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41
2왕비.
세라느 솔라딘은 마차 안에 들어와서는 머리의 여러 복잡한 장식을 집어던지듯 풀고는 이마의 기다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한 나라의 왕비가 보이기에는 다소 포악한 모습이었지만 세라느는 그런 걸 신경 쓰지 않았다.
애써 웃음을 지으며 아양을 부리는 건 바깥에서로 충분하다. 여러 마법적 절차를 통해 바깥과 완전히 차단된 이 곳에서 그런 귀찮은 짓거리를 했다간 머리가 터져 버릴 거야.
“다 죽어간다더니 멀쩡하잖아요.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날카롭다 못해 말로 사람을 베어 죽일 듯한 목소리에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입을 일자로 만들었다.
2왕비의 심복 중 하나이자 베드퍼 가문의 가신인 그는 이러한 불평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몇 년 간 그 옆을 지키다 보면 자연스레 저 성질에 익숙해지니까.
“죄송합니다. 제가 더 잘 알아 봤어야 했는데.”
“그래요. 그랬어야죠. 이래서야 완전히 시간 낭비한 거잖아요.”
세라느가 자신의 품 안에 있던 병을 아무렇게나 집어 던지자 2왕비의 심복이 다급히 그를 붙잡았다.
병 안에 담겨 있는 것은 수많은 질병에 특효를 지닌 귀중한 약. 마차 바닥에 양보하기에는 너무도 귀한 물건이었다.
“은혜를 입히긴 커녕 귀찮은 손님 취급만 당하다니.”
자신의 멍청하디 멍청한 아들을 어떻게든 왕으로 만들어 권력을 손에 넣고자하는 그녀다.
버로우 공작 가문에 자그마한 호감이라도 더하기 위해 아까운 시간을 들여 이 곳에 왔거늘 세라는 그 어떤 것도 얻지 못했다.
오히려 민폐 취급만 당하다 쫓겨나듯이 빠져나왔지.
“알른 가문의 건방진 꼬맹이부터 시작해서 되는 일이 없네요.”
세라느는 오늘 버로우 공작 가에 방문하기 전에 루시 알른이라는 여자아이와 대화하며 그녀의 호감을 사기 위해 노력했다.
그녀 자체가 지닌 가치도 가치지만 그녀를 끌어 들이면 그녀의 뒤에 있던 베네딕 알른을 함께 데려올 수 있으리라 판단했기에.
허나 오늘의 대화는 완벽하게 실패였다.
방문을 꺼리던 버로우 가문이 갑작스레 찾아오라는 연락을 전한 탓에 이야기가 끊어진 것도 문제지만 그 전에 루시 알른의 태도부터가 좋지 못했다.
“그 년. 입 한 번 안 열었어요.”
대화가 시작된 후로 루시 알른은 가벼운 인사는커녕 목례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입을 다문 채 세라느를 재단하듯 바라보기만 할 뿐.
단순히 건방진 꼬맹이는 아니란 거겠지.
귀찮게.
“덕분에 오늘 하루 종일 낭비한 셈이 되어버렸다구요. 아아. 짜증나.”
머리를 마구잡이로 헝크는 2왕비의 모습에 허둥거리던 남자는 변명 하듯 목소리를 냈다.
“완전히 수확이 없는 건 아닙니다. 버로우 가문의 분위기가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지 않았습니까.”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죠. 저긴 장남을 잃어버렸을 때부터 항상 저랬어요.”
“저도 그건 압니다만 오늘따라 분위기가.”
“닥치세요. 이 짜증이 당신을 향할 것 같으니까.”
다급히 입을 다문 심복의 모습에 세라느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그 때에 누군가 마차의 입구를 두드렸다.
“왕비님. 나빌입니다.”
“들어와.”
나빌은 난장판이 되어 있는 마차 안의 풍경을 보고도 별 반응하지 않고 문을 닫았다.
“그 꼬맹이랑 이야기는 잘 하고 왔어?”
“아뇨.”
“…응? 그게 무슨 소리야.”
“그 분께서 조금 무례하셔서요.”
*
“알른 영애?”
파트란 공작을 이용하자고 결정을 내린 나는 바로 조이를 만나기 위해 그녀의 기숙사를 찾았다.
공작의 딸인 그녀라면 공작과 연락할 수단을 가지고 있을 거라 봤으니까.
