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32
2왕자가 치졸한 짓거리를 하리라는 것은 이미 예상한 바였다.
오히려 여태까지 별 행동을 하지 않기에 이상하게 생각을 했지. 내가 아는 그 녀석은 자기가 이기기 위해서라면 무어라도 할 놈이니 말이다.
허나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
아무리 나를 이기고 싶어도 그렇지 이건 아니지 않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겠다는 그 마음가짐은 그렇다 치자.
근데 있잖아. 제일 중요한 걸 잊어버렸잖아 이 멍청아!
애초에 네 목적은 나를 포섭하는 거였다고! 이딴 식으로 나오면 내가 네 옆으로 가고 싶겠냐?! 이 병신왕자야!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멍청한 것인지. 아니면 부하관리를 하지 못할 정도로 무능한 것인지.>
‘둘 다라고 생각해요.’
<아니. 그래도 왕자로써 교육을 받은 이인데 그럴 리가.>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풍경에 할배가 현실을 부정했지만 그런다고 눈앞의 풍경이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골목에 널부러진 사내들은 분명 나를 방해하기 위하여 찾아온 이들이었으니까.
‘하아.’
<하아.>
어이가 없어서 할배와 함께 한숨을 내쉬고 있으려니 카리아가 헛웃음을 흘렸다.
“내가 왕국에 있을 적에만 하더라도 귀여운 분이셨는데. 베드퍼 공작부인의 교육이 그리 좋진 않았나보네.”
그녀의 말은 정확히 문제를 지적하고 있었다.
2왕자라는 사람의 인격을 형성하는 데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은 저 공작부인이라는 사람이니까.
허나 이제는 관계없는 일이다.
스스로가 망쳐버린 자신의 아들을 실패작이라 규정내린 그녀는 2왕자에게 자그마한 기대도 하지 않고 있을 게 분명하니 말이다.
나를 포섭하는 일 또한 그렇겠지.
“조심해. 고용주님. 이렇게까지 나오는 걸 보면 무슨 수를 쓸지 모르니까. 어지간한 일로 고용주님이 위험해질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도 혹시라는 게 있잖아?”
카리아의 경고는 정확했다. 그 후로 이런저런 방식의 견제가 나를 향해 찾아왔으니까.
내가 훈련을 할 때에 사용하는 장비가 사라진다거나 하는 자잘한 것부터 시작해서 내가 없을 때에 기숙사에 침입하려는 시도까지.
이미 2왕자의 머릿속에는 나를 포섭한다는 생각이 날아 가버린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딴 미친 짓을 저지를 리가 없잖은가.
처음에는 내가 대놓고 시비를 건 것도 있으니만큼 어느 정도 웃어넘기려 했던 나였지만 이런 일들이 반복되다 보니 슬슬 성질이 돋아났다.
그런 식으로 시간이 흘러 아카데미 던전의 입구가 열리는 당일. 잠에서 깨어난 내가 품은 생각은 한 가지 뿐이었다.
[2왕자를 참교육하라!]
2왕자 그 새끼를 참교육하는 것.
참교육 해야 할 메스가키한테 참교육을 당하다니. 남자 이전에 인간으로써 최악의 굴욕이잖아?
날 이기기 위해 온갖 추잡한 짓을 일삼았던 페도 변태 인간 언저리에게 아주 적절한 처벌이 되겠지.
[솔라딘 왕국의 2왕자가 승부를 걸어왔습니다! 그에게 자신의 위치를 알려주십시오!]
[2왕자를 굴복시켜라!]
허접 주신께서도 그를 바라시는 게 분명하니 그 분의 사도된 자로써 어찌 그 뜻을 성실히 수행하지 않을까.
처음엔 주신께서 나를 암살하려 드는 건가 싶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주신께선 훗날 내가 가지게 될 생각을 예상했을 뿐이었다.
아아. 아르멘! 믿쑵니다!
가벼운 아침기도를 끝마친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아직까지 던전의 문이 열리려면 시간이 남아 있으니까 그 동안 몸을 예열해두자.
처음부터 속도를 내야 아카데미 던전의 문이 닫히기 전에 던전의 공략을 끝마칠 수 있을 테니까.
여느 때처럼 준비를 하고서 훈련장으로 향하니 프레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검에 기대어서 꾸벅꾸벅 졸던 그녀는 내 인기척을 느끼고는 고개를 들고는 무표정으로 반갑다며 인사를 건넸다.
“오늘 던전 갈 거지?”
‘그래야죠.’
“그래야지. 개허접 아카데미가 만든 허접허접 던전이 얼마나 허술할지 궁금하니까.”
“멤버는 평소처럼?”
멤버? 무슨 멤버? 나 오늘 혼자서 던전에 들어갈 건데?
