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브젝트 협회 산하 연구소, 오브젝트 관리실.
그 깊숙한 곳에 석유를 닮은 진화액의 냄새를 진하게 풍기는 오브젝트 하나가 있었다.
신체 대부분이 검게 물들어 썩어들어가고 있었지만, 그 껍질만큼은 보라색을 유지하고 있는 소라게였다.
그때 소라게가 있는 격리실 밖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곧 죽겠는데요?”
처음 발견됐을 때부터 진화액에 의해 몸이 썩어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던 소라게는 이제 거의 움직이지도 못하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오브젝트들은 왜 처분하지 않는 거죠?”
오브젝트 연구원 복장을 한 남자는 주변을 가득 채운 오브젝트들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연구원 주변에는 진화액에 오염되어서 썩은 것처럼 검게 물든 오브젝트들이 잔뜩 있었다.
딱히 돈이 되는 것도 아니고 제거가 힘든 것도 아닌데, 이렇게 보존해서 격리하다니.
오브젝트 협회가 하는 일치고는 꽤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만큼 이 ‘진화액’이라는 것에 협회 상층부가 관심이 있다는 뜻이겠지.”
“하지만 진화액 관련 연구들은 대부분 실패하지 않았나요? 별로 효용성이 없다고 결론지어진 것 같은데….”
“그래서 더 이상 건드리지 않고 격리만 해두는 거야. 처분하기에는 아깝고, 연구하기에도 좀 그런 계륵이야. 계륵.”
관악구 진화액 사태 이후 시간이 상당히 흘러서 그런지, 대부분의 오염 오브젝트는 파괴된 상태였다.
그리고 얼마 남지 않는 오염 오브젝트 중, 소라게마저 상태가 급격하게 나빠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소라게는 곧 죽을 것 같네. 폐기를 준비해 둬야겠어.”
“그럼, 미리 준비해 둘게요.”
그렇게 수다를 떨던 연구원 두 명이 격리실 구역을 빠져나가자, 격리실 구역은 어둠과 고요가 다시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 순간, 보라색 소라게가 자기 눈을 한껏 들어 올리고 하늘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마지막 사명.]
더 이상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소라게의 눈동자 속에는 오래전의 기억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푸른색 머리칼의 소녀가 한껏 웃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보라색 소라게는 자신의 마지막 힘을 모두 태워서 자기 몸을 이동시켰다.
한국에서 멀리 떨어진, 저 멀리.
러시아의 설원 한복판으로.
***
엄마의 사탕을 먹었던 황금 사신은 굉장히 즐거운 표정으로 뚜방뚜방 걸어가고 있었다.
싱글벙글 웃고 있는 황금 사신의 손에는 커다란 과자가 하나 들려있었다.
미니 사신 정원에서 가장 부드러운 마시멜로.
흑설탕 사막의 흑요석처럼 투명한 설탕 가루.
핫초코의 바다 가장 깊숙한 곳의 초콜릿 가루.
막대 쿠키 숲에서 가장 향기로운 초콜릿.
미니 사신 정원에서 가장 맛있는 것들을 모아서 만든, 황금 사신의 정성이 듬뿍 들어간 과자였다.
엄마가 사탕을 먹고 싶어 하는 것도 모르고 먹어버린 사탕 대신 한 땀 한 땀 만들어 낸 과자였다.
엄마에 대한 고마움과 사죄를 담아서 만든 과자였다.
‘엄마가 좋아하겠지?’
황금 사신은 양손을 하늘로 하고 둥글게 뭉친 거대한 초콜릿 과자를 들고 가며 엄마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기대했다.
‘엄마?’
하지만 황금 사신이 회색 사신을 발견한 순간, 힘들게 만든 초코볼은 바닥에 툭 하고 떨어져 버렸다.
황금 사신이 발견한 장면은 회색 사신이 다른 황금 사신에게 사탕을 넘겨주고 있는 장면이었다.
세계에서 단 두 개밖에 없다고 했던 사탕인데!
모든 것이 엄마의 계략이라는 불길한 상상이 떠올랐지만, 황금 사신은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살금살금 다가가서 상황을 엿듣기 시작했다.
‘엄마는 별로 안 좋아해. 안 먹어도 괜찮아.’
엄마는 황금 사신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의지를 보내고 있었다.
‘!’
황금 사신은 큰 충격에 빠져들었다.
왜 이런 장난을?
그리고 황금 사신의 마음속에서 회색 사신의 신용등급이 한 단계 떨어져 내렸다.
이제 회색 사신의 신용등급은 ‘보통 오브젝트 등급’에서 ‘해로운 오브젝트 등급’으로 떨어져 버렸다.
너무 충격을 받아서 움직이지 못하는 황금 사신 뒤쪽에서 ‘툭’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황금 사신이 뒤를 돌아보니, 유리처럼 투명한 사탕을 가지고 온 황금 사신이 사탕을 떨어트린 채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너도?’
그 모습에 정신을 차린 황금 사신이 묻자, 뒤늦게 도착한 황금 사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두 명의 황금 사신은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회색 사신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모습을 발견한 회색 사신은 ‘으엑’ 이라는 의지만을 남기고 어디론가 도망쳐 버렸다.
***
쿵. 쿵.
