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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33

예린은 회색 사신을 품에 안고, 정원 너머로 보이는 붉은 안개를 바라보고 있었다.

예린은 붉은 괴인의 존재를 느끼지는 못했지만, 왠지 모르게 저 안개가 이곳으로 밀고 들어오려고 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고 있었다.

‘위험해 보여.’

불길해 보이는 붉은 안개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더니, 품 안의 회색 사신이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회색 사신은 따뜻한 황금색을 뿜어내며, 마치 잠든 것처럼 몸에 힘을 빼고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쿵. 쿵.

그 순간 정원 너머 붉은 안개 속에서 무언가를 강하게 내리치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소리를 발생시키는 존재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 결과만큼은 예린의 눈에도 보였다.

경계를 내려치는 붉은 괴인의 손은 보이지 않았지만, 거대한 손 모양으로 깨진 공간의 흔적이 똑똑히 보였다.

붉은 안개와 미니 사신 정원의 사이를 가르고 있던 경계가 갈라지고, 깨지기 시작했다.

‘괘… 괜찮은 거 맞지?’

예린이 품 안의 회색 사신을 꼭 끌어안으며 공포를 달래는 순간, 한없이 낮고 묵직한 진동이 공기를 진동시켰다.

우우웅.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어쩌면 불길하게 들릴 수도 있는 소리였지만, 이상하게 마음을 안심시켜 주는 소리였다.

예린이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의 근원을 향해서 고개를 돌리자, 거대한 검은 구체가 머리 위에 떠 있었다.

<불변하는 검은 공>

예린의 기억 속에 있던 오브젝트였다.

구체는 천천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마치 잠에서 깨어나는 듯한 느린 움직임이었다.

“!”

그 순간 미니 사신 정원의 경계가 완전히 부서지며 붉은 안개가 밀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엄청 위험해 보이는 붉은 안개가 밀어닥치자, 예린은 회색 사신을 꼭 끌어안으며 홀린 것처럼 <불변하는 검은 공>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불변하는 검은 공>이 점점 빠르게 회전하다니, 강렬한 충격파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마치 안개를 밀어내는 아침 햇살처럼, <불변하는 검은 공>의 충격파는 붉은 안개가 접근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구체의 회전 속도가 어느 정도를 넘어선 순간, 그것은 폭발하듯이 찢어졌다.

<불변하는 검은 공>의 속에서 거대한 검은 손이 하나 뻗어 나왔다.

그림자 같은 질감을 가져서, 마치 응집된 어둠 같은 검은 손은 격렬한 기세로 <불변하는 검은 공>을 찢어발겼다.

찢겨진 틈 사이로 걸쭉한 검은 액체가 쏟아져 내렸다.

진한 석유의 질감을 가진 그것은 <불변하는 검은 공>에서 지면까지 매끄러운 곡선으로 흘러내리며 바닥에 퍼져나갔다.

그렇게 주변을 순식간에 새카만 웅덩이로 바꿔버렸다.

그리고 어느새 검은 사신들이 예린의 주변에 모여서 잔뜩 들뜬 표정으로 폴짝폴짝 뛰고 있었다.

‘강한 엄마!’

<불변하는 검은 공>에서 더 이상 액체가 흘러나오지 않게 된 순간, 새카만 웅덩이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일어섰다.

그림자 같아서 입체감을 느낄 수 없는 형상.

바닥에 퍼진 웅덩이에서 뿌리내린 것처럼 단단히 고정된 하체.

바닥에 닿을 것처럼 길쭉한 두 팔.

하얗게 빛나는 두 눈.

그리고 그림자의 머리 위에 얹어진 3쌍의 빛의 고리.

세상의 모든 어둠과 악몽을 그러모은 것 같은 형상의 그림자였다.

하지만 예린은 이상하게 그 그림자가 회색 사신처럼 느껴졌다.

아니, 확신했다.

‘와, 거대한 사신이!’

빛나는 두 눈과 심장 때문일까?

예린 자신도 왜 그런 기분이 드는지 몰랐지만, 저 그림자가 해롭지 않다는 것은 자신할 수 있었다.

‘엄마!’

검은 사신들이 저 그림자 괴물을 바라보면서 너무 반가워서 광란에 빠진 것처럼 야단법석을 피우고 있었으니까.

그림자는 마치 왕처럼 천천히 주변을 내려다보았다.

당장이라도 밀어닥칠 것 같은 붉은 안개와 바닥을 가득 채운 검은 그림자.

그림자는 그것을 보며 천천히 손을 앞으로 뻗었다.

