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는 어둠이 깔려있지만, 그 어둠을 뚫고 신비로운 보라색 달이 떠올라 있었다.
마치 하늘에 커다란 자수정이 걸려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달빛은 은은하게 도시를 비추었고, 그 빛 아래 도시는 마법에 걸린 듯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푸른 소녀는 근육질 남성과 함께 달빛으로 물든 거리를 천천히 걸어 나가고 있었다.
길가에 늘어선 건물들은 마치 판타지 소설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았다.
푸른 소녀가 몇 번을 봐도, 몇 년을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 느낌의 길거리.
‘이토록 판타지 세계인데, 티라노사우루스가 없다니.’
푸른 소녀는 속으로 작게 투정을 부렸다.
남자는 소녀가 뭔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모르는 척 걸음을 재촉했다.
마치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건물들을 지나 탁 트인 광장에 들어서자, 도시 중앙에 위치한 커다란 분수대가 소녀와 남자를 반겨주었다.
분수에서 흘러나오는 물줄기가 보라색 달빛을 받아 신비로운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더없이 멋진 광경이었지만, 남자는 분수 근처에 잔뜩 모인 사람들을 보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흠, 이런 북부까지도 ‘가짜’ 연금술사들이 득실거리는군.”
“뭐, 저를 마지막으로 제대로 된 연금술사는 명맥이 끊겼으니 어쩔 수 없죠.”
잔뜩 짜증이 난 남자와 달리, 푸른 소녀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신비 하나 다루지 못하면서 저 더러운 진화액을 뿌리기만 하는 걸 연금술이라고 할 수가 있나?”
“음, 확실히 좀 그렇긴 하네요.”
그리고 푸른 소녀는 몸을 180도 돌려, 분수를 등지고 남자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런데 오래된 역사서를 뒤져보면 ‘고대의 연금술사’들은 우리 같은 연금술사를 ‘가짜’라고 부른 기록이 있어요.”
그리고 푸른 소녀는 쿡쿡 웃으면서 작게 ‘어쩌면 저희가 도태되고 있는 걸지도 모르죠.’라고, 덧붙였다.
그런 소녀를 보고 남자는 흥분을 가라앉혔는지, 커다란 손으로 관자놀이를 주무르면서 말했다.
“그럼 슬슬 말해주는 게 어때. 도와줘야 하는 일이 뭐지?”
“아, 눈치챘어요?”
푸른 소녀는 속마음을 들킨 것 같은 멋쩍은 표정으로 히히 웃었다.
“너는 필요한 일이 있을 때만 이 스승을 부르니까 말이야. 정 없는 녀석.”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푸른 소녀의 머리를 커다란 손바닥으로 통통 두들겼다.
“오래된 서적이라고 해야 하나. 글자가 잔뜩 새겨진 돌멩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게 필요해요.”
“….”
남자는 더 말해보라는 것처럼 팔짱을 끼고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그게 ‘교단’의 신물이라서….”
“미친년.”
푸른 소녀의 말이 들리자마자, 남자는 황당한 표정으로 말을 내뱉었다.
***
나는 벽에 붙어있는 커다란 거울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흐음.
거울에 비친 모습은 어디를 봐도 예린이의 어린 시절 모습이었다.
앞에서 봐도 예린이, 옆에서 봐도 예린이.
입을 크게 벌려도 예린이, 귀여운 표정으로 브이를 해도 예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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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랑말랑한 볼을 마구 주물러도 예린이.
예린이가 내 마음대로 자유롭게 움직인다는 생각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아마 거울만 보고 놀아도 10시간은 즐겁게 놀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던 도중, 밖에서 들려오는 왁자지껄한 소음이 들려왔다.
소리를 쫓아서 고개를 들자,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는 높이에 작게 뚫린 창문이 있었다.
그 창문으로부터 즐거운 목소리와 맛있는 음식의 냄새가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와.’
나는 이 방을 설계한 사람을 향해서 감탄했다.
매일매일 몸을 태우는 화염.
화상 입은 모습으로부터 피할 수 없는 거울들.
그리고 즐거워 보이는 바깥의 소리와 냄새.
이 방은 이 소녀를 철저히 괴롭히기 위해서 설계된 것으로 보였다.
꿀꺽.
맛있는 냄새를 맡았더니, 갑자기 배가 고파졌다.
‘흠, 나가서 뭐라도 먹으면서 놀아야지, 가 아니라. 정보를 수집해야겠어.’
이 꿈이 무엇인지.
그리고 <꿈이 올바른 끝을 맺는다.>가 무언인지, 알아봐야 하니까.
게다가 ‘달의 주마등’ 속에서 예린이랑 꼭 닮은 사람이 나타난 것이 왠지 우연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나저나 여기서 어떻게 나가야 할까?
나는 3m는 되어 보이는 위치에 있는 조그마한 창문을 올려다보며 고민을 시작했다.
***
설원에서 본 것과는 달리 생생한 생기를 뿜어내는 보라색 달의 아래, 나는 거울 방에서 탈출해서 번화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다행히 재생 말고도, 다른 ‘회색 사신’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었기에 손쉽게 탈출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가장 간단한 해결책인 ‘유령화’를 생각했지만, 포기했다.
오브젝트도 아닌 10살 남짓한 꼬맹이가 알몸으로 거리를 배회하면 맛있는 음식은 제대로 즐기지도 못할 게 뻔했으니까.
