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35
신성이 담긴 메이스로 100층 보스의 머리를 깨부숴주고 나니 던전 최초 공략에 대한 보상이 주어졌다.
2학기 던전의 보상은 심플 오브 베스트 그 자체였다.
금화.
4인 파티 기준으로 한 사람 당 100개이니 지금 내 수중에는 400개에 금화가 단번에 들어온 것이다.
압도적으로 많은 돈을 손에 쥔 나였지만 지금은 이 많은 금액 앞에도 허무할 뿐이었다.
이게 지난 번 경매 때 있었다면… 아니다. 그래봐야 석판을 사지는 못했을 거야. 상대는 대륙 제일의 거상 중 하나니까.
<어째 지난번에 보았던 사령술사보다 약한 것 같구나.>
‘단순 스펙만 따지면 그럴 걸요?’
저 녀석이 상대하기 귀찮은 이유는 어디까지나 기믹형 보스이기 때문이다.
기믹을 건너뛰어 버리면 스펙 자체는 별 거 아니지.
묵직한 가죽 주머니를 인벤토리에 던져 넣은 나는 할배에게 가벼이 대꾸하면서 메시지 창이 떠오르길 기다렸다.
아카데미 던전을 완전 공략함에 따라서 이미 내 승리는 확정된 상태. 그러니 보상이 주어지리라 생각했지만 허접 주신은 묵묵무답이었다.
뭐지? 고개를 갸웃거리던 나는 퀘스트 창을 다시금 열었다.
[2왕자를 참교육하라!]
[솔라딘 왕국의 2왕자가 승부를 걸어왔습니다! 그에게 자신의 위치를 알려주십시오!]
[2왕자를 굴복시켜라!]
다시 읽어보니까 퀘스트 완료를 위한 조건이 참 애매하네. 2왕자를 상대로 승리하라는 것이 아니라 2왕자를 굴복시키라는 거니까.
승리와 굴복 사이에는 커다란 격차가 존재한다.
전자는 2왕자가 어찌 생각하건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후자는 다르다. 후자를 클리어하기 위해서는 2왕자가 마음 깊은 곳에서 패배를 인정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
저 문구가 적힌 그대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면 일이 귀찮아 질 것 같은데.
다들 자주 하는 이야기처럼 불길한 예상은 틀리는 법이 없었다.
내가 아카데미 던전 바깥으로 나와 조이를 비롯한 이들에게 축하를 받을 때에도 보상은 주어지지 않았다.
정신을 반쯤 놓아버린 것 같은 던전학 교수가 찾아와 내 업적을 치하해 줄 때도 마찬가지였다.
보상은 주어지지 않았다. 그 대신 후일 던전학 교수와의 면담 시간이 잡혔지.
그로부터 몇 시간이 더 지나서 노을이 질 무렵. 2왕자가 바깥으로 나와 순위표를 확인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자신의 패배를 인식했음에도 불구하고 허접 주신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쯤 되니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굴복이라는 단어가 말 그대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걸 말이다.
그래서 2왕자를 도발했다. 그가 나에게 무기를 휘두르게 만들었다.
2왕자는 병신이지만 그와 동시에 무인이다. 개인의 강함을 제 일의 가치로 놓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그만큼 자신의 강함에도 드높은 자존심을 지닌 그를 굴복시키기 위해서는 정면에서 박살내주는 것이 제일 쉬울 터.
2왕자가 던전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시비를 건 것도 그의 자존심을 짓밟기 위해서였다.
던전 공략을 진행하느라 여러모로 소모가 되었을 지금이야말로 내가 압도할 수 있는 순간일 테니까.
방패에 둘러진 신성을 뚫기 위해 필사적인 검은 색의 오러를 본다.
2왕자의 검은 무겁다.
위력 하나만 놓고 보면 지금의 프레이와 비교할 수 없을 수준.
순수한 검술 실력이야 프레이가 뛰어날 수 있겠지만 승부를 겨룬다면 패하는 건 프레이이지 않을까.
이 스펙의 차이를 기술로 극복하긴 어려울테니.
만전의 상태였다면 꽤나 위협적이었을지도 모르겠네.
허나 그건 어디까지나 만전일 때의 이야기다.
던전을 공략하느라. 60층까지 쉴 새 없이 올라가느라 지칠대로 지쳐버린 2왕자의 검은 결코 내 방패를 뛰어넘지 못한다.
“2학년의 오러도 별 거 아니네요♡ 이걸로 뭘 베는 게 가능한가요?♡ 딱정벌레의 껍질에도 튕겨나올 것 같은데♡ 벌레 왕자님?”
