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44
루시 알른이라는, 진정한 주신의 사도에게 구원을 받았던 그 날부터 페이비는 가능하다면 언제나 루시의 곁을 따라 다녔다.
루시가 수업을 들을 때라거나. 식사를 할 때라거나. 훈련을 할 때라거나.
교회와 관계된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곁을 떠나야 할 때가 아니라면 페이비는 항시 루시를 눈에 담았다.
이러한 행동 때문에 자신이 루시를 편애한다는 소문이 나도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그녀라고 해서 자신의 행동이 민폐가 될 거라는 걸 모르진 않았다. 어쩌면 루시가 이 때문에 자신을 꺼릴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이비가 루시의 곁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그녀의 곁에 있으면 신의 온기가 느껴지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옆에 머무르고 있으면 여러 불안이 사라지는 듯 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신앙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페이비 자신이 루시 알른이라는 사람을 소중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항시 당당하고 망설임 없는 그녀의 모습에서 어째선지 위태로움이 느껴져서.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페이비는 루시에 대해서 몇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선은 그녀가 다른 사람에게 엄격하고 그만큼이나 자신에게 엄격하다는 사실이었다.
루시는 매일 아침이면 누구보다 먼저 훈련장에 나와서 누구보다 거센 훈련을 거듭했고 누구보다 늦게까지 몸을 움직였다.
그녀의 훈련에는 휴식은커녕 공부를 할 틈조차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는데 루시는 매일 그런 일정을 담담히 수행하면서 중간고사에서 누구보다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페이비는 영애께선 잠을 주무시기는 하는 걸까. 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다음은 그녀가 분명 선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잔뜩 날이 서 있는 표정과 빈정대는 어투 탓에 알기 어렵지만 그녀는 먼저 적의를 표하지 않는다면 우선 선의로 상대에게 대응했다.
사람들이 자신을 무서워하는 것을 알고 식사를 할 때건 수업을 들을 때건 눈에 띄지 않는 곳에 향한다거나.
다른 사람이 부탁을 하면 항상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다거나.
누군가, 가령 버로우 공자나 이전의 자신처럼 루시를 질투하고 미워하던 사람일지라도 위기에 처했을지 모른단 생각이 든다면 그 사람을 구하기 위해 기꺼이 노력한다거나.
일련의 모든 걸 눈에 담았던 페이비는 조이가 왜 루시를 좋아하는 지, 그리고 신께서 왜 루시를 자신의 사도로 택했는지 이해했다.
그녀는 신의 간택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었다.
마지막으로 페이비가 알게 된 점은 그녀의 어투에 대한 것이었다.
상대가 평민이건 왕이건 간에 언제나 도발적인 어투와 비웃음 섞인 눈길을 보내는 그녀이지만 평상시에 쓰는 것과 진심으로 상대를 깎아내릴 때의 어조에는 약간 차이가 있었다.
상대를 화나게 하기 위한 어투라고 해야 할까.
신랄하고 선명하며 얄밉고 듣고 있으면 페이비마저도 마음에 붉은 색이 새겨지는 걸 참을 수 없는 어투.
루시는 때때로 그런 어투를 사용했다.
마물을 상대할 때엔 자신에게 시선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대련을 할 때엔 상대의 감정을 뒤흔들기 위해서.
누군가를 매도할 땐 진심으로 그 자를 화나게 만들기 위해서.
지금도 그랬다.
“왜 기분 나빠하시는 거죠?♡ 저 같은 여자아이에게 애정을 받는다니 분에 넘치다 못해 죄송스럽고 부끄러워서 부정해야 하는 소문이잖아요?♡ 오히려 기분 나빠해야 할 건 열등 공자님 따위와 얽힌 저라고 생각하는데요?♡”
“헛소리를 하는 군.”
“아. 그건가요?♡ 열등공자님도 사춘기의 풋풋한 남자애라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모르는 건가요?♡ 이해해요♡ 여자 손 한 번 못 잡아 본 남자가 다 그렇죠 뭐♡”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인 버로우 공자를 보며 키득거리는 루시는 분명 버로우 공자를 화나게 만들려 하고 있었다.
어째서인지는 분명했다.
페이비가 실수를 저질렀기에.
오늘 페이비가 버로우 공작 가문에 방문한 이유는 루시의 부탁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버로우 공작의 병세에 무언가 이상한 부분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혹여 그 이상을 감지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느냐고.
