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리실에서 황금 사신과 빈둥거리던 예린이 회색 사신이 나타났다는 소식에 TV의 소리를 한껏 키우고 있던 순간.
부소장실에 있는 서아도 똑같은 뉴스를 주의 깊게 시청하고 있었다.
[러시아에서 공유해 준 정보에 따르면, 시베리아의 일정 구역은 제대로 된 관측이 불가능한 상태라고 밝혔습니다.]
TV에서는 현재 벌어진 미스터리한 오브젝트 사태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 있었다.
[인간은 물론, 드론마저도 설원의 경계를 넘는 순간 실종된다고 합니다.]
[통제를 상실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위성으로 추적하더라도 경계를 넘어서는 순간 사라져 버린다고 하는군요.]
그저 귀로 듣기만 해도 대처가 막막해 보이는 오브젝트 현상이었다.
하지만 뒤이어 방송된 회색 사신을 포착한 고화질 장거리 촬영 사진은 예상치 못한 결과를 보여주고 있었다.
뚜방뚜방.
회색 사신은 특유의 뚜방뚜방 한 걸음걸이로 오브젝트의 경계를 넘어섰지만, 사라지거나 하지 않고 그대로 설원을 계속해서 걸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계속 걸어가던 회색 사신을 계속 찍던 카메라는 회색 사신의 현재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저 황금색 눈동자로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며 미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는 회색 사신.
마치 하늘의 뜬 달을 바라보며, 꿈속에 빠져들어 간 듯한 인상을 주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서아는 집중해서 시청하고 있던 TV에서 시선을 떼고 새싹 사신에게 의견을 물었다.
하지만 늘 모니터 위에 앉아 빈둥거리던 새싹 사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설마….’하는 생각에 고개를 돌려보니, 서아가 챙겨놓은 도시락 뚜껑을 살짝 열고 그 안으로 고개를 집어넣고 있는 게 아닌가.
‘또 몰래 먹고 있네.’
새싹 사신과 자주 놀아줘서, 가 아니라 자주 교감을 나눠서 그런 건지.
아니면 정신적 유대감이나 정신 오염이 더욱 깊어진 탓인지.
서아에게만 보이는 환영 같은 존재였던 새싹 사신은 어느새 현실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장점이라면 제법 영리해서 간단한 일을 시키면 도와준다는 점이었다.
단점은 자꾸만 도시락에서 무언가를 몰래 빼먹으려 든다는 것이었다.
다른 미니 사신들과 달리 과자나 푸딩 같은 것은 거의 먹지 않는 걸 보면, 순전히 서아를 당황하게 하는 걸 즐기는 것 같기도 했다.
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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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아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새싹 사신의 조그마한 발을 잡아당기자, 입에 커다란 소시지를 물고 있는 새싹 사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키득키득.
마치 ‘앗! 들켰네!’라는 표정으로 귀엽게 웃어 보이는 새싹 사신을 보자, 서아도 혼낼 생각을 잊고 절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
내 눈에 ‘눈동자 교의 교주’의 젊은 시절처럼 보이는 남자와 푸른 소녀의 모습이 비쳤다.
나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 한쪽 손을 앞으로 뻗고 공간을 찢어버릴 준비를 했다.
목표는 푸른 소녀였다.
자세히 살펴봐도 그녀는 분명 푸른 소녀였지만, 망설임은 없었다.
지금 시간대의 진짜 푸른 소녀라면 닌자들에게 쫓기고 있을 테니까.
내 직감은 저 푸른 소녀가 진화액에 오염된 검은 소라게가 둔갑한 가짜일 가능성이 높다고 속삭였다.
설령 내가 틀렸다 하더라도, 그저 세계가 다시 한번 리셋될 뿐이었다.
더 이상의 리셋은 위험할 수 있었지만, 나는 저 푸른 소녀가 가짜일 확률에 걸었다.
내가 공간을 강하게 움켜쥐자, 심장에 있는 장작이 서서히 줄어드는 게 느껴졌다.
회색 사신의 몸보다 효율이 떨어지는 건지 생각보다 많은 양의 장작이 사라졌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이세계 예린이의 장작 양은 마치 바다처럼 넘쳐났으니까.
그저 소모되는 장작이 티스푼에서 테이블 스푼으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내가 천천히 손아귀에 힘을 주자, 공간이 뒤틀리고 왜곡되기 시작했다.
거대한 힘이 푸른 소녀를 향해 밀려들었고,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공간 그 자체를 움켜쥐는 듯했다.
가짜 푸른 소녀는 그 힘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쳤지만, 공간 자체를 붙잡고 으스러트리는 힘 앞에선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푸른 소녀는 거대한 손에 붙잡힌 것처럼 눌리고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내 손도 서서히 뒤틀리고 있었다.
회색 사신의 몸이었다면 손이 약간 검게 변하는 수준이겠지만, 인간의 육신으론 버티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나는 찢어지는 고통을 감내하며 다시금 공간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푸른 소녀를 둘러싼 대지와 하늘, 공간 그 자체에 5줄기 상흔이 새겨지면서 공간이 찢겨 버렸다.
마치 거대한 인간이 공간 자체를 쥐어뜯은 것 같은 흔적 너머로 칠흑 같은 공허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이윽고 극심한 압박을 견디지 못한 가짜 푸른 소녀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부서져 내렸다.
“안 돼!!!”
으스러진 파편들이 사방으로 흩날리는 가운데, 교주를 닮은 남자의 절규가 울려 퍼졌다.
남자는 당혹감에 휩싸인 채 핏물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이내 의아한 기색으로 표정이 바뀌었다.