그런 생각을 하다가 이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전한 적이 없음을 깨달았다.
‘오늘 저 혼자 들어갈 거에요.’
“저 따위 허접던전을 공략하는 건 나 혼자면 충분해.”
“알른 영애?! 그게 무슨 이야기인가요?!”
뒤편으로 고개를 돌린 나는 경악이 담긴 조이의 눈을 보고서 이야기가 쉬이 끝나지 않을 것임을 깨달았다.
*
실패. 실패. 실패. 실패. 실패.
세실이 받은 보고에 담긴 이야기는 대개 실패라는 단어로 귀결되었다.
루시 알른을 향해 여러 방해 공작을 시도했으나 모든 것이 그녀에게 별 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이것이 많은 보고서의 결론이었다.
이 일을 주도한 세실의 부하는 정신적인 피로를 주었으니 던전 공략을 하는 데에 약영향이 있으리라 이야기했지만 그는 그리 설득력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허나 세실은 그 내용을 그러려니하고서 넘겨버렸다.
실패에 대한 책임이라면 나중에 물으면 족하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바로 세실이 얼마 전에 아카데미 던전의 지도를 손에 넣었다는 것.
그가 지닌 여러 인맥을 동원하여 아카데미 내 교수를 포섭한 끝에 얻어낸 던전의 지도에는 아카데미 던전에 관한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던전의 구조가 어떤 식으로 되어있는 지에 대해서. 층계마다 나오는 마물의 종류는 어떤 지에 대해서.
각 층계의 특성은 어떤 식으로 설정되어 있는 지에 대해서.
그리고 10층마다 공략자의 앞을 가로 막는 보스를 공략하는 방법에 대해서.
이것을 손에 넣었을 때에 세실이 얼마나 기뻐했던가.
이것이 있으면. 이것만 있다면.
아카데미의 던전을 최단으로 공략할 수 있다.
루시 알른을 쓰러트릴 수 있다.
형님조차 이루지 못했던 일을 내가 이룰 수 있다.
내가 형님을.
1왕자를.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던 상대를 이길 수 있다는 말이다.
“다들.”
아카데미 던전의 문 앞에 선 세일은 오늘 함께 동행할 이들의 얼굴을 살폈다.
모두들 현 아카데미 2학년 중에서 최상위의 무력을 자랑하는 이들.
세실과 함께 아카데미 바깥을 돌아다니며 수많은 던전을 공략했던 자들.
자라나 기사가 된다면 전장에서 혁혁한 공을 세울 것이 분명한 무인들.
“준비는 됐나?”
파티원들의 입가에 새겨진 자신만만한 웃음을 본 그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금 앞을 바라봤다.
세실은 오늘 이 순간을 위해 철저히 준비를 했다.
루시 알른을 쓰러트리는 것으로. 과거 1왕자가 세워두었던 최단의 기록을 자신이 갱신하는 것으로.
유능을 증명하기 위하여.
무능을 불식하기 위하여.
“움직이자.”
*
“저희를 생각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알른 영애. 이 대결에 끼어든다해서 불이익을 볼만큼 저희는 약하지 않습니다.”
“그렇다. 루시 알른. 여지까지 내가 성장하는 데에 준 은혜가 있는데 작은 형님의 투정 쯤이야 가뿐히 받아줄 수 있다.”
“잘은 모르겠지만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내가 아카데미를 혼자서 공략하려한단 이야기를 들은 조이와 아서는 이 판단을 자신들을 향한 배려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괜히 2왕자와 엮이게 되면 그들에게 피해가 갈까봐 내가 혼자 모든 걸 부담하려 한다고 말이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그저 혼자서 던전 안에 들어가는 것이 편하기에 혼자이기를 택한 것 뿐인데 이런 오해를 사게 될 줄은.
이미 마음속으로 결론을 낸 이들을 설득하기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어떤 식으로 설명을 하더라도 속마음을 들키는 게 부끄러워 내뱉는 변명이 될 뿐이었으니까.
“네가 언제부터 다른 사람을 신경 썼다고 그러는가!”
“맞아요. 평소처럼 행동해주세요. 영애.”
‘아니. 진짜라고요!’
“왜 말을 못 알아듣는 거죠? 여러분 같은 허접들이 저한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세요? 자존감이 너무 높다 못해 하늘을 찌르시네요.”
“하. 진짜 고집도 강하군.”
“영애께서 저희를 배려하는 건 알겠지만…”
“맞아. 맞아. 나도 같이 던전에 들어가고 싶어.”
그래도 저들을 설득하는 과정이 싫지는 않았다.
