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34
현재 위치 93층.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것으로 시간을 단축하는 중인 나는 자유 낙하라는 게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스릴 넘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처음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질 때는 원래 이랬으니까. 라는 가벼운 마음이었지만 끝도 없이 떨어지다 보니 서서히 생각이 바뀌네.
다음번에 비슷한 일이 생긴다면 좀 더 안전한 루트를 고르자.
이건 두 번 할 짓이 아니야.
<여아야.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다만.>
위쪽으로 흩날리는 기다란 머리카락을 구경하고 있으려니 할배가 목소리를 냈다.
‘왜요? 짧게 해 주세요. 이제 타이밍 맞춰야 돼서 좀 빡세거든요.’
나라고 해도 낙하의 충격에서 온전할 수는 없다. 이를 중간에 상쇄시키지 못하면 그대로 낙하 데미지를 받아 리타이어하겠지.
아카데미의 던전이니 충격을 받는 순간 던전 바깥으로 내쫓기는 걸로 끝이겠지만 이 낙하를 두 번이나 경험하고 싶진 않은지라 되도록 한 번에 성공한 후 끝마치고 싶다.
<그럼 일이 끝나고 물으마.>
이제 절벽에서 뛰어 내리고 20초가 지났으니까. 슬슬 인벤토리에서 스크롤 하나 꺼내 두자.
미리 준비를 해두고서 얼마 지나지 않아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기나긴 낙하의 끝이 보였다.
회색 빛의 암석으로 이루어진 바닥이 나타난 것이다.
아직이다.
아직 스크롤을 해방할 때가 아니다.
좀 더 아래로.
더 아래로.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가.
…
지금!
타이밍에 맞추어 스크롤 안에 존재하는 마법을 해방시킨다.
내가 일으키고자 하는 것은 폭풍.
아래에서 위로 솟구치는 거대한 계곡의 바람.
중력을 따라 가속하던 나의 몸이 서서히 속도를 줄여간다.
이윽고 낙하의 속도에 0에 수렴했을 때는 내 몸이 바닥으로부터 3미터가량 떠 있는 순간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스크롤의 마법이 끝나고 다시금 중력의 영향 아래에 들어선 내가 바닥에 착지한다.
겁을 먹는 바람에 살짝 빨리 써버렸네. 게임이었으면 낙하 데미지를 입었을 거야.
확실히 모니터 너머에서 마우스를 딸깍하는 거랑 직접 쓰는 거랑은 차이가 심하네.
진짜 목숨을 걸어야하는 순간이 아니라면 안전한 길을 고르는 게 맞겠다. 이런 건 조금 실수하면 그대로 죽어버릴 테니까.
난 낙하의 영향으로 엉망이 되어버린 머리를 정리하며 할배를 불렀다.
‘그래서 할아버지. 하고 싶은 말이 뭔데요?’
<아카데미의 교수 중에서 이 곳을 관리하는 이가 존재하더냐?>
‘있죠?’
<그럼 그 자는 그대의 공략을 모두 다 구경하고 있겠구나.>
‘…어. 그렇겠죠?’
<분명 후일 그대에게 여러 가지를 묻겠구나.>
할배의 이야기를 듣고 상상을 해보았다.
내가 던전을 만든 사람인데 다른 누군가가 이를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공략하는 모습을 말이다.
우선은 내가 뭘 보고 있는 건가 싶을 테고. 신기하다 못해 어이가 없어질 테고. 이윽고 저 미친년이 누구인지 궁금해질 테고. 마지막에 그 년이 바깥으로 나오면 끌고 가서 이것저것을 따져 물을 것이다.
대체 어떻게 그런 공략 방식을 떠올릴 수 있었냐 묻기 위해서.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죠?!’
난 내 공략방식을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이게 게임이었다면 이런 이런 방식으로 공략했다고 자랑스레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이 곳은 게임의 세상이 아니지 않은가!
<그걸 왜 나에게 묻느냐. 나도 모른다. 자신 없다.>
‘그런!’
으으. 이미 저질러 버린 일을 되돌릴 순 없다.
병신왕자와 관계된 일이 끝나면 천천히 고민을 해보자.
정 안 되면 재수 없는 천재 컨셉으로 나가지 뭐.
이런 발상도 못 떠올렸다고? 허접 아카데미의 허접 교수답네. 같은 식으로 말이야.
분명 꿀밤 마려운 모습일 테지만 어떡하겠어. 방법이 없는데.
한숨을 내쉬면서도 내 발은 계속해서 앞으로 향했다. 아카데미 던전의 끝을 향해서.
방금 전 절벽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93층에서 99층까지의 공략을 스킵 해버렸으니 이제 남은 것은 하나뿐이다.
100층.
던전의 마지막을 지키는 보스가 도사리는 곳.
<쉬지 않아도 괜찮겠느냐?>
내가 바로 보스룸으로 향하는 손잡이를 붙잡자 할배가 걱정된다는 듯 목소리를 냈다.