***

나는 두 눈을 꼭 감고 예린이의 장작을 마구 태워 가며 <불변하는 검은 공>에 누워있던 거대한 시체를 불러내었다.

그러자 정원의 하늘에 떠 있던 <불변하는 검은 공>이 내 머리 위로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공간과 공간을 이어 붙인 것처럼, 흐릿한 실루엣으로 보이다가 점점 뚜렷해졌다.

불러내는 것만으로도 장작이 엄청난 속도로 소비되고 있었지만, 예린의 품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가 나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강해지는 예린이의 장작력은 어느새 거대 시체를 다룰 수 있을 정도로 증가한 상태였다.

나는 머리 위에 떠 있는 <불변하는 검은 공>을 올려다보며,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왔는가, 보디.’

그리고 의지를 본격적으로 불어넣어서 불변구 쪽으로 의식을 옮겼다.

그러자 검은색으로 가득한 구체 내부에서 눈을 뜰 수 있었다.

회색 사신의 몸으로 들어갔을 때는 정말 끝도 없이 넓어 보였던 구체의 내부였지만, 시체의 눈으로 바라보니 너무나도 비좁게 느껴졌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공허와 적막.

우주를 아우르던 전능감에 비하면 너무나도 좁은 공간.

아마 인간식으로 생각해 보면, 이 공간은 제대로 눕지도 못하고, 제대로 서지도 못하고, 손을 끝까지 뻗지도 못하는 감옥 같았다.

쿵.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공간 내부가 마치 찢어지는 것 같은 충격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불변하는 검은 공>의 외벽에 손을 올리고 꾹 누르자, 거대한 육체가 점점 외부로 흘러 나가기 시작했다.

좁디좁은 <불변하는 검은 공> 내부에만 머무르던 감각이 미니 사신 정원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불변하는 검은 공> 속에 있던 마지막 육체 한 조각마저 밖으로 빠져나오자, 미니 사신 정원을 가득 채운 감각은 서울을 넘어 지구 전체를 뒤덮기 시작했다.

‘아.’

다시 한번 전능감이 온몸에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구가 얼마나 시끄럽고 소란스러운지 느낄 수 있었다.

온갖 종류의 염원, 열정, 희망.

온갖 종류의 절망, 질투, 고통.

그것은 거대한 흐름이 돼서 내 몸 안으로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어느새 내 시야는 회색빛 염원의 흐름으로 가득 차버렸다.

그 압도적인 흐름 속에서 나는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었다.

그 압도적인 염원 속에서 나 자신을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도대체 뭘 해야 하지?’

‘내가 뭘 하고 있었지.’

그런 회색빛 격류 속에서 가장 밝고 하얗게 타오르는 불꽃이 등대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자애로우신 아버지시여, 제 기도를 외면하지 마소서.]

[제 영혼을 구원하소서.]

가장 명확하고 강렬해서, 이정표가 되어주는 빛이었다.

내가 등불을 붙잡으려는 순간, 목소리가 들려왔다.

[와, 거대한 사신이!]

[엄마!]

그곳에는 따뜻한 황금색으로 빛나는 불꽃이 있었다.

그 황금 불빛을 강하게 움켜쥐자, 회색으로 물든 격류 속에서 빠져나와 미니 사신 정원에서 눈을 뜰 수 있었다.

‘엄마!’

즐거운 것처럼 폴짝폴짝 뛰며 좋아하는 검은 사신들.

내 원래 몸을 꼭 끌어안고 나를 바라보고 있는 예린이.

그리고 당장 쏟아져 들어올 것처럼 넘실거리는 붉은 안개.

이제서야 내가 어디를 딛고 서 있는지 명확히 알 수 있었다.

검은 사신들은 내가 이 육체를 조종하는 것이 정말로 즐거운 건지 미쳐 날뛰고 있었는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그렇게 좋아하다가도, 이 육체로 검은 사신을 내려다보면 겁을 먹은 것처럼 오들오들 떨었다.

시선이 떨어지면 다시 광란.

음, 미니 사신은 아직도 너무 이해하기 힘드네.

예린이는 이 육체를 조종하는 것이 나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역시 예린이야.

그리고 시선을 돌려서 붉은 안개를 바라보자,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렇게나 위협적이었는데.

그렇게나 강력했는데.

지금의 나에게는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했다.

공간, 차원, 규칙, 인과.

그 모든 것이 다른 곳에서 넘어온 외부의 존재에 불과했다.

이 땅에 발을 딛고 서는 것 자체가 힘든 존재.