조이와 아서의 오해가 나를 향한 호감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만일 이 두 사람이 나를 좋게 생각하지 않았더라면 2왕자의 미움을 살 각오를 하고서 나를 돕겠다는 이야기를 할 리가 없잖은가.
프레이? 쟤는 2왕자가 자길 미워하든가 말든가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냥 나랑 같이 던전에 들어가고 싶을 뿐.
지난 번 허접 검사에서 바보 검사로 승격한 후부터는 이상할 정도로 나를 따라다니는 녀석이니까. 던전 공략도 같이 하고 싶은 거겠지.
던전을 공략하다가 위기가 찾아온다면 그 때 도움을 청하겠다는 이야기로 간신히 친구들을 설득한 나는 혼자서 아카데미 던전에 들어오는 데에 성공했다.
아카데미 던전에 발을 들인 순간 처음으로 느낀 것은 추위였다.
갑옷의 틈새 사이로 들어온 냉기는 피부를 뚫고 들어와 뼈를 시리게 만들었다. 그를 느낀 나는 신성을 겉에 둘렀다.
태양과도 따스한 온기를 품은 신성은 자연스레 추위를 몰아내 주었으니.
나는 겨울의 한 가운데에서도 포근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서 주변을 둘러보면 설원의 풍경이 보였다.
어디가 끝인지도 명확하지 않은, 지나도 지나도 눈 밖에 보이지 않는 설원의 풍광이 말이다.
자아. 얼어 죽은 나무의 위치를 확인하는 걸로 현재 위치의 파악은 끝마쳤고.
어디 한 번 내달려볼까.
그리 생각을 하면서 몸을 풀고 있으려니 할배가 나를 불렀다.
<여아야.>
‘네?’
<정말로 저들을 배려한 것이 아니더냐?>
아니 할배까지 왜 그래요? 예전부터 혼자서 들어가는 게 편할 것 같다고 할배한테 이야기 했었잖아요!
정치에 서투른 제가 2왕자의 미움이니 뭐니하는 걸 신경 쓸 거라고 생각해요?!
아니라고요!
<아니. 그렇지만 말이다. 던전이라는 것은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공략하기 편한 게 사실이지 않으냐.>
‘그거야 그렇죠.’
<그런데 굳이 혼자서 들어오겠다 그러니 타인을 배려한 거라 생각할 수밖에 없지 않나.>
‘…으음. 이게 그러니까.’
인원이 많다는 것은 그 자체로 무기다.
실제로 내가 소울 아카데미라는 게임을 할 땐 제약 플레이를 하는 순간을 제한다면 언제나 파티를 풀로 채우고 다녔으니까.
스피드런을 한다 치더라도 사람이 많은 편이 낫기는 하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혼자를 택한 이유는 지금부터 내가 할 수많은 기상천외한 행동을 남들에게 설명할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었다.
‘말로는 설명하기가 어렵네요. 보면 아실 거에요.’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 여러 버프를 끝마친 나는 의도적으로 인기척을 내면서 앞으로 내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멀리에서 지면을 진동시키는 소리가 이 쪽으로 다가온다.
내 인기척을 느끼고는 이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다.
그리고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예티.
설원의 지배자라 불리는 마물.
특유의 압도적인 완력은 어지간한 오우거에 비견될 수준이라 하였으니.
던전의 1층에서 만날 만한 적은 아니다.
그런 녀석이 왜 이곳에 있는가.
아카데미 측이 또 다시 실수한 것은 아니다.
다만 2학기 던전 자체의 컨셉이 이럴 뿐.
아카데미 2학기 던전은 던전에 존재하는 여러 기믹을 경험하게 해주는 곳이다.
평범한 방식으로 공략할 수 없는 곳을 넘어서는 방법을 알려주는 던전이라는 이야기다.
이 예티도 마찬가지다.
이 놈은 잡으라고 던져둔 녀석이 아니다. 이 녀석을 피해서 던전을 공략하라고 넣어둔 녀석이다.
그러니 정상적인 공략법이라면 예티를 피해 출구를 찾아내는 것이 옳겠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 쿠오오오오.
오히려 방패를 치켜 든 채로 예티를 향해, 예티가 휘두르는 주먹을 향해 내달렸다.
<여아야?!>
그리고 예티의 주먹이 내게로 닿으려는 그 순간 미리 준비해 둔 스크롤 하나를 사용했다.
그 안에 담긴 마법은 경량화 마법.
내가 가볍게 할 것은 나의 무게. 마법이 작용함에 따라 달 위에 오른 것처럼 가벼워진 나의 몸은 예티의 주먹에 담긴 질량에 밀려나 허공으로 떠올랐다.
‘지금부터 쓰려는 건 대부분 이런 방식이라서요!’
이것이 나의 최단루트.
썩은물식 공략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