예의라거나 절차라거나 하는 고민은 존재하지 않았다. 한 시 빨리 던전 공략을 해야 하는 데 왜 그런 걸 신경 쓴단 말인가.
일단 부딪혀보고 막히면 다른 생각을 해도 충분하지.
“아버님과 연락을 하고 싶으시다고요?”
‘네. 가능한가요?’
“그래. 허술 공작님께 부탁 할 게 있어. 가능해?”
“물론 가능합니다만, 아버님께서 연락을 받으실지 모르겠네요. 일단 안으로…아니. 잠시. 잠시만요.”
중간에 이야기를 끊은 조이는 다급하게 방문을 닫았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저 안에서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연이어졌다.
<방이 엉망인가 보구나.>
엉망 정도면 다행이지.
여태까지 보아왔던 것처럼 얼빵영애는 겉은 완벽한 악역영애이다만 속은 허술하기 그지없는 사람이다.
이러한 그녀의 특성은 자신의 방에도 적용이 된다. 남에게 보일 일이 없다시피한 조이의 방은 매일매일 이게 진짜 개판이란 걸 주장하듯 엉망의 정도를 갱신하지.
저 안이 정리가 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을 알기에 난 가만 서서 기다리는 대신 내 기숙사로 가서 몸가짐을 바로 했다.
꽤 여유를 부렸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다시금 돌아올 때까지도 조이의 방 안에서 들려오는 우당탕하는 소리는 그치지 않았고.
그로부터 대략 오 분 정도를 더 기다리고 나서야 숨이 거칠어진 조이가 문 바깥으로 나왔다.
“오래… 기다리셨죠?… 들어오세요…”
그녀의 방은 게임 속에서 보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붉은 빛을 띄는 우아한 방.
여기에 조이가 머무른다고 하면 누구나 잘 어울린다며 고개를 끄덕일 장소.
허나 자세히 본다면 여기저기에 보이는 허술함을 느낄 수 있는 곳.
침대 아래에 살짝 삐져 나온 쓰레기. 옷장 틈 사이로 삐져나온 여러 옷의 끝자락. 다급히 집어넣은 듯 위와 아래가 마구잡이로 뒤바뀌어 있는 책장.
어느 하나 건드리는 순간 우아함이 와르르 무너져버릴 풍경에 순간 심술궂은 마음이 생겨났지만 애써 짓눌렀다.
그랬다간 파트란 공작하고 대화를 나누기도 전에 하루가 끝나버릴 테니까.
“찾아뒀답니다. 이 수정구를 사용하시면 돼요.”
방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수정구를 찾아둔 듯 조이는 여유로운 체하며 수정구를 내밀었다.
이럴 거면 그냥 날 안으로 들일 게 아니라 수정구만 건네줘도 되는 거 아닐까 싶긴 한데 굳이 지적하지는 말자.
조이에게서 수정구를 받아 든 나는 그 안에 능숙하게 마력을 담았고 그에 따라 수정구가 푸른 빛으로 점멸하기 시작한다.
이제 이 점멸이 끝나면 상대방과 연락이 되는 건데.
음.
연락을 안 받으시네.
1분 가량 기다렸음에도 불구하고 수정구의 점멸은 끝나지 않았다.
베네딕은 언제나 1초가 지나기 전에 연락을 받아서 수정구가 점멸하는 걸 볼 틈도 없었는데 말야.
“오늘 무척 바쁘신가봐요.”
‘그러게요.’
“나처럼 귀여운 여자애가 연락을 거는 데 무시하시다니. 정말 너무하시네.”
연락이 안 되는 건 어쩔 수 없지. 조이한테 이야기를 해 뒀으니 언젠가는 연락이 닿을 거야.
정 안 되면 알새틴이나 뉴먼 가문을 통하는 방법도 있으니까. 급해지지 말자. 던전을 공략할 때 급해서 좋은 건 없어.
“저. 알른 영애. 오래 기다리셨는데 차라도 드시면서 좀 더 느긋이…”
그 때였다. 점멸하던 수정구가 갑작스레 정지함과 동시에 수정구 위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사악한 웃음소리가 튀어나온다 한들 그 누구도 이상함을 느끼지 못할 사나운 얼굴은 분명.
“미안하구나. 조이. 급한 일이 있어서 잠시.”
파트란 공작이었다.
그는 담배가 어울릴 듯한 웃음과 함께 사과의 말을 전하려다 내 얼굴을 마주하고는 한 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알른 영애? 기이하군. 이것은 조이의 것이지 않나?”
