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39
이 사람이 도대체 왜 직접 튀어 나온 거야?
세나르 솔라딘의 가식적인 웃음을 살피던 나는 당혹을 감출 수가 없었다. 지금 시점에서 세나르가 친히 접촉해 올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으니까.
너 이럴 여유 없잖아! 지금으로부터 1년 반 뒤에 왕이 왕위 계승자를 발표한다고 해서 조금의 쉼도 없이 이리저리 뛰어다닐 때잖아!
여기저기 돌아다닌다고 게임에도 거의 출현하지 않던 사람이 왜 친히 모습을 드러내는 건데?!
상황이 좋지 못했다. 세나르는 현 왕국의 2왕비이자 베드퍼 공작가문의 딸. 2왕자 파벌의 실질적인 지배자.
쉽게 말해 이 여자는 솔라딘 왕국에서 손에 꼽을 수 있을 만한 권력을 지닌 인물이라는 소리다.
이만한 사람에게 모욕적인 말을 내뱉어 봐라. 무척이나 귀찮은 일이 생길 거다.
안 그래도 2왕자를 병신왕자라 부르며 파벌의 원한을 쌓았는데 거기에 개인적인 원한이 더해진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그다지 상상하고 싶지 않네.
더 걱정스러운 건 메스가키 스킬이 이 여자를 어떻게 부를지 감이 잡히지 않는단 것이다. 게임 내 비중이 크지 않았던 세나르에겐 별명이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이후 설정집에 나온 그녀의 행적을 바탕으로 추측을 해보자면. 추잡? 막장? 진상? 대충 그런 느낌일 거 같기는 한데.
병신왕자의 어머니라고 병신왕비라고 부를 가능성도 배제할 수가 없단 말이지.
어느 쪽이건 간에 입을 열면 곤란해질 거란 생각에 입을 다물고 있으려니 세나르가 웃음소리를 냈다.
<많이 당황하셨나 보네요. 이해해요. 아무 전조도 없이 제가 나타난 거니까.>
그녀는 나의 침묵을 당황이라 해석하고는 제멋대로 말을 이어나갔다.
<드릴 말씀이 많아요. 베네딕 경께서는 잘 지내고 계시는 지 같은 자잘한 것부터 제가 왜 당신께 말을 걸었는지에 대해서라던가. 아니면 최근에 있었던 2왕자님에 대한 이야기라던가.>
눈웃음 사이로 세나르의 차디찬 눈동자가 보인다.
질책이 담긴 따가운 눈동자.
보통이라면 저 눈의 의미는 자신의 자식을 모욕한 이에 대한 분노겠지만 세나르의 경우에는 다르다. 이 여자는 2왕자가 얼마나 박살나던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럼 왜 세나르가 짜증을 표하는가.
뻔하지. 나 때문에 2왕자의 대외적 평판이 박살났을 테니까.
<병신왕자라. 직설적이고 모욕적인데다 우리 왕자님을 너무도 잘 표현 하는 단어에요. 이런건 곤란하답니다. 멸칭이 잘 어울릴수록 더 빠르게 퍼져나가니까.>
봐. 이 인간은 2왕자를 병신이라고 부른 부분에 관해서 뭐라고 하지 않아.
오히려 잘 어울리는 별명이란 말로 자기 아들이 병신이란 걸 인정해 버렸어. 저 별명이 소문과 함께 퍼져나간 게 아니었다면 이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을 걸.
<이를 무마하기 위해선 공식적으로 알른 가문에 항의하면서 멸칭을 입에 담는 이들에게 실과 바늘을 선물해야 하겠죠.>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협박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지만.
<허나 그러지 않을게요.>
아니었다.
<이번 일엔 저희 왕자님의 잘못도 있으니까요. 이런 걸로 왕국의 미래가 될 분을 귀찮게 할 수 없죠.>
그녀는 이 이상 추궁하지 않겠다고 단언을 해버렸다.
<굳이 따지면 왕자님께서 깨달음을 얻기도 하셨고. 그 덕에 왕자님의 무재가 퍼져나가기도 했으니. 남는 게 더 많은 것 같기도 해요. 그래서 선물을 준비했죠. 나빌?>
“예.”
그 뿐이 아니었다. 세나르가 말을 끝마치기 무섭게 나빌이 품 안에서 두 개의 물약병을 꺼낸 것이다.
<영약이랍니다. 영애의 성장에 도움이 될 만한 걸로 준비했어요.>
감정 스킬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힘의 영약과 체력의 영약.
알른 가문의 창고에도 몇 개 없을 정도로 귀한 물건임과 동시에 지금의 내게 분명 유용할 물건.