할배의 판단은 옳았다. 지금 내 상태는 만전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있었다.
아무리 내가 체력이 좋다고 하지만.
아무리 내가 정상적인 루트를 타지 않고 온갖 기행을 펼쳤다지만.
겨우 반나절 만에 1층에서 100층까지 내달린 것이다.
지쳐서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최선이라 하기도 어렵지.
보통이라면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서 체력을 보충한 후에 앞으로 가는 것이 옳으리라. 허나 난 그러지 않았다.
기록에 미친 것은 아니었다. 스피드 런이라면 과거에 지긋지긋할 정도로 해봤으니까. 이미 그에 대한 집착은 버린 지 오래다.
그럼 왜 굳이 쉬지도 않고 이 앞으로 가려 하는가.
이에 대한 답변은 무척이나 간단했다.
이 앞에 존재하는 보스를 상대하는 것은 지금 이 상태로도 충분히 할 수 있으니까.
‘걱정 마세요. 금방 끝날 테니까.’
<또 무슨 기행을 펼칠 생각이더냐.>
‘기행은 아니에요.’
이 곳에 글리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건 게임 속에서나 가능한 방법이다. 현실에 적용시킬 수는 없다.
<그럼?>
‘정공법이요.’
마지막이니만큼 메이스를 좀 휘둘러 봐야지.
문의 손잡이를 붙잡은 나는 능숙하게 전투를 준비했다.
몸 안에 신성을 퍼트리고.
여러 신성 마법으로 몸을 강화하고.
물약을 마시는 것으로 체력과 마력을 보충하고.
마지막으로 메이스 위에 신성을 두른 후. 문을 열었다.
그러자 방 한 가운데에 자리한 검은 것이 보인다.
여러 기믹을 알려주는 2학기 던전의 최종 보스.
부정이 결합된 존재.
저 녀석은 여태까지 존재하는 수많은 기믹을 제대로 공략했는지를 시험하는 상대다.
본래라면 1층에서 99층까지의 모든 기믹을 돌파해야지 쓰러트릴 수 있는 귀찮은 보스지만 그 이외에도 방법이 존재한다.
저 녀석의 불길한 외형을 보면 알 수 있는 내용이지만 저 놈 사령계열의 보스거든.
그러니까 일정 수준 이상의 신성이 있다면 단순한 힘대결로 끌고 갈 수 있지.
내가 방 안으로 발을 들인 순간 문이 닫히고 어둠 속에 자리한 보스가 붉은 색 미소를 짓는다.
그를 본 나도 함께 웃음을 지어 주었다.
“웃는 것만으로 사람을 역겹게 할 수 있다니♡ 이 던전은 역겨운 상대일수록 더 높은 곳에 있는 건가 보네♡ 최상층이 잘 어울린다♡”
뚝배기를 깰 시간이다.
*
다음 계층으로 향하는 문이 나타난 걸 확인한 세실은 오러를 거두어들이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던전에 들어오고서 한 나절에 가까운 시간 동안 거의 쉬지 않고 계속해서 움직이며 공략을 거듭했다.
아무리 육체적인 부분에서 뛰어난 세실이라 할지라도 힘듬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다른 파티원들의 경우에는 상태가 더 심각했다. 보스의 죽음을 확인하고서 쓰러지듯 바닥에 널부러진 이들은 거친 숨을 내쉬느라 말 한 마디 내뱉는 것조차 어려운 상태.
그를 살피던 세실은 이 이상 공략을 진행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확신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하다. 첫 날에 절반 이상의 던전을 공략한 것이다. 내일이면 아카데미 던전의 끝을 볼 수 있겠지.
하. 아카데미 역사에 남을 새로운 기록을 세우는 것인가?
루시 알른을 짓뭉개고, 과거 형님이 만들어 둔 기록마저 지워버리고, 그 위에 내 이름을 새기는 것인가?
그 모습을 상상하던 세실은 검에 기댄 채로 웃음을 흘리다 이내 파티원들을 향해 목소리를 냈다.
“돌아가지. 오늘은 철저히 휴식을 취하고 내일 끝을 본다.”
던전의 바깥으로 나온 세실은 저녁노을이 내리 쬐는 것을 구경하다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순위를 확인하려는 것이다.
당연히 맨 위에는 나의 이름이 적혀 있을 터이다만 과연 루시 알른의 이름은 어디에 있을까.
그녀의 능력을 생각해본다면 내 바로 아래를 따라오고 있을 가능성이 높긴 한데.
그리 생각을 하며 순위 쪽으로 시선을 돌린 세실은 거기에 적힌 글귀를 보고서 그대로 굳어버렸다.
예상이 틀렸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일부는 맞았고 일부는 틀렸다고 해야겠지.
세실의 이름과 루시의 이름은 1등과 2등에 나란히 적혀 있었지만 그 순서는 반대였다.