‘맞아요…’
“허술 공작님. 보면 아시지 않나요? 얼빵 영애에게 허술공작님과 연락하고 싶다 부탁을 드렸어요.”
“조이에게? 기이하군. 이 깔끔한 방은 결코 딸의 것이.”
“아버님?”
“아. 옆에 있었느냐? 그럼 미리 말을 해줬어야지. 깜짝 놀라지 않았느냐.”
특유의 발성으로 무시무시한 웃음소리를 내던 그는 이내 두 손을 끌어 모아서 턱을 괴면서 이렇게 물었다.
“어쨌든 무슨 일이지?”
파트란 공작은 귀족이라면 으레 그러하는 것처럼 안부를 묻는 대신 바로 본론으로 향했다. “아버님.”
그것이 좋지 않게 비친 것일까. 조이가 목소리를 냈지만 파트란 공작은 단호했다.
“알른 영애가 안부인사나 하자고 연락을 한 건 아니지 않으냐. 영애의 입장에서는 이 편이 나을 터이니 무어라 하지 말거라.”
그가 추측한 대로 내겐 자잘한 안부인사보다 빠른 본론 쪽이 훨씬 더 좋았다. 내 입장에서 자잘한 안부인사라는 건 지뢰밭이나 마찬가지니까.
얼마 이야기를 나누지도 않았는데 나란 사람을 어느 정도 파악하다니. 확실히 능력 있는 사람이라니까. 허술한 부분 때문에 자꾸만 실수를 해서 그렇지.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그러니까…’
“허술 공작님께서 시간관리를 잘 못하시는 듯 하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게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전 버로우 가문에 병문안을 가고 싶어요.”
“정상적인 루트로 방문하기 어려울 듯 하니 나를 이용하겠다?”
따로 설명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파트란 공작은 내 목적을 순식간에 눈치채고는 말을 이었다.
“어렵지 않은 일이야. 버로우 공작 가문이 아무리 방문객을 꺼린다지만 거기에도 정도가 있거든. 나쯤 되면 충분히 억지를 부리는 게 가능해.”
예상한 대로였다. 영지가 가까운 데다가 대등한 지위를 지닌 파트란 공작이라면 충분히 억지를 부릴 수 있을거라 봤지.
“부탁할텐가? 파트란 공작의 이름을 쓰기에는 아까운 일일지도 모르는데?”
확실히 그렇다. 파트란 공작이란 개인이 지닌 힘은 어느 쪽으로 향하건 어마어마하니. 이런 일로 사용하기엔 아쉬운 감이 있지.
근데 내가 여러 RPG게임을 하면서 느낀 게 무슨 물건이건 아쉽다고 아끼고 있으면 결국 끝날 때까지 안 쓰는 경우가 부지기수더라고.
그러니 무슨 물건이건 효율적으로 써먹을 수 있으리란 확신이 서면 그냥 쓰는 게 맞아. 그게 세계에서 한 개 밖에 없는 아이템같은 게 아닌 한은 말이야.
‘부탁할게요.’
“일의 경중은 제가 판단할테니 부탁만 들어주세요. 허술 공작님.”
“하하. 그래. 알겠다. 소원을 수락하마.”
웃음과 함께 내 부탁을 수락한 파트란 공작은 3주 내로 병문안을 갈 수 있도록 조치하겠다고 이야기할 뿐 왜 병문안을 가려하는 지, 버로우 공작 가문에 가서 뭘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했으니 그런 건 필요 없다는 건가.
수정구의 빛이 꺼진 후에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기지개를 키며 생각을 정리했다.
이걸로 첫 번째 문제는 해결 됐어.
그럼 이제부터 내가 해야 할 일은 버로우 공작 가에 있을 가능성이 있는 여러 이상을 정리하고 그를 감지하기 위한 방법을 모아두는 거야.
조금 있으면 중간고사로 치러야 하는데 어쩔 수 없이 양 쪽을 병행해야 하는 건가.
당분간은 정신이 없겠네.
“알른 영애.”
그런 생각을 하다 조이의 목소리에 고갤 돌렸다. 그녀는 어쩐지 황망한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왜 그런 눈으로 날 봐? 꼭 자기 인형을 뺏긴 어린아이 같은…
“버로우 공자에게 관심이 있으신가요?”
‘…네?’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