그 부탁을 받았을 때 페이비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나 루시의 도움만을 받았던 그녀다.
그 구원에 자그마한 보답을 할 수 있다면, 신의 뜻을 이루는 데에 조금의 보탬이라도 될 수 있다면 페이비는 무어라도 할 생각이었으니. 그녀의 머릿속
에 거절이란 단어는 존재치 않았다.
그렇게 굳은 마음의 결심을 하고 찾아온 버로우 가문이었지만 이 곳은 너무나도 평화로웠다.
병환이 심각하다던 버로우 공작은 아픈 곳 하나 없이 멀쩡했고. 공작부인은 약간 피로할 뿐 이상한 부분 하나 없었고. 공작 저택 내부에서도 자그마한 이상을 찾아낼 수 없었다.
페이비는 항시 완벽해 보였던 루시가 실수할 때도 있구나 생각을 하며 한편으로는 안도했다.
이상이 있다는 것은 곧 문제가 있다는 것이며, 문제가 있다는 것은 누군가가 불행해진다는 것.
그러니 최선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다. 설령 루시에게 은혜를 갚을 수 없게 되더라도 말이다.
허나 페이비는 한 가지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루시는 신의 사도다. 그녀가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을 할 때면 언제나 그 뒤에는 신의 뜻이 있다는 이야기다.
이번 일도 그렇다. 루시는 여태 버로우 가문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버로우 공자의 부재가 알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버로우 가문에 찾아가야 한다며 상황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소리냐. 이번 일이 루시의 뜻이 아닌 신의 뜻이라는 이야기다.
신께서 루시에게 버로우 가문에 문제가 있노라는 계시를 보냈는데 어찌 실수가 있을까.
저택에는 반드시 이상이 존재했다. 여태까지 그들이 이상을 찾아내지 못했을 뿐.
‘저를 보러 오신 분들이 이렇게 많을 줄이야.’
페이비는 이 사실을 버로우 공자를 보고서야.
‘오랜만에 뵙습니다.’
욕망이 꿈틀거리는 그의 눈동자를 보고서야.
‘여러분.’
그의 안에 도사리고 있는 페이비에겐 너무도 익숙한 검은 색의 기운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깨우쳤다.
과거 페이비를 유혹하려 했던 어둠의 악신이 이제는 표적을 바꾸어 버로우 가문을 노리고 있단 사실을 말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페이비는 너무도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이상을 눈치챘다는 걸 들켜선 안됨에도 불구하고 티를 내고 말았다.
‘성녀님? 무슨 일이십니까?’
버로우 공자의 시선이 자신을 향했을 때 페이비는 당혹 속에서 그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
상황을 수습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 이대로 있다간 신의 계획을 망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으면서. 머릿 속이 새하얘지는 바람에 그 흔한 변명조차 하지 못한 것이다.
그 상황을 수습해 준 것이 루시였다. 그녀는 그것이 사실이건 아니건 간에 분명 치욕스러울 악의적인 소문을 별 것 아니라는 듯 내뱉었다.
그럼으로써 버로우 공자의 시선을 끌고 페이비가 저지른 실수를 없던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페이비. 이게 대체 뭘 하는 짓이죠?
알른 영애를 돕기 위해서, 은혜를 갚기 위해서 이 자리에 온 거잖아요.
그런데 오히려 신의 뜻을 망쳐버리려 하다 영애께 도움을 받다니!
자신이 저지른 실수가 치욕스러워 페이비가 얼굴을 붉힌 채 자신의 치맛자락을 부여잡는 동안에도 루시와 자칼의 말다툼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열등공자님께서 뭘 믿으시나 했더니 자신의 귀여움을 믿고 계셨군요♡ 인정할게요♡ 머리도 귀여우시고♡ 창을 다루는 실력도 귀여우시고♡ 키도 귀여우시니까요♡ 아예 드레스를 입는 게 어떠신가요?♡ 분명 잘 어울릴 거에요!♡”
“그러는 루시 알른 그대도 여성스러움이 없는 건 마찬가지다! 누가 너 따윌 좋아할까!”
“파하핳♡ 시력도 귀여우셨군요♡ 자기 앞에 이렇게 귀여운 여자애가 있는데 알아보질 못하다니♡ 안타까워라♡ 이래서 대를 이을 수가 있으실는지 모르겠네요♡”
“하! 성질이 더러워서 빈정대는 것밖에 못하는 여자가 그딴 말을 하니 실로 웃기군.”
