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30
병신 왕자에게 이런 험한 별명이 붙은 이유는 이 놈의 행적이 무능한 상사 그 자체인 탓이 컸다.
신경질적이고 날카로운 주제에 멍청하고 책임은 아랫사람에게 떠넘기고 공은 자신이 챙기는. 그야말로 저 새끼가 도대체 왜 저 자리에 올라가 있는 거지? 라는 의문을 절로 품게 만드는 악덕상사의 표본이라 부를 만 했지.
제작진들이 직장생활 속의 악몽을 담아 구현해낸 듯한 2왕자의 캐릭터성은 수많은 이들에게 PTSD를 선사했고,
커뮤니티 속 여러 사람들의 원한과 원망을 담아서 병신 왕자라는 별명이 붙여지고 말았다.
2왕자에게도 사연이 없는 것은 아니다.
평생을 1왕자와 비교당하면서 살아온 탓에 마음 깊이 열등감과 피해의식을 품게 되었다는 것. 가족이고 친구고 부하고 간에 주위 사람 그 누구조차도
그를 인정해주긴커녕 이용해야 할 도구로 보았기에 그 부정적인 감정이 더 커졌다는 것.
그에 따라 자기중심적이며 독선적인 주제에 책임을 회피하는 성향이 되었다는 것.
더 자세하게 파고들자면 소울 아카데미 속 여러 주연 캐릭터답게 구구절절한 사연이 튀어나오긴 한다만 그건 별 중요치 않다.
어차피 내가 2왕자를 2왕자라 부를 방법이 없는 한 나는 그의 구원자가 될 수 없을 테니까.
솔직하게 말해서 어느 미친놈이 자길 병신이라고 부르는 사람한테 구구절절한 사정을 털어 놓으면서 자신의 감정을 털어내겠냐고.
“루시?”
내 침묵에 프레이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난 차마 이 사정을 설명해 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병신을 병신이라고 부르는 데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대답해 주었고 조이와 아서에게 한 소리를 듣고 말았지.
뭐어. 어쨌든 내가 평범한 미친년이 아니라 생각하고 행동하는 미친년임을 깨달은 두 사람은 굳이 나를 만류하지 않았고, 경우에 따라선 날 도와주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사양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할배의 계획이 멋들어지더라도 언제 어디에서 뒤틀려버릴지 모르니까 말이다.
그 날 이후로 나는 계속해서 병신왕자를 2왕자라고. 아니. 2왕자를 병신 왕자라고 부를 타이밍을 쟀다.
내가 걔를 병신왕자라고 부르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그 녀석이 있는 교실로 찾아가 병신이라 부를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건 시비를 거는 것 정도가 아니라 선전포고다. 난 그 정도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할배의 계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선을 타는 것이니까.
지금 당장은 네 편이 되 줄 생각이 없지만 네가 잘 만 한다면 마음을 바꿀 수도 있다. 이 복잡 미묘한 간극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내가 먼저 시비를 거는 형식이어선 안 되는 것이다.
<기다리다 보면 자연스럽게 때가 올 것이다. 2왕자 녀석은 내게 관심이 아주 많은 듯 하니.>
할배가 이렇게 말했기에 나는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순간을 기다리며 내 할 일을 했다.
내가 하는 말이라면 무엇이라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행정 교수에게 찾아가 수강신청을 다시 하고.
루카에게 찾아가서 머저리 트리오를 어떻게 처리했는지 듣는 김에 루카가 만들어 두겠다는 자료를 받아오고.
비시를 찾아가서 책을 건네주는 김에 벨마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고.
알새틴에게 찾아가 2학기 던전 공략을 위해 필요한 여러 물건을 구해 달라 이야기하고.
항상 하던 수련을 하고. 조이와 아서를 굴리고. 프레이와 대련을 하고.
내 땀이 묻어 있는 옷에 파고들다가 결국 내 땀냄새가 배기고 행복해하는 얼빠 여우를 강제로 씻기고.
그런 식으로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할배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계획을 시작할 순간이 찾아왔다.
그 날은 아카데미의 2학기 던전이 시작된다는 공고가 올라오는 날이었다.