[루시 알른. 현재 100층. 공략 완료]
[세실 솔라딘. 현재 60층. 공략 진행 중]
위에 있는 것이 루시 알른. 아래에 있는 것이 세실 솔라딘.
세실이. 온갖 추잡한 수를 써가며 승리를 추구한 세실이. 루시에게 패한 것이다.
공략 완료?
공략을 끝냈다고?
채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이건 도대체 무슨 종류의 악몽이지?
순위를 확인한 세실이 그대로 굳어버린 그 순간 뒤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약간 높고, 선명하며, 아름다우나, 그렇기에 더욱 얄밉게 들리는 목소리가.
“이제야 나오셨나요? 레이디를 기다리게 하다니 참 예의가 없으시네요. 아니지. 예의를 지킬 수 없을 정도로 무능하신건가?”
루시 알른.
세실과 경쟁을 하기로 한 상대.
세실이 이번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기기로 결심한 존재.
그녀는 던전에 들어갔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깔끔한 차림새를 한 채 세실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그 모습을 본 세실의 입에서 자연스레 목소리가 새어 나온다.
어떻게 벌써 던전을 공략한 것이냐고.
말이 안 되지 않으냐고.
던전의 길?
그건 세실도 알고 있었다.
공략법?
이 또한 마찬가지다. 그도 알고 있었고 공략을 위한 준비를 해갔다.
보스를 사냥하는 방법?
모두 다 알고 있었다.
그러니 조건은 완벽하게 똑같았을 터. 그렇다면 전체적인 스펙이 더 높은 우리 쪽이 더 빠른 게 정상이지 않은가.
그런데 어째서.
왜.
루시 알른이 우리를, 나를 추월한 것인가.
도대체 왜!
“교수를 데리고 들어간 것인가?”
“죄송하지만 전 병신왕자님과 다르게 이딴 허접 던전을 공략하는 데 도움이 필요하지 않답니다. 혼자서도 충분하죠. 전 유능한 천재거든요. 누구랑 다르게.”
“부정한 수단을 사용한 것인가?”
“부정이요? 방금 말씀드렸잖아요. 전 병신왕자님이랑 다르다니까요?”
혼자서 던전에 들어갔다.
부정한 수단은 사용하지 않았다.
그런데 나보다. 우리보다. 더 빠르게 던전을 공략했다고?
말이 안 되지 않나.
아무리. 아무리 그대가 유능하다 할 지라도 정도가 있다.
다른 모든 조건이 같은데 이만한 격차가 날 수 있을 리가 없단 말이다!
이만한 차이가 나려면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
그대가 나보다 뛰어난 무력을 지닌 것이 아니라면 이런 일은!…
눈에 실핏줄을 새운 채 가만 루시 알른의 얼굴을 노려보던 세실은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어서는 루시를 가리켰다.
“증명해라.”
“뭐를요?♡ 병신왕자님의 무능함을요?♡”
“네가 나보다 강하다는 것을. 그렇기에 압도적인 성적을 거두는 게 당연하다는 것을.”
결투를 신청하겠다.
가만 세실의 검 끝을 바라보던 루시는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한심함이 담긴, 추하단 생각이 담긴, 귀 안으로 파고들어 진득하게 들러붙는 듯한 비웃음을.
세실의 미간이 찌푸려지는 것조차 신경 쓰지 않고 계속해서 웃음을 흘리던 그녀는 이내 손으로 입을 가리고는 눈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싫은데요?♡”
“…뭐?”
“제가 왜 그래야하죠?♡ 병신왕자님의 무능이 이미 입증되었는데 거기에 쐐기를 박고 싶진 않다고요♡ 배려심이란 거죠♡”
“…”
“뭐어. 정 부탁을 하고 싶으시다면 그에 걸맞는 정중함을 보이셔야하지 않을까요?♡ 제 발이라도 핥으실래요?♡ 아 이건 안 되겠네요♡ 기분 나빠서 무리에요♡”
노을빛보다 벌겋게 얼굴을 물들인 세실이 발을 움직임에 따라 그의 검 위에 검은 색의 오러가 서린다.
여지까지 수많은 적들의 머리를 갈라버렸던 압도적인 위력의 검.
던전을 공략하던 과정에서 많은 소모가 있었기에 과거보다 약해졌다 하더라도 여전히 강력한 검.
세실이 그 무엇보다 자신 있어 하고 자랑스러워 하는 검.
그 검이 루시 알른을 향해 내질러졌지만.
“기습이라니♡ 추잡한 것에도 정도가 있지 않을까요?♡ 아아. 병신왕자님은 정도조차 모르는 바보였던 거군요?♡ 큽. 이해가 되네요♡”
그 검은 루시 알른에게 닿지 못했다.
어느새 그녀가 꺼낸 하얀 색으로 빛나는 방패가 세실의 검은 검을 가로막아 버렸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