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38
“오랜만이야. 고용주님. 아주 성대하게 일을 벌이셨더라?”
가게 안으로 들어가기 무섭게 카리아가 나를 맞이해주었다. 그녀는 웃으면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그 눈은 달랐다.
눈웃음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는 분명 나를 질책하고 있었으니까. 대체 왜 그런 정신 나간 일을 벌인 것이냐고 말이다.
미친 짓을 하긴 했지. 2왕자를 병신왕자라고 부른 것도 모자라서 그 녀석과 대결을 벌인데다가 대결 직후 시비를 걸어서 싸움까지 벌였으니.
“베네딕의 위장 내구도를 시험하고 싶은 거라면 차라리 독을 먹여. 걔가 이 소식을 듣고는 계속 날 불러대는 바람에 얼마나 귀찮았는지 알아?”
혹시나 일이 잘못될까 안절부절하는 베네딕 때문에 일을 할 수가 없었다고 투덜거리던 카리아는 얼마간 잔소리를 해대다가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결과가 나쁘진 않았으니까 여기까지만 할게. 대신 다음부터는 좀 생각하고 행동을 해주라.”
생각하고 행동한 건데. 할배랑 상의한 끝에 일을 저지른 건데. 이걸 설명해봐야 안 믿겠지? 그냥 아무 말 하지 말자.
“다시 본론으로 넘어와서 일을 크게 벌인 덕분에 고용주님의 무위가 빠르게 퍼져 나가고 있어.”
대륙 널리 이름이 퍼진 미친 년 루시 알른과 솔라딘 왕국의 2왕자 간의 대결은 여러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좋은 화제였고 이 사건이 널리 퍼짐에 따라 2왕자가 지닌 무재 그리고 그 무재를 압도한 나라는 사람이 지닌 재능 또한 함께 퍼져 나갔다.
아카데미의 던전을 하루 만에 정복한 일이라거나. 2왕자가 휘두른 특색을 지닌 오러를 가뿐하게 막아낸 일이라던가 하는 것이 말이다.
과거 파트란 축제에서 1왕자와 벌였던 대결에 이번의 일화가 더해짐에 따라 내가 지닌 재능을 의심하는 이가 사라지고 있다고 카리아는 설명했다.
“지금 고용주님의 대외적인 평가는 이래. 알른 가문의 사람답게 압도적인 무재를 지녔고, 머리도 잘 돌아가지만, 성격이 더럽고 제멋대로인 귀족.”
저 이야기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이거네.
실력 있는 썅년.
아카데미 내부에 한정되었던 그 평가가 대륙 전체로 퍼져가는 건가.
실력을 인정받은 거야 좋은 일이긴 한데 성격이 더럽다는 평가가 같이 붙어있다는 게 좀 미묘하네.
하긴 이번 일이 퍼지면서 내가 2왕자를 병신왕자라고 불렀단 사실도 같이 퍼졌을 테니 그 부분이 악화되면 악화됐지 완화될 리가 없나.
“교회와 관계된 내용도 몇 개 있어. 회개했다거나. 신실할지도 모른다거나. 교회에 호의적이 되었다거나.”
교회와 관계된 내용들은 대부분 긍정적인 것들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루시의 과거가 너무 처참하기도 했고 또 내가 최근에 보인 행보는 모두 교회에서 좋게 볼 수밖에 없는 모습이었으니까.
신의 계시를 받아 루엘의 메이스를 입수했고, 아그라의 저주를 두 개나 해주한데다, 막대한 양의 신성을 기반으로 하여 신성마법을 다루고, 페이비와 친하기까지 하니.
이 이야기의 주인이 루시만 아니었어도 누구나 신실한 신자라며 고갤 끄덕였을 걸.
“교회 측에서도 슬슬 주목하고 있는 것 같아. 알아둬. 고용주님.”
주목받고 있단 이야기를 들은 순간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교회의 주목을 받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지금의 교회는 신실한 사람을 바라지 않으니까.
…으음. 나중에 요한한테 나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를 전해달라고 부탁할까.
“아. 그리고 이것도 있어. 신께서 조각하여 내린 듯한 외모를 지닌 사람.”
‘…그건 뭔가요?’
“아줌마. 그건 또 무슨 헛소리야?”
“미와 예술의 사도께서 고용주님을 위한 노래를 만들어서 퍼트렸거든.”
아. 그 파트란 축제에서 만났던 변태.
길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아서 마음대로 하라 답하고 보내버렸는데 노래를 만든 거야?
“가사는 좀 괴악한데 노래는 좋아서 음유시인들이 자주 부르고 다녀. 한 번 들어볼래?”