앞서 있었던 여러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수많은 마법을 도입했고, 그 덕에 학생들의 안전을 완벽하게 지킬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생겼으니 던전 공략의 규정을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되돌리겠다면서. 혼자서도 던전을 공략할 수 있을거라는 문구를 확인한 나는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지금의 난 파티를 구성해 줄 사람이 있으니만큼 인원 수를 걱정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들의 움직임까지 신경 써 가며 공략을 하는 것과 혼자서 공략을 하는 것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일반적인 공략이라면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않으냐는 말이 돌아오겠지만 나의 경우에는 이야기가 다르다.
썩은 물의 방식을 써먹으려면 혼자인 편이 낫다. 타인이라는 변수를 아예 없애버릴 수 있으니까.
흐음. 알새틴한테 미리 이야기를 해두었으니까 던전이 열릴 즈음이면 필요한 물건이 모두 준비될 테고.
조금 빡세게 움직이면 첫 날에 아카데미 던전을 공략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던 나는 멀리서 들려오는 부산스러운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아니. 인파가르기를 이토록 말끔하게 구사할 수 있는 자가 있었단 말인가?! 저것은 이 루시 알른의 비술이라 생각했거늘!
그에 감탄하면서 먼 곳으로 시선을 향한 나는 2왕자와 그 패거리의 모습을 보고는 헛웃음을 흘렸다.
저들의 시선은 하나 같이 내 쪽에 꽂혀 있었지만 그 시선에 담긴 의미는 저마다 달랐다.
나를 바라는 자. 탐탁치않아 하는 자. 고민하는 자. 증오를 표하는 자.
분명 2왕자가 나를 원한다 이야기 했을 텐데도 의견이 통일되지 않는 꼴이라니. 진짜 오합지졸이라는 단어가 잘 어울리는 사람들이네.
“루시 알른.”
다른 곳은 쳐다보지도 않고 내 앞으로 걸어온 2왕자는 나를 내려다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본래는 그대가 결정을 내리길 기다릴 생각이었다만 내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어서 말이야.”
그 웃음을 보면, 자신감으로 가득한 눈을 보면 알 수 있다.
2왕자가 자신이 거절당하리라는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고 있음을.
그리고 뒤편에서 날 노려보는 이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자신감을 주입한 것이 뒤편에 서 있는 이들의 달콤한 말이라는 것을.
“오래 전에 한 질문의 대답을 듣고 싶군.”
2왕자가 손을 내미는 것을 보면서 심호흡을 한다.
‘죄송합니다. 2왕자님.’
“죄송합니다. 병신왕자님.”
내 입에서 병신왕자라는 단어가 튀어나옴에 따라 주변의 공기가 적막으로 물든다.
군중도. 2왕자의 뒤편에 서 있던 이들도. 심지어 2왕자 본인조차도.
이 상황이 현실임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듯 멀뚱히 내 얼굴을 쳐다보고만 있다.
허나 나만큼은,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오래 전부터 예상해왔던 나만큼은 무거운 적막 속에서도 태연했다.
내가 이런 상황을 만든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이던가.
충격에 빠진 이들 중에서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2왕자의 추종자들이었다.
“지금 2왕자님을 모욕하는 것인가?!”
“정신이 나갔구나!”
“최근 재능을 얻으니 하늘이 높은 줄을 모르는 군!”
“알른 가문의 수치가!”
쏟아지는 비난의 여파에 따라 군중의 웅성임이 커진다.
그 속에선 2왕자는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목에 핏줄을 세우더니 팔을 위로 치켜들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웅성임이 사라진다.
아무리 1왕자에 비해 떨어진다 할지라도 왕자는 왕자. 나름의 위엄을 보이는 법을 알고 있는 것이다.
“…병신왕자라고? 누가. 내가?”
‘네!’
“여기에 병신왕자님말고 다른 왕자님께서 계신가요? 그렇진 않은 것 같은데~”
2왕자의 입에서 이빨을 까득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지만 2왕자는 대뜸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대신 긴 숨을 내쉬며 안정을 찾더니 다시 목소리를 낮췄다.
“그래. 그대의 능력을 생각해보면 그 정도 망발은 넘어가 줄 수 있지.”
에?! 진짜?! 병신왕자라는 호칭을 넘어가 줄 수 있다고?!