까득. 하고 이빨을 가는 소리와 함께 2왕자가 검을 쥔 손에 힘을 더한다.
자신의 힘으로 방패를 찍어 눌러 볼 생각이겠지만 난 그를 허용하지 않았다.
힘대결을 해줘도 상관은 없지만 그래서야 비등해지고 마는 걸.
그래선 곤란하다.
난 완벽하게 2왕자를 압도해야 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패배했다고 생각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2왕자의 자존감을 박살내야 한단 말이다.
상대를 굴복시킨다는 건 그런 거니까.
방패에 정신이 팔려 훤히 드러난 2왕자의 복부를 걷어차 주었더니 그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라서는 저만치 날아간다.
예상외의 충격이었을 텐데도 2왕자는 깔끔하게 낙법을 쳐서 아무 상처 없이 바닥에 착지했다.
거리가 벌어짐에 따라 잠시간 생겨난 소강상태.
허나 우리 둘 사이에 개입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미리 이리 될 것을 예고해 뒀으니까.
만일의 사태를 지켜보고 있는 교수도. 다른 학생들도. 조이를 비롯한 친구들도. 이 전투를 가만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보통이라면 이쯤에서 무언가 이상을 눈치 채야 할 터이나 2왕자에게 그럴 여유는 없다.
메스가키 스킬의 도발은 메네스테일의 보스였던 카리아에게도 먹혀들어가던 스킬이다.
그 때의 그녀와는 비할 수 없이 나약한 2왕자가 도발을 견딜 수 있을 리 없잖은가.
이미 그의 이성은 날아가 버렸다.
그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것은 오롯이 하나.
나를 박살내 버리겠다는 것.
저 개같은 메스가키를 참교육 하겠다는 것.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만 그는 자신의 바람을 이룰 수 없다.
이 자리는 내가 참교육 당하기 위한 전장이 아니라, 2왕자를 참교육 하기 위한 전장이니까.
“루우시 알르으은!”
피가 뒤섞인 고함과 함께 2왕자가 맹렬히 돌진했다.
족히 내 두 배는 될 법한 2왕자의 덩치와, 그를 이루는 위압적인 근육과, 그 아래에 머무르며 2왕자의 힘을 증폭시키는 마력이 더해진 돌격.
어지간한 이는 눈으로 따라잡지도 못할 공세.
허나 난 그를 보면서도 태연했다.
2왕자는 소울 아카데미라는 게임에서 아군으로 쓰는 게 가능했지만 그보단 적으로 더 자주 만나게 되는 캐릭터였다.
그러니 당연히 저 녀석이 쓰는 기술에도 익숙할 수밖에.
저 돌진의 저스트 패링 타이밍은 발이 움직인 순간으로부터 0.8초 뒤.
그러니까.
지금.
채앵!
방패를 반으로 갈라버리기 위해 내질러진 2왕자의 검이 너무도 허무하게 허공으로 튕겨 나간다.
그에 따라 중심을 잃은 2왕자에게 수많은 틈이 생겨났다.
만일 2왕자가 만전이었다면 억지로 중심을 잡고 공세를 이어나갔겠지.
현실에선 저스트 패링에 성공해도 적에게 그로기를 먹일 수 없으니까.
허나 지금의 2왕자는 그러지 못했다.
분노에 미쳐 정신이 피로를 잊었다 하더라도 몸은 여전히 피로를 기억하고 있으니.
의지만으로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는 법. 난 그 틈새를 놓치지 않았다.
신성을 담은 방패를 이용한 타격.
두터운 철로 만들어진 방패는 그 자체로 훌륭한 둔기다.
이걸로 얼굴을 얻어맞는다면 어찌 되겠는가.
2왕자는 얼굴을 향하는 방패를 보고 자신의 미래를 확신한 듯 했다.
자기도 모르는 새에 눈을 질끈 감아버린 것이다.
허나 방패는 그의 얼굴에 닿지 않았다.
2왕자의 코뼈 바로 앞에 멈췄다.
내가 일부러 그렇게 조절했다.
왜?
굴욕을 안겨줘야 하니까.
내가 방패로 콧등을 툭하고 건드림에 따라 2왕자가 코를 부여잡은 채 뒤로 물러선다.
당혹과 의문이 서린 그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절로 웃음이 샜다.