그런 것을 선물이라며 내 앞에 내민 것이다.
2왕자와의 사건은 내가 먼저 시비를 거는 것으로 시작되었고, 내가 2왕자를 박살내는 것으로 끝을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게 도대체 뭐죠? 할아버지?’
영약을 먹은 후로 1년이 다 되어 가는 만큼 섭취해야 할 영약을 구해야 하는 나다.
구해야 하는 3개 중 두 개가 공짜로 굴러들어온 셈이니 기뻐해야하는 게 정상이지만 난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적의보다 호의가 무서워서. 저걸 좋다고 받아들었을 때 어떤 일이 생길지 몰라서.
이 아줌마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당신 이런 인간 아니잖아!
변수야?
무슨 변수가 있는 거야?!
<예상되는 이유가 여럿 있긴 하다.>
당혹 속에서 어찌할 줄 모르는 나와 달리 할배는 평온한 목소리가 설명을 이어나갔다.
내 가치를 그만큼 높게 평가했다거나.
내가 협박한다고 굽힐 인간이 아니라 생각했다거나.
2왕자는 그렇다 쳐도 2왕자 파벌은 괜찮은 곳이라 여기게 하기 위해서라거나.
<뭣보다 가장 큰 이유는 그대를 통해 베네딕을 끌어들이려는 거겠지만.>
‘…그게 무슨 소리에요?’
<생각해봐라. 자기 딸이 하는 말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녀석이다. 네가 베네딕에게 2왕자가 왕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야기하면 어찌 되겠느냐.>
에이. 할배. 너무 과장된 이야기를 하신다. 아무리 베네딕이 딸바보라고 하지만 왕위 싸움에 끼어들 정도는 아니죠.
…아니겠지? 확언을 할 수가 없네.
파파라고 부르면서 애교를 부리면 어쩔 수 없단 소리를 할 것 같으니까. 그 사람 어마어마한 딸바보인 걸.
<그게 아니라도 베네딕에게 빚을 지워두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판단 내렸을 것이다. 녀석은 타고난 기사이니만큼 이런 은원을 허술히 여기지 않을 터.>
베네딕이 지닌 평판을 떠올렸다.
구국의 영웅. 왕국의 수호자. 대륙 최강의 기사. 동경과 존경과 선망의 대상.
이런 사람에게 빚을 지워둘 수 있다면 용서를 베풀 만 하네.
아. 혹시 1왕자가 빚이라고 말한 것도 이건가?!
베네딕 이용권을 가져간 거였나?!
그래서 그 상황을 모면해 준 거였구나?!
…와. 진짜 베네딕이라는 뒷배가 엄청나게 크구나.
<쉽게 말해 정치적인 계산이다. 이를 추궁하는 것보다 용서하고 배포 있는 모습을 보이는 쪽이 이득이라 여긴 게지.>
할배의 설명을 들은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아줌마한테도 변수가 생긴 줄 알고 깜짝 놀랐는데 내가 알던 그대로의 사람이네.
다행이다. 이상하게 변했으면 어쩌나 싶었어.
<저희는 영애님을 무척이나…>
<왕비님. 잠시.>
수정구 너머에서 세나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세나르가 양해를 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어딘가로 향했다.
<죄송합니다. 영애님.>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돌아온 그녀는 급한 사정이 생겼다는 말과 함께 연락을 끊어버렸다.
무슨 일이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잘 됐네. 덕분에 메스가키 스킬이 세나르를 어찌 부르는 지 확인하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
“이런. 죄송합니다. 아시겠지만 저희 왕비님께선 무척이나 바쁘신 분인지라. 양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빌은 어색한 웃음과 수정구를 자신의 품 안에 집어넣고는 말을 이었다.
“일단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마치죠. 영애께서도 바쁘시다 하셨으니까요.”
진짜? 그냥 2왕자와 관계된 일을 넘어가겠단 말로 자리를 끝내겠다고? 권유라던가 회유라던가 뭐 더 해야 하는 거 아냐?
그런 생각에 눈을 끔뻑이고 있으려니 나빌이 중절모를 머리에 걸쳤다.
“아. 그리고 다음에 이야기할 기회가 생기면 2왕비님께 정중한 인사를 해주시길. 왕비님이시니까요.”
저어. 그게 저도 마음 같아선 예의를 차리고 싶은데요.
제 입이 만악의 근원이라 오히려 입을 열면 문제가 더 생겨서.
그게 그러니까.
으으.
‘죄송합니다아아.’