나는 저 붉은 괴인과 붉은 안개를 치워버리기 위해서, 양손을 들어 올려서 붉은 괴인이 존재하는 공간 전체를 붙잡았다.

붉은 괴인은 빠져나가려고 마구 발버둥 쳤다.

회색 사신의 육체로 사용한 평범한 공간 고정이었다면, 시공간에서 자유로운 붉은 괴인은 금세 빠져나왔겠지.

하지만 시체의 몸으로 사용하는 공간 고정은 단순히 공간만 붙잡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를 붙잡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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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히, 못 가!’

그리고 내 머리 위에 떠 있는 헤일로에 장작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회색 사신일 때는 할 수 없었던 것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헤일로 위에 장작을 모으기 시작하자, 검은 사신들도 검은 시체의 형상을 취하더니 머리 위로 장작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장작이 임계점에 도달하자, 하얗게 빛나는 광선이 돼서 붉은 괴인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강한 엄마 빔!’

‘엄마 빔!’

그리고 동시에 검은 사신들도 똑같이 노랗게 타오르는 빛을 쏘아 보냈다.

물리적 실체를 가지지 않은 그 광선은 붉은 괴인과 지구의 연결 자체를 끊어버리고, 공간에 거대한 구멍을 뚫어버렸다.

그 구멍 너머에는 온갖 색채가 뒤엉킨 세계가 언뜻 비쳤고, 붉은 괴인과 안개는 모두 그 세계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붉은 안개가 균열 너머로 날아가자, 마치 시간을 되감는 것처럼 붉게 뒤틀리고 망가진 공터는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붉은 괴인은 거대한 팔로 허공을 강하게 붙들고, 빨려 들어가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 ■ ■ ■ ■ ■ ■]

입을 크게 벌리고 나를 향해 뭔가를 소리치는 것 같았지만, 그 입에서는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았고 이해할 수 없는 염파만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붉은 괴인은 날카로운 손톱을 공간에 박아 넣기까지 했지만, 균열의 인력은 그런 것으론 버틸 수 없었다.

붉은 괴인이 붙잡은 공간이 통째로 뜯어져 나가며, 균열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붉은 괴인이 공간의 저편으로 사라지기 무섭게 균열은 사라져 버렸다.

‘드디어 끝났네.’

그렇게 생각하며 바닥을 내려다보자, 검은 사신들이 ‘이겼다!’라고 의지를 뿜어내면서 폴짝폴짝 뛰고 있었다.

이제 원래 몸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네.

그대로 몸을 돌려서 불변구 속으로 돌아가려는 순간.

쿵!

공간이 찢어지는 묵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시 한번 공간이 찢겨져 나가며, 붉은 괴인이 손을 뻗어왔다.

한 손으로는 균열의 경계를 잡아 찢고, 남은 한 손은 시체의 한쪽 손을 단단하게 붙잡고 있었다.

[■ ■ ■ ■ ■ ■ ■]

[■ ■ ■ ■ ■ ■ ■]

붉은 괴인은 내 손을 붙잡은 채, 발악하는 것처럼 염파를 뿜어내고 있었다.

순간 나도 저 공간 속으로 끌려들어 가버릴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시체의 손이 저절로 움직여서 공간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그러자 붉은 괴인은 별다른 반항도 하지 못하고 무력하게 공간의 저편으로 빨려 들어갔다.

커다랗게 찢긴 공간 너머로 빨려 들어가는 붉은 괴인.

괴인은 균열이 완전히 닫힐 때까지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후.’

장작 대부분을 소비해 버려서 느껴지는 탈력감을 느끼며 점점 회복되어 가는 공간을 바라보았다.

‘예린이가 있어도, 장시간 조종하는 건 힘들 것 같네.’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인지, 이상하게도 장작의 소비 속도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마치 장작이 조금씩 다른 곳으로 흘러가서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시체가 자꾸 멋대로 움직이려고 해서 점점 컨트롤이 힘들어지고 있었다.

‘뭐, 그래도 나를 목표로 습격해 온 녀석들을 무사히 물리쳤으니 해결이겠지.’

나는 한층 후련해진 감정을 가지고, 다리가 돋아난 붕대 덩어리들이 뛰어오는 것을 바라보며 시체와의 연결을 끊었다.


           


Seoul Object Story

Seoul Object Story

서울 오브젝트 이야기
Score 9.2
Status: Ongoing Type: Author: Artist: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Humans, once the masters of Earth, were losing their place to the inexplicable phenomena known as Objects. And this is a story about becoming an Object and living worry-free in the Seoul of such a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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