창문 너머로 젤리 돼지의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그 거대한 몸이 내는 진동은 병원 전체를 뒤흔들 법도 했지만, 젤리로 이루어진 돼지의 몸이 모든 진동과 충격을 흡수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병원은 언제나처럼 평온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병원에서 근무하는 검은 사신은 창가에 서서 황금 사신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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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사신이 도망가 버려서 잔뜩 화가 난 황금 사신들의 모습이었다.
회색 사신에게 속은 황금 사신만 해도 20마리가 넘었다.
겨우 하루 사이에 이 정도 피해자라니.
회색 사신은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황금 사신을 속이고 다녔다는 뜻이었다.
‘어째서 엄마는 그런 짓을 한 걸까?’
검은 사신은 속으로 의문을 품었지만, 아무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이유가 명확했던 강한 엄마랑 달리, 약한 엄마는 이득도 이유도 없는 짓을 자주 벌였다.
아무리 찾아도 미니 사신 정원 내부에서 회색 사신이 발견되지 않자, 모든 황금 사신이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때 미궁에서 회색 사신을 구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던 황금 사신 네트워크가 이제는 장난치고 도망간 엄마를 추적하기 위해 쓰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어떤 황금 사신도 엄마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검은 사신은 창밖에서 시선을 떼고, 병실 안을 둘러보았다.
병실 밖과는 달리 병실 안은 고요하기만 했다.
하루에 절반 이상 잠을 자는 연금술사와 그것을 보살피는 여동생.
그리고 행복해 보이는 아귀들.
회색 사신이 사라진 후로 아귀들은 한결 평온해 보였다.
아마 가끔 찾아와서 하얀 아귀를 뜯어먹는 회색 사신이 사라져서 그런 것으로 보였다.
아귀는 오랜만에 찾아온 색 아귀와 함께 평온한 한때를 만끽하고 있었다.
회색 사신의 부재가 가져다준 작은 행복이었다.
***
새하얀 눈밭에 조그마한 발자국 두 개가 찍혔다.
신발 없이 맨발로 만들어서 발가락이 살아있는 이상한 발자국.
맨발로 눈밭 위를 걸어 다니는 건, 조금 이상한 기분이었다.
나는 장난을 눈치챈 황금 사신들을 피해, 러시아로 도망친 상태였다.
시간을 끌어서 황금 사신의 분노를 잠재울 겸, 우유 빙수 설원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눈과 관련된 오브젝트들을 잔뜩 죽이다 보면, 언젠가는 미니 사신 정원에 설원이 생기겠지.
하지만 오브젝트 사태로 시베리아를 봉쇄했다는 것치고는 오브젝트가 전혀 눈에 띄지 않고 있었다.
그저 끝없이 펼쳐진 눈밭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그렇게 망망대해 같은 설원을 돌아다니던 중, 미약한 존재감의 오브젝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진화액’의 꺼림직한 냄새와 오브젝트의 존재감을 가진 보라색 소라였다.
이미 죽어버린 지 오래인 소라였다.
설원이랑 소라랑 도대체 무슨 상관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죽어버렸으니 기껏 찾은 의미가 없었다.
소라를 버리고 다시 오브젝트를 찾아 나서려는 순간, 소라 껍데기 속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
소라에 귀를 대고 소리를 듣자, 이해할 수 없지만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부서진 달. 되풀이되는 과거. 뒤틀린 결말.]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수수께끼 같은 말이었다.
***
설원 위를 끊임없이 걸어가고 있던 푸른 머리칼의 소녀는 탄성을 질렀다.
“저기 봐봐. 드디어 도착했어.”
그러면서 소녀는 자신의 허리춤 높이 정도를 가진 하얀 수호자를 쓰다듬었다.
그러면서 아쉽다는 것처럼 말했다.
“왜 우리 아귀는 돌처럼 딱딱하고 꺼끌꺼끌할까? 솜털처럼 부드럽고 마시멜로처럼 말랑거리면 좋을 텐데.”
하얗고 딱딱한 돌로 만들어진 수호자는 이상한 소리하지 말라는 것처럼 묵직한 소리로 울었다.
푸른 소녀가 ‘그러면 가자!’라고 당차게 소리치며 나아가는 곳에는 거대한 도시가 자리 잡고 있었다.
보라색 달이 선명하게 빛나고 있는 아름다운 도시.
그리고 곧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릴 안타까운 도시였다.
그녀가 가진 희미한 예지에는 그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
어둠이 내려앉은 보라색 달의 도시.
그곳에서 푸른 머리칼의 소녀가 도시 골목길의 어둠 속에서 피를 토하고 있었다.
길쭉하게 뻗은 칼날이 소녀의 심장을 관통하고 있었다.
그 칼을 쥔 것은 갑갑한 흑의로 온몸을 감싼 닌자였다.
‘어째서 이렇게 된 거지?’
소녀는 몸이 점점 차가워지는 것을 느끼며, 생각을 거듭하고 있었다.
구하려고 했던 보라색 달은 이미 진화액에 검게 물들기 시작했고, 소녀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죽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소녀가 숨을 거두는 순간, 세계가 다시 되감기기 시작했다.
황량한 설원과 그곳을 돌아다니는 푸른 소녀.
그리고 하얀 아귀가 있던 그 순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