 생각할 필요도 없었는데 말이야.

설령 두 다리가 뜯겨 나가도 엉금엉금 기어가서 저 건방진 대가리에 단검을 꽂으면 내 승리야.

독기를 품자 왠지 모르게 숨 쉬는 게 한결 편해진 느낌이 들었다.

내 마음가짐이 달라진 걸 안 걸까. 나랑 대치하던 놈의 눈이 신중해졌다.

내가 개 훈련사도 아니고, 팔자에도 없는 교감을 하고 있자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전생에 개 훈련 채널 좀 봐둘걸.

이러는 와중에도 내 몸은 착실히 공격을 피하고 있었고 숨도 가빠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공격에 익숙해지면서 회피 동작이 더 간결해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신체 능력이 갑자기 올라가는 것은 아니었기에 전세를 뒤집기엔 무리였다.

참다 보면 분명 기회가 오리라.

그렇게 믿고 버티던 그때, 마침내 내가 바라던 기회가 왔다.

커헝!

“…!”

기회다!

먹잇감이 계속 간발의 차로 피하는 게 어지간히 짜증 났는지 놈이 사납게 포효하며 돌진했다.

동작이 크다는 건 빈틈 또한 크다는 것.

쉽게 반응하기 힘든 속도의 돌진이었지만 진작 알아채고 준비하고 있었던 터라 또다시 간발의 차로 피할 수 있었다.

콰아앙!

나를 지나친 놈은 그대로 내 뒤에 있던 바위에 머리를 박았다.

나는 충격이 어지간히 컸는지 쉽사리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녀석에게 달려들었다.

푹!

깨갱!

이럴 땐 또 개 같은 소리를 내는구나.

…어감이 좀 이상한데 아무튼.

몸을 뒤트는 놈을 마무리 하기 위해 손을 최대한 높게 들었을 때였다.

퍼억!

“꺄악?!”

육중한 충격이 등을 덮치고, 나는 그대로 앞으로 나가떨어졌다.

“으, 으윽….”

고통에 눈앞이 깜박깜박 점멸했다.

잊고 있었다. 내가 싸우는 건 한 놈이 아니라는 것을.

몸을 일으키려고 해도 땅을 짚은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연신 땅에 얼굴을 박았다.

결국 땅을 짚을 힘까지 없어져 엎어진 채로 마물들을 노려봤다.

이제 장난칠 마음이 사라졌는지 세 마리가 동시에 다가오고 있었다.

“개새끼들….”

단검을 쥔 손이 벌벌 떨렸다.

결국 한 마리도 데려가지 못하고 끝나는구나.

독기 어린 눈을 부릅뜬 채로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을 맞이했다.

제일 앞에 선 마물이 앞발을 들더니 그대로-

푸확!

검은 피를 뿜으며 사라졌다.

옆에 서 있던 두 놈의 몸에 비스듬한 선이 그어지더니, 먼저 간 놈을 따라 저승길에 올랐다.

어느새 등장한 남자가 마물들이 사라진 빈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용감한 소녀군! 이름이 뭔가?”

깜박깜박.

“…아저씨, 누구?”

“아, 아저씨라니….”

그게 나와 가리드의 첫 만남이었다.


           


I Became a Raid Boss

I Became a Raid Boss

레이드 보스가 되었다
Score 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One day, when I came to my senses, I found myself reincarnated in another world. After enduring a rough life post-reincarnation, I thought I could finally settle down, quietly tending to a flower garden in the mountains… …But something feels o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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