공기 중에 짙게 깔렸던 피비린내는 석유 냄새로 변해갔고, 주변에 흩어진 잔해는 부서진 소라 껍데기로 모습을 바꾸고 있었다.
“진화액? 거기에 검게 물든 소라게라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허공을 움켜쥘 것 같았던 남자의 두 손은 힘없이 풀렸다.
그는 멍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짜였나? 하지만 소라게는 보라 달의 권속일 터, 어째서 이런 짓을 한 거지?”
크게 당황한 것처럼 보이는 남자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면서, 상황을 정리하더니 곧바로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렇다면 그 아이는 위험에 처했겠어.”
남자는 푸른 소녀가 닌자에게 쫓기고 있음을 깨달은 듯, 급히 땅바닥에 거대한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
바닥에 복잡한 형상의 그림이 그려지기 무섭게, 허공에서 푸른 소녀가 갑자기 튀어나왔다.
“와, 죽을뻔했다!”
조금 전까지 닌자들과 추격전을 벌이던 푸른 소녀는 드디어 살았다는 느낌에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으며 소리쳤다.
“스승님, 왜 이렇게 늦었어요? 무슨 문제라도 생겼던 거예요?”
거의 모든 일에 있어서 철저한 스승이 시간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니?
푸른 소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러자 남자는 입을 꾹 다문 채, 바닥에 널브러진 검은 소라게의 파편을 가리켰다.
하지만 푸른 소녀는 검은 소라게의 파편 쪽으로 고개를 돌리다가, 어떤 한 소녀를 발견했다.
검은색과 하얀색으로 이루어진 고급스러운 옷을 입은 소녀.
뭔가 수상해 보이는 꼬맹이였지만, 푸른 소녀에게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흑백 옷의 소녀는 굉장히 성가시다는 표정으로 천천히 뒤로 물러섰지만, 푸른 소녀는 순식간에 달려들어서 소녀를 품에 안고 스승을 향해 물었다.
“스승, 이 아이는 뭐예요? 새로운 제자?”
스승에게 묻는 푸른 소녀의 눈동자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짝이고 있었다.
***
역시 푸른 소녀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품에 안고 마구 주무르기 시작했다.
매 회차 달라붙어 와서, 그냥 포기하고 그냥 안겨있는 편이 편했다.
뭐, 미니 예린이가 귀여운 건 사실이니까, 어쩔 수 없지.
인간을 어리게 만드는 오브젝트 같은 게 발견된다면, 진짜 예린이도 미니 예린이로 바꿔보고 싶어질 정도였다.
히히.
푸른 소녀는 나를 품에 안은 채, 진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물론 교주로 보이는 남자는 내가 이 대화를 듣고 있는 것을 반대했었다.
하지만 푸른 소녀는 ‘이 아이는 분명히 아군이에요!’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덕분에 나도 같이 있을 수 있었다.
푸른 소녀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이번에도 실패예요.”
푸른 소녀가 들어 올린 것은 묵직한 크기의 녹색 옥판이었다.
푸른 소녀가 말하길, 고대 연금술사 시대에 만들어졌다는 물건이었다.
어떤 연금술로도, 어떤 마도서도 부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교단’의 성물이었다.
그 옥판에는 14가지 문장이 적혀있었는데, 문장 군데군데가 날카로운 손톱으로 긁어낸 것처럼 파여있었다.
절대로 부서지지 않는 옥판에 있는 흔적이라기엔 좀 이상한 흔적이었다.
소녀가 가리킨 곳에는 한 문장이 쓰여있었다.
<나는 진정한 신인 외신의 힘으로, ■ ■ ■ 을 물리칠 지혜를 전하노라.>
하지만 그 옥판 위에는 ‘무엇’을 물리칠 수 있는 것인지가 훼손되어 있었다.
“역시 제 예상대로 교단의 성물은 지워진 존재를 언급하고 있었어요.”
에휴, 하고 한숨을 폭 내쉰 푸른 소녀는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절대로 부서지지 않는 옥판 위에 적힌 문구도 손상되어 있네요.”
푸른 소녀는 머리를 감싸 안고, ‘이제 어디서 자료를 찾아야 하지?’라고,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푸른 소녀는 가방 속에서 오래되어 보이는 문서들을 잔뜩 꺼내기 시작했다.
오브젝트로 만들어진 양피지부터 시작해서, 상당한 세월을 품은 것처럼 보이는 문서들이었다.
그리고 그 문서들에는 하나같이 날카로운 발톱으로 지워진 부분이 있었다.
이상하게도 내가 그 문서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가슴 안쪽이 조금 간질거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다른 회차였다면 이미 푸른 소녀가 죽어버리고 되감기기 시작했을 시간이 지나가자, 보라색 달의 도시에 이변이 생기기 시작했다.
밤하늘에 이상한 기호와 문양들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그 문양들은 점점 더 복잡해지며 어떤 예언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달빛을 받은 물건들이 무작위로 공중에 떠오르며, 마치 중력이 사라진 것처럼 떠다녔다.
거울과 유리창에 비친 사물과 사람들이 점점 왜곡되어 기괴한 형상을 띠기 시작했다.
한밤중에 갑자기 피어난 꽃들이 붉은 피를 흘리며, 붉은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달빛에 물든 그림자들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하며, 그림자들은 자기 주인과는 다른 행동을 보이고 있었다.
보라색 달빛 아래에서 일그러진 그림자들이 보이면서, 마치 다른 세상으로 향하는 통로로 보였다.
도시는 공포와 소란으로 가득 찼지만, 아직 푸른 소녀와 회색 사신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