순간 호기심이 생겨났지만 난 그 호기심을 억누르고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 노래를 들은 순간 내상이 심대할 것 같았으니까.
얼빠여우에 비견될 지경인 변태가 만든 노래다. 분명 그 안에 변태성이 그대로 묻어나 있을 텐데 굳이 그걸 듣고 싶지 않다.
“뭐 어쨌든 고용주님의 재능이 확실시 된 덕분에 다들 눈을 붉히고 있어. 고용주님은 베네딕의 딸이니까. 그 놈의 위용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베네딕의 자식에게도 기대를 가질 수밖에 없거든.”
아버지가 만들어 낸 영광을 그 딸이 이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잇는 것뿐만 아니라 더 큰 영광을 만들어 낼 가능성도 있다.
알른의 이름과 내가 이룬 여러 실적이 합쳐져 만들어낸 기대치는 나라는 사람의 주가를 확연히 올렸다.
홀로 전쟁의 판도를 바꾸던 괴물의 딸이다. 누구라도 자신의 아래에 두고 싶지 않겠는가.
다루기가 힘들다 할지라도 적이 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테니.
“오죽하면 2왕자님께 거대한 굴욕을 선사했음에도 불구하고 2왕비님께서 여전히 고용주님을 바라고 있을까.”
2왕자의 무재를 널리 떨치는 데 성공하긴 했지만 그건 결과물의 일부일 뿐 내가 2왕자에게 선사한 것은 득보다는 굴욕이 더 많다.
상황이 이러니 2왕자가 왕이 되길 바라는 2왕비의 입장에선 눈을 좁히는 게 정상이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그러기엔 내가 지닌 가치가 너무도 컸던 것이다.
“이제 본론이야.”
방금 전까진 느긋하게 이야기하던 카리아가 갑작스레 목소리를 낮춘다.
“알새틴이 고용주님을 2왕비님 쪽 사람한테 안내해 줄 거거든? 그럼 먼저 이번 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거야.”
그렇겠지. 이번 일이 널리 퍼졌다는 것은 곧 병신 왕자라는 호칭이 널리 퍼졌다는 것이기도 하다.
안 그래도 평가가 미묘한 2왕자 측에선 병신 왕자라는 호칭을 가볍게 넘길 수 없을 터.
“고용주님께 무척이나 힘든 일이란 걸 알지만 그래도 호칭 문제에 대해선 저자세로 나가야 돼. 알겠지? 저자세야. 최소한 그 쪽의 자존심을 지켜줘야 해!”
카리아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한 건 아니지만 난 차마 저기에 성의 있는 대답을 돌려줄 수 없었다.
메스가키 스킬이 저자세로 나가는 걸 허락 할 리가 없잖아. 그런 게 가능했다면 애초에 내가 2왕자를 병신 왕자라고 부를 일도 없었을 거라고!
“그 쪽에서도 길게 따지진 않을 거야. 어차피 이번 일에서 2왕자 쪽이 떳떳한 건 아니니까. 이 일에 대한 논의가 끝나면 그 다음엔 고용주님을 회유하려고 할 거야.”
내가 벌인 일에 대한 죄과를 들먹일 수도 있고. 여러 달콤한 이야기를 속삭일 수도 있다 이야기한 카리아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이내 웃으며 이야기를 이었다.
“무슨 말을 하건 다 거절해버려. 들을 가치도 없는 이야기니까.”
<이 녀석의 말이 옳다. 지금 내미는 조건이 무엇이건 네 입장에선 다 거절하는 것이 맞지.>
할배와 카리아의 의견이 일치했다. 지금 하는 말을 하나도 들을 필요가 없다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린 후 일어나면 그만이라고.
당연하단 듯 말하는 것이 신기해 왜 그런 것이냐 물었더니 할배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생각해봐라. 그대는 지금보다 더 강해질 자신이 없는가?>
‘아뇨.’
그럴 리가 있나. 허접 주신의 사도로써 녀석이 내리는 명령을 따라야하는 나다.
분명 언젠가는 내 손으로 악신을 상대해야 하는 날이 올 터.
그 때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이 세상의 끝을 보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허접 주신을 걷어차기 위해서라도. 나는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해져야만 한다.
<2왕비에게 고개 숙여야 할 정도로 지원이 시급한가?>
‘아뇨. 전혀.’
지금의 난 지원 따위 필요치 않다. 언제나 하는 말이지만 어지간한 건 바라는 즉시 얻을 수 있는 몸이니까.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네 목이 날아갈 정도로 뒷배가 부실한가?>
‘그렇진 않죠?’
내 주변 사람들의 영향력도 영향력이지만 뭣보다 내 뒤에는 베네딕이 있다.