“내가 왜 추잡한 노괴왕비님한테 예의를 차려야 해? 난 너처럼 자글거리는 주름을 좋아하지 않는단 말야.”
무의식 중에 속으로 죄송하다는 말을 꺼낸 난 메스가키 스킬에 의해 바뀌어버린 말을 듣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나빌은 표정을 꾸미는 것조차 잊고 멍한 얼굴로 날 바라보다 이내 정신을 차리곤 웃음을 지었다.
일자를 유지하는 눈매와 함께.
“…호오. 그것 참.”
짧은 감탄사를 마지막으로 나빌이 자취를 감추어 버린 후 방 안에 홀로 남은 나는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놓여진 두 개의 영약병을 바라보다 몸의 힘을 빼고 의자에 기댔다.
…통신하는 동안 입 닥치고 있어서 다행이다.
진짜로 좆 될 뻔 했네.
*
“저. 고용주님. 추잡한 노괴라는 게 2왕비님을 이야기하는 거야?”
‘네에. 그런 모양입니다.’
“그런데? 잘 어울리지 않아?”
“…잘 알겠어. 이제 고용주님과 2왕비님이 만날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할게.”
메스가키 스킬이 세나르를 부르는 호칭은 이러했다.
추잡한 노괴.
2왕비의 행적과 그녀의 외모 양 쪽 모두를 모욕하는 이 별칭은 세나르가 날 조지겠다 마음 먹기에 충분한 표현이었다.
병신 왕자라는 폭탄을 지나왔더니 또 다시 새로운 폭탄이 생겨날 줄이야.
그나마 다행인 건 세나르가 나와 마주칠 일이 많지 않다는 걸까. 걔는 왕위 계승과 관련해서 이리저리 바쁘게 돌아다닐 테니까.
“그나저나 2왕비님께서 친히 이야기를 걸다니. 그 쪽에선 고용주님을 꼭 가지고 싶어하시나 보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내가 중요한 건지 내 뒤의 베네딕이 중요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날 끌어들이길 바라는 건 분명하다.
나빌을 보내는 것도 모자라서 직접 얼굴을 드러내다니. 이럴 거면 처음부터 2왕자가 아니라 자기가 직접 나서는 게 낫지 않았나? 그럼 나랑 악연이 생길 일도.
아니다. 그랬으면 병신 왕자대신 추잡한 노괴가 튀어나왔겠구나. 더 심각한 악연이 생겨났겠네. 응.
“2왕비님 버로우 공작가문과 관계된 일로 바쁘게 움직이는 중이실텐데 그 와중에 시간을 쪼개서 고용주님과 이야기를 하다니.”
‘버로우 공작 가문이요?’
“버로우?”
“아아. 고용주님은 모르겠구나. 아직은 잘 안 알려진 소식이니까. 왜 고용주님이랑 같은 학년인 버로우 공자가 휴학계를 냈잖아. 공자가 휴학을 신청한 이유가 이거야.”
버로우 공자? 걔 아카데미 쉬고 있었어?
어쩐지 한 번도 마주치질 않더라!
1학기 때 그랬던 것처럼 날 피하고 다니는 줄 알았는데 학교를 쉬고 있었다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개가 휴학을…
어라?
이상했다.
내가 아는 시나리오 중에서 열등공자가 학교를 쉬는 경우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열등감이 강한 만큼 필사적으로 발악하는 사람이니까.
목숨이 위험할 정도로 심각한 병환 속에서도 펜을 놓지 못하던 그가 아카데미를 쉬고 있다고?
등줄기를 타고서 싸늘한 감각이 지나쳤다.
이는 변수였다.
내가 알지 못하는 종류의 변수.
나는 여태까지 이러한 변수를 수도 없이 넘어섰다.
그렇기에 알고 있다.
이런 변수가 대부분 문제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불길한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별 일 아닐 것이라 다독여 보아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여러 최악을 가정한 생각 뿐.
긍정을 떠올리는 건 불가능했다.
그러기엔 내가 여태까지 겪었던 위험이 너무도 많았으니까.
– 띠링.
문득 들려온 소리에 모든 생각이 멈췄다.
아냐. 이러지 마.
눈치 없이 끼어들지 말라고 허접 주신.
지금 장난칠 상황 아냐.
나 진짜 심각하다고.
여느 때처럼 허접 주신이 나를 놀리기 위해 장난을 친 것이기를 바라며 고개를 들었지만.
[버로우 공작 가문의 이상]
아니었다.
[버로우 공작 가문에 무언가 기이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모양입니다.]
그 메시지에 농담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를 확인하십시오.]
저는 분명 재앙의 선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