“둘 다. 제발 적당히 좀 해라. 고요하던 저택이 그대들의 소란으로 가득 차겠어.”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여기에 아서가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왕자라는 지위를 지닌 그가 지긋지긋하다는 듯 목소리를 내자 자칼이 먼저 입을 다물었고, 그에 따라 루시도 조용해졌으니.
모두가 가소롭다는 듯 자칼을 내려다 보는 루시와 당장에라도 달려들 것처럼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자칼 사이에 흐르는 불편한 분위기를 신경 쓰던 중 파트란 공작이 응접실로 돌아왔다.
그는 응접실의 광경을 둘러보다가 어깨를 으쓱이더니 돌아가자는 이야기를 했다.
*
<고생했다. 버로우 공자의 머릿속에는 그대를 향한 울분밖에 남지 않았을 것이야.>
‘…뭐. 별 거 아니죠.’
공작가의 병문안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
기숙사 안으로 들어오기 무섭게 할배가 나를 칭찬했지만 나는 차마 그 칭찬을 순수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처음엔 나도 자칼의 시선을 끌기 위해 녀석을 도발했다.
그렇지만 중간부터는 아니었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머리에 열이 올랐거든.
다시 생각을 해봐도 마음에 안 드네.
아니 그 새끼 진짜 왜 자기 혼자 기분 나쁜 척은 다 하고 있어?
지 같은 똥캐랑 엮인다는 게 얼마나 기분 나쁜 일인데!
외모고 스토리고 성능이고 하나 같이 그저 그래서 관련 퀘스트 한 번 깨고 나면 다신 찾을 일 없다는 소리를 듣던 녀석이 지랄지랄하는 꼴이라니!
어이가 없어서 진짜!
중간에 아서가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그 새끼가 먼저 주먹을 휘두를 때까지 도발을 한 다음에 짓밟아 버리는 건데!
내가 속으로 아쉬움을 달래고 있으려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 문을 열지 않았음에도 난 저 너머에 있는 게 누구인지 눈치 챘다. 내가 아는 사람 중 이처럼 따사로운 신성을 품에 지닌 이는 하나뿐이었으니까.
‘어서와요. 페이비.’
“어서와. 허접성녀.”
“실례하겠습니다. 영애님.”
내 방을 찾은 페이비가 쭈뼛거리며 안으로 들어오는 동안에 반지의 마법을 발동시켜 주변과의 소리를 차단시켰다.
페이비가 그토록 놀란 것을 보면 앞으로 있을 이야기는 남들에게 들려줘도 괜찮을 말이 아닐 테니까.
방 안으로 들어온 페이비는 대뜸 고개를 숙였다. 하마터면 자신이 오늘 일을 망칠 뻔했다면서 말이다.
나로썬 그 사과를 이해할 수 없었다. 페이비가 아니었더라면 버로우 공작 가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했을 텐데 왜 일을 망칠 뻔 했다 그러는 지.
‘괜찮아요. 페이비.’
“내가 그렇게 쪼잔한 사람으로 보인 거야? 허접 성녀?”
“네? 아뇨! 그런 것이 아니라.”
‘신경 쓰지 마세요.’
“됐어. 별 것도 아니었으니까.”
“…어쩜 이토록 자비로우신지!”
역시 주신의 사도라면서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이는 페이비를 간신히 진정시킨 후. 난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일을 물었다.
도대체 열등 공자에게서 무얼 보았기에 그렇게나 놀란 것이냐고 말이다.
“…버로우 공자에게 악신의 기운이 느껴졌어요. 이전에 제게 스며들었던 것과 같은 기운이요.”
…
잠시. 잠시만.
버로우 가문의 문제가 어둠의 악신과 관련이 되어 있다고?
– 띠링
[퀘스트 클리어!]
[버로우 가문의 이상을 찾아내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보상을 집계합니다!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페이비의 말을 들은 순간 내 앞에 몇 개의 창이 떠올랐다.
이것의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지금 페이비가 한 말이 모두 다 사실이라는 것.
…어. 그러니까.
가능성 없다 생각했던 일이 진실로 밝혀져서 상당히 당혹스럽기는 한데.
다른 건 몰라도 이거 하나는 분명하네.
자칼 그 새끼의 얼굴을 후려칠 명분이 생겼다는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