불완전했다지만 불의 악신을 상대로 검을 휘두르던 괴물을 분노케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런데 왜 고갤 숙이고 들어가야 하느냐. 시간이 가면 갈수록 네 가치는 커지기만 할 텐데 말이다. 상대가 고개를 숙일 때까지 기다려야지.>
아. 이해했어. 그러니까 (주)루시 알른의 주가는 지금이 최저가라는 거구나.
그치. 여기에서 팔 순 없지. 화성에 가야 할 거 아냐!
할배의 설명을 이해한 나는 2왕비가 무슨 이야기를 하더라도 혹하지 않을 것이라는 굳은 결심을 하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에 만난 알새틴은 피로에 찌들어 있었다. 최근에 잠을 자기는 한 건가 의심스러운 얼굴을 한 그가 걱정되어 괜찮으냐는 물음을 던졌더니 알새틴이 웃었다.
“스승님께 여러 가지를 배우느라 바빠서 말입니다. 부족한 게 채워지는 느낌이라 즐겁기만 합니다.”
즐겁다는 답을 하는 그의 얼굴에선 군생활이 너무 행복하다는 이등병의 눈빛이 스쳐지나가는 듯 했지만.
뭐어 본인이 즐겁다니까 괜찮은 거겠지.
알새틴이 나를 안내해 준 곳은 커즈 뉴먼을 만났던 그 가게였다.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종업원의 안내에 따라 한 방의 문을 연 나는 익숙한 노신사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알른 가문의 루시 영애님. 저는 나빌. 베드퍼 가문의 기사 중 하나이자 2왕비님의 심복입니다. 잘 부탁 드리겠습니다.”
나빌.
베드퍼 가문의 심복 중 하나이자 명과 암을 가리지 않고 중요한 일을 수행할 때에 2왕비가 택하는 사람.
녀석이 나빌이란 이름과 함께 이 자리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2왕비가 나라는 사람의 가치를 무척이나 높게 보고 있다는 소리다.
지금부터 그의 입에서 나올 말이 2왕비가 말하는 것과 별 다르지 않을 거란 이야기이기도 하고.
‘안녕하세요. 나빌.’
“그래. 반가워. 짝퉁 할배.”
짝퉁인가. 맞는 말이지. 나빌이 겉에 보이는 것 중에는 진짜인 게 더 드무니까.
2왕비의 심복 중 꽤나 힘 있는 축에 속한 녀석에게 모욕을 내뱉었지만 난 무덤덤했다.
이런 일이 한 두 번이 아니기도 하고. 내가 아는 이 녀석이 이런 걸로 뭘 할 인간이 아니기도 하고.
“하하. 들었던 대로 영애께선 사람을 이름으로 불러주시질 않는 군요.”
나빌은 유쾌한 듯 웃음을 지으며 내게 앉기를 권유했다. 뭘로 나를 회유하려고 생각할까. 2왕자가 한 일이 있으니만큼 상당한 물건을 준비했을 텐데.
“영애께서도 추측하고 있으시리라 생각합니다만, 제가 이 곳에 온 까닭은 영애께 드리고픈 말씀이 여럿 있어서입니다. 최근에 워낙…”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 주시겠어요?’
“짝퉁 할배. 말 좀 끌지 말아줄래? 내가 너처럼 여유로운 사람으로 보여?”
어차피 거절할 이야기를 길게 듣고 싶지 않아 말을 끊었더니 나빌이 어깨를 으쓱였다.
“이런. 죄송합니다. 나이가 들면 자잘한 소리가 많아져서요.”
나이가 들었음을 보이려는 듯 일부러 끌끌거리는 소리를 내며 웃던 그는 일순에 웃음을 그치고는 진중한 목소리를 냈다.
“우선 전하고자 하는 것은 이 자리에서 영애와 이야길 나눌 사람이 제가 아니란 겁니다.”
…응? 그게 무슨 소리야?
나빌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아 눈을 끔뻑이고 있으려니 나빌이 자신의 품에서 수정구를 꺼내어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
그 후 수정구의 안에 마력이 스며들자 그 안에 있던 마법이 발동했고, 수정구 위쪽에 한 여성의 얼굴이 영상으로 떠올랐다.
잔뜩 날 서 있는 눈매. 따가울 정도로 진한 눈동자. 미간에 잡힌 주름. 꾹 다물린 입술.
어디를 보더라도 성격이 별로일 것이란 확신이 드는 여성의 얼굴에 난 그대로 굳어버렸다.
<안녕하세요. 알른 영애.>
아니. 어. 그러니까.
<세라느 솔라딘이라고 합니다. 현 왕국의 2왕비라는 직책을 지니고 있지요.>
…입 열면 좆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