2왕자의 안에서 내 가치가 생각한 것보다 더 높았던 건가?!
그런 거라면 굳이 계획을 진행할 필요 없이 무난하게 넘어가면…
“내 아래에 들어온다면 말이다.”
아. 난 또 이대로 넘어가주나 싶었는데 아니었네.
하긴 눈앞에서 병신 소리를 들었는데 넘어가주면 그게 호구지.
‘죄송합니다. 저는…’
“무얼 기대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전 저보다 부족한 사람의 아래에 들어갈 생각이 없답니다.”
미리 준비해 두었던 대사를 읊어주었더니 2왕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얼굴이 시뻘개 지는 것이 분노를 견디기 어려운 듯 했다.
“지금 그 말은 내가 그대보다 못하다는 소리인가?”
‘저보다 낫다고 생각하세요?’
“저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셨나요? 뭐.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는 거니까요. 병신왕자님의 의견을 존중할게요.”
“헛소리 말고 제대로 답하라. 내가. 그대보다. 못 하다고?”
힘이 잔뜩 들어가 충혈된 2왕자의 눈빛은 분명 위압적이었으나 두렵지는 않았다.
이걸 가지고서 겁을 먹기엔 여태까지 내가 겪었던 것들이 너무도 많았다.
‘진짜 저보다 낫다고 생각하세요?’
“아니.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저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시나요?”
“아직 빛을 발한 지 1년도 안 된 꼬맹이보다 부족할 정도로 이 세실이란 사람은 허술하지 않다.”
‘진짜요?’
“에. 진짜요? 안 그래 보이는데.”
키득거리는 나의 웃음소리에 주변의 분위기가 한층 더 험악해진다.
피부를 꿰뚫을 듯한 시선들이 따갑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이미 저질러 버린 이상 내게 남은 선택지는 끝까지 내달리는 것 뿐이었다.
‘1왕자님도 저한테 졌는데 2왕자님이 저보다 나을 리가 없잖아요?’
“이상하다? 제가 알기로 병신왕자님은 음침한 스토커 왕자님한테 매번지지 않았나요? 전 이겼어요. 병신왕자님께서 평~생 노력해도 못 이뤘던 걸 해냈다고요. 당연히 병신왕자님보다 나은 거 아닌가요?”
앞으로 뻗었던 손을 가지고 2왕자가 내 손목을 잡아챘다.
움직임이 좋네.
손목에 가해지는 압력을 보면 힘도 상당한 것 같고.
무력 스텟에 한해 최상위권에 머무르던 캐릭터다워.
그래도 이 정도면 뭐.
정면에서 붙을 만 하네.
날 끌어당기려는 2왕자의 완력을 팔에 힘을 주는 것으로 버텨냈다.
그러자 2왕자의 얼굴에 당혹이 서린다.
‘힘으로 일을 해결하려 하시다니…’
“푸하핫. 말로 안 되니까 힘으로 해결하려 드시다니. 너무 야만적이시네요. 성품의 부족은 치명적인 문제라고요? 아. 성품이란 단어는 아시죠?”
“내 인내심을 시험하려 들지 마라. 네 아버지의 위광이 언제까지고 그대를 지켜 주지는 않을 것이니 말이다.”
더 이상 나대면 베네딕이고 뭐고 조져버리겠다는 선언.
도저히 실현될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위협에 무서워하는 척을 할까 하다가 이 이상 도발을 하면 진심으로 주먹을 휘두르겠다 싶어서 참았다.
‘무시당해서 화가 나셨나요?’
“화 나셨나요? 가슴 근처에 올까말까한 여자애가 당신을 무시하는 게 짜증나시나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그럼 말이죠…’
“그럼 증명해 보세요. 병신왕자님. 당신이 저보다 뛰어나다는 걸. 음침한 스토커 왕자님께서도 패배한 분야에서 절 이길 수 있단 사실을.”
– 띠링.
내가 말을 마치기 무섭게 귓가에 알림음이 울렸다.
허접 주신이 퀘스트를 내어주는 소리.
그를 듣고서 버릇처럼 고개를 돌린 나는.
[2왕자를 참교육하라!]
“풉! 콜록! 콜록콜록!”
예상치 못한 함정에 당해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