“푸훗♡ 푸하핫♡ 아이처럼 눈을 질끈 감으시다니!♡ 우리 병신왕자님 겁먹으셔쪄요?♡ 우쭈쭈 해드리까여?♡”
“감히 나를 능멸하는가!”
전투가 이어진다.
검과 방패가 계속해서 부딪힌다.
몇 번이고 2왕자의 몸이 뒤로 물러선다.
이미 승패는 명확했다.
지칠 대로 지쳤고,
도발에 당해 이성이 날아가버렸으며,
생각을 잃고 마구잡이로 검을 휘두르는 중인 그는.
내게 닿을 수 없다.
내 방패를 넘을 수 없다.
그러기를 얼마나 반복했을까.
또 다시 넘어졌던 2왕자가 바닥을 짚는다.
“슬슬 귀찮은데 포기해주시면 안 될까요?♡ 여자애한테 구질구질하게 매달리는 남자만큼 추한 건 없다고요♡”
검을 땅에 박아서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2왕자를 보며 목소리를 냈지만 2왕자는 거기에 대꾸하지 않았다.
“왕자님…”
“무리입니다!”
“일단 물러서는 것이!…”
뒤 편에서 소리치는 2왕자 패거리의 목소리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분노에 잡아먹힌 듯 눈가의 동공마저 사라진 그는 이미 자기 의지로 멈출 수 없는 상태에 도달해버린 것이다.
귀찮게 됐네.
도발이 잘 통하다 못해 도발에 잡아먹혀 버릴 줄은.
이성이 아예 날아가버리면 굴복을 시키는 것도 불가능하잖아.
하아. 병신왕자 이 새끼 왜 이렇게 쓸데없이 근성이 넘치는 거야?
너 원래 이런 놈 아니잖아!
진즉에 난 쓰레기야를 외치면서 포기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왜 여태까지 버티고 서 있는 건지 모르겠네.
저를 쓰러트리기 위해선 정신을 날려야한다는 결론에 다다른 나는 교수진 측에 있는 루카에게 눈짓을 보냈다.
난 아직 힘조절에 자신이 없다.
상대를 박살내는 거야 자신이 있지만 정신만 날려버리는 건 어렵다는 소리다.
그러니 교수가 개입해 상황을 정리해주길 바란다는 의미였다만 루카는 저를 이런 식으로 해석했다.
“영애께서는 결코 끼어들기를 바라지 않는 모양입니다!”
아니.
저 새끼 뭐래는 거야.
도와달라니까?
2왕자 말려달라니까?!
왜 그딴 식으로 곡해하는 건데!
“자신이 시작한 일이니 끝도 자신이 내고 싶으신 거겠죠! 역시 알른 가문의 계승자입니다!”
야. 너 의도한 거지.
일부러 나 엿먹이려는 거잖아!
이 빌어먹을 분탕충 새꺄!
“…아직이다.”
어쩔 수 없이 목소리를 내려던 그 때에 2왕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수한 노력 끝에 결국 두 발로 일어서는데 성공한 그는 두 손으로 자신의 검을 쥐었다.
그러자 검 위로 검은 색의 오러가 덧씌워진다.
단순한 흑색의 오러가 아닌.
그 자체로 무게를 지녀 주변을 짓누르는 듯한 오러가 말이다.
자신만의 특색을 지닌 오러라니.
저건 지금 2왕자가 쓸 수 있는 게 아니잖아.
<극한에 가까운 상황 속에서 이루어내는 각성인가.>
허?
허어?
…
아니이이이!
왜 병신 왕자가 주인공마냥 위기 속에서 각성을 하는 건데!
내가 악역이야?! 악당이야!?
아니잖아!
온갖 치졸한 짓거리는 저 새끼가 먼저 했는데 왜 저 새끼가 멋진 장면을 뽑아내는 거냐고!
<전장에서 몇 번 보았던 것을 또 다시 보게 되다니.>
‘할아버지?! 구경하는 입장이라고 너무 여유로운 거 아니에요?! 지금 대 위기잖아요!’
<뭐 어떠냐. 못 막을 것도 아닌데.>
위기감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할배의 목소리를 들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할배는 날 너무 잘 안다니까.
심호흡을 하며 방패의 끝에 신성을 끌어 모았다.
지금부터 하려는 것은 과거 악신의 분노를 방패만으로 감당했다던 영웅의 어설픈 재현.
아직까지 신성 투술조차 완벽히 다루지 못하는 나이니 이 재현은 완벽과 한없이 거리가 멀지만.
괜찮다.
내 방패는 저 정도 공격에 부서질 정도로 허약하지 않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