그래서 선택한 방법은 공간을 잡고서 기어 올라가서, 창문으로 탈출하는 것이었다.
‘뀩’으로 박살 내버리면 쉬웠겠지만, 너무 소란스러워질 것 같아서 조용히 나오는 것을 선택했다.
옴뇸뇸.
나는 촉촉하게 구워진 고기 꼬치구이를 한입 베어 물면서, 도시의 풍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내 주위에는 이국적인 옷차림을 한 사람들이 북적였고, 그들의 밝은 웃음소리와 대화 소리가 거리에 활기를 더했다.
‘맛있네.’
꼬치에 꿴 고기는 노릇노릇하게 잘 구워져 있었고,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했다.
무슨 고기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꼬치 사이사이에는 처음 보는 채소들이 꽂혀있었다.
아삭아삭하면서도 살짝 매콤한 맛이 나는, 식욕을 자극하는 채소들이었다.
무슨 채소인지는 모르겠지만.
재료의 정체는 알 수 없었지만, 한 입 베어 물 때마다 입안 가득 퍼지는 육즙은 그런 사소한 것들은 신경 쓰지 않게 해주었다.
어느새 고기 꼬치를 다 먹어버려서 나는 가게 앞으로 뚜방뚜방 걸어간 뒤,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가게 주인은 서둘러서 고기를 구워내더니, 꼬치 하나를 내 손 위에 올려주었다.
“맛있게 드세요!”
가게 주인의 인사를 뒤로하고, 나는 빈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서 다시 냠냠 먹기 시작했다.
이 보라색 달이 뜬 ‘이세계 예린이’를 데리고 있는 단체는 생각보다 위세가 대단한지, 뭔가를 살 때 돈이 필요 없었다.
행인들이나 상인들의 말을 들어보면 ‘교단’이라고 불리는 단체로 보였다.
아마 닌자들의 단체가 ‘교단’인 거겠지.
그래서 도대체 뭐 하는 단체인가 궁금해져서 정보를 모으고 다녔지만, 별로 알아낸 것은 없었다.
다만 신기한 점 한가지는 알아낼 수 있었다.
‘교단’은 무언가를 섬기는 집단이지만, 뭘 섬기는 지는 아무도 몰랐다.
섬기는 자의 이름도, 모습도, 동상도, 그림도, 언급도, 없었다.
그저 숭배하고 섬길 뿐.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종교였다.
다만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고 ‘마도서’들을 처리해 주고 있어서, 상당히 존경받는다는 것 같았다.
옴뇸뇸.
나는 꼬치를 들고 의자에 비해 짧은 다리를 휘적휘적 흔들면서, 거리의 풍경을 감상했다.
건물 벽에 달린 형형색색의 조명과 보라색 달빛이 어우러졌다.
어디선가 경쾌한 악기 소리가 들려왔고, 사람들은 그 리듬에 맞춰 흥겹게 몸을 흔들었다.
하지만 내 귀에는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날카로운 날붙이가 내는 소음.
분명 <꿈이 올바른 끝을 맺는다.>과 관계가 있는 소음이겠지.
에휴.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꼬치를 순식간에 먹어 치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어둠이 내려앉은 보라색 달의 도시.
그곳에서 푸른 머리칼의 소녀가 도시 뒷골목의 어둠 속에서 정신없이 뛰고 있었다.
‘스승님! 제자 죽어요!’
푸른 소녀는 도와주기로 약속했던 스승을 애타게 찾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스승이 준비하기로 했던 통로는 보이지 않았다.
“정말 끈질기게 쫓아오네. 잠깐 빌려서 내용만 확인하고 돌려준다니까?”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소리치는 소녀의 품 안에는 녹색으로 빛나는 네모난 판 같은 것이 들려있었다.
그 판은 영롱한 빛으로 빛나는 녹색 옥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녀를 쫓아온 흑의인들은 대답할 생각조차 없이, 그저 무심하게 날카로운 칼날을 휘둘러 올 뿐이었다.
소녀는 칼날을 피해 먼지투성이가 되어가며 구르는 도중에도 실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교단 녀석들 복장이 ‘닌자’ 같다고 생각은 했었는데, 정말 ‘닌자’였어!’
닌자들은 바닥에서 불쑥 튀어나오거나 하늘에서 뛰어내리는 등, 연금술 없이 순수 신체 능력으로 했다고는 믿기 힘든 기행들을 벌이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막다른 골목에 몰린 푸른 소녀의 심장을 향해 날카로운 칼날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말도 안 돼. 이렇게 끝난다고?’
소녀는 자신의 운명을 알고 믿고 있었기에, 이 상황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나는 운명지어진 존재인데! 필연적인 존재인데!’
짝짝.
설마 이대로 끝인 건가 하는 순간, 작은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이어지는 작은 발 구름 소리, 콩콩콩.
그 순간 닌자가 서 있던 지반이 무너져 내리더니, 그 끝이 보이지 않는 끝없는 무저갱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
뚜방뚜방.
활기찬 발걸음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골목의 입구에서 10살 남짓한 어린애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10살의 소녀와 전혀 어울리지 않은 무심한 표정으로.
마치 눈동자에 불이 붙은 것처럼 황금색 불꽃을 뿜어내며, 뚜방뚜방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