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itch Mode

Chapter 246

나는 목에 생긴 뚜렷한 흉터를 만지작거리며, 활활 타오르는 꼬챙이 머리 오브젝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생각보다 수월했어.’

꼬챙이 머리 오브젝트는 파괴 조건도 까다로웠고 오브젝트로서의 존재감도 상당했었다.

게다가 나는 평소와 달리 미니 사신 정원을 소환하거나 미니 사신들을 부를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도, 예상외로 무난하게 해치울 수 있었다.

내 ‘눈’을 마주한 꼬챙이 머리 오브젝트가 생각보다 너무 겁에 질려버린 덕분이었다.

이세계 예린이의 목을 빙 둘러서 생긴 흉터를 만지고 있었더니, 살짝 아쉽기도 하면서도 안심되기도 했다.

살짝 아쉬운 점은 이게 꿈이라서, 예린이에게 상처를 입힌 저 꼬챙이 오브젝트에게 화풀이를 못 하게 됐다는 점이었다.

미니 사신 정원에서 부활해 주면 진짜 두고두고 괴롭힐 텐데….

안심되는 점은 이게 꿈이라는 점이었다.

예린이에게 상처가 안 생겨서 다행이야.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쪼그려 앉아, 널브러진 꼬챙이 머리 오브젝트를 나뭇가지로 콕콕 찔렀다.

그런 내 옆에서 푸른 소녀와 교주를 닮은 남자는 심각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보라색 칼날. 확실히 달의 힘이군. 하지만 달이 왜 연금술사를 공격한 거지?”

남자는 활활 타고 있는 오브젝트의 잔해를 뒤적이며 ‘달과 연금술사는 협력 관계였을 터.’라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정말 보라색 달이 인간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라면 문제가 심각하다. 당장 연금술 길드로 돌아가서 대책을 마련해야 해. 보라색 달은 최강의 달. 내버려 두면 정말 큰 문제가 될 거야.”

잔해에서 보라색 칼날의 샘플을 뜯어낸 남자는 당장이라도 도시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본 푸른 소녀는 손가락을 좌우로 저으며, 꿀밤을 때리고 싶어지는 표정으로 말했다.

“흐흥. 아뇨, 문제는 달이 아니에요.”

푸른 소녀는 길쭉한 유리 막대기를 꺼내더니, 오브젝트의 잔해에서 질척질척한 검은 액체를 끌어내었다.

“진화액?”

“네, 진화액이 문제인 거죠. 솔직히 처음 볼 때부터 뭔가 이상했어요.”

푸른 소녀는 마치 홈쇼핑이나 사이비 종교 홍보처럼 과장된 자세를 취하며 말하기 시작했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진화액이 아닙니다! 인간이 마시면 진화를 이끌어내서 불로불사! 마도서에 뿌리면 마도서가 녹아서 없어져 버리는 그야말로 기적의 물! 부작용은 없습니다! 환경 오염도 없어요!! 그야말로 완벽한 연금술사의 꿈!”

큰 소리로 말하던 푸른 소녀는 흠흠, 하고 목을 가다듬더니 다시 말했다.

“이상하지 않아요? 그렇게 형편 좋고 완벽한 물질이 나왔다는 게? 그런 사기꾼 같은 물질, 분명 엄청난 부작용이 있을 게 뻔하죠.”

“연금술사 길드의 현 마스터이자, 세계 최고의 천재로 불린 그 남자가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는 거로군.”

남자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말을 덧붙였다.

“그러고 보면 검게 물든 소라도 있었지. 그렇다면 그것도 보라 달의 권속과 진화액이랑 연관이 있어 보이는군.”

나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이번 꿈은 상당히 과거 시점을 다루고 있는 것을 느꼈다.

이제까지 봐왔던 푸른 소녀의 꿈속에서는 진화액에 대응하고 있는 모습만 나왔었으니까.

게다가 푸른 소녀의 격도 다른 꿈이랑 비교하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낮아 보였다.

그 순간, 허공에서 보라색 소라 껍데기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SDVIMVFoanVzY1YwSVhjamMzUkt1WlJKZ0NsamtaQ0sveENFK2VoZUwvV3lONlVhVXh6bkhqVlBDQy9KT0preg

마치 공기 중에 보이지 않는 손이 있어 천천히 그것을 만들어 내는 듯했다.

소라 껍데기는 희미한 빛을 발하며 공중에 떠 있었고, 그 안에서는 아련한 말소리가 새어 나왔다.

희미한 말소리로 나를 인도하는 꿈의 이정표였다.

나는 약간의 기대감을 안은 채, 그 소라를 집어 들었다.

하지만 내가 소라를 손에 쥐는 순간, 하늘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갈라지기 시작했다.

불길한 검은 색으로 물든 구름 사이로, 마치 공간이 깨진 유리처럼 갈라져 있었다.

그리고 그 틈에서 거대한 오브젝트의 손이 뻗어 나오더니, 도시를 향해 점점 내려오기 시작했다.

***

보라색 달의 도시에 불길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주변을 모두 짓눌러버릴 것 같은 존재감을 풍기는 거대한 손아귀가 구름 속에서 점점 내려오고 있었다.

도시의 이상 사태에 대처하고 있던 시민들은 모두 하늘을 올려다보았지만, 푸른 소녀는 조금 달랐다.

오히려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지면을 가득 채운 보라색 빛이 보였다.

보라색 달의 힘을 듬뿍 머금은 그 빛은 지면과 벽, 그리고 천장에 글자를 새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글자를 보는 순간, 끝없는 공포가 소녀를 향해 몰려오기 시작했다.

‘이 이름을 쓰면 안 돼.’

‘이 이름을 봐서는 안 돼.’

‘이 이름을 말해서는 안 돼.’

‘이 이름을 기억해서는 안 돼.’

하늘을 뚫고 나타난 손아귀는 새겨진 이름을 꺼리도록 정신 오염을 뿌리고 있었다.

하지만 푸른 소녀는 그 끝없는 공포 속에서 몇 가지 정보를 떠올리고 있었다.

푸른 소녀가 정체를 밝히기 위해서 계속 추적해 왔던 지워진 존재.

정말 많은 문서 속에 적혀있었던, 지워진 이름.

도시의 상공에 나타난 이름을 없애려고 하는 강대한 마도서.

이명을 제외하면 그 어떤 상세조차 남지 않은 ‘신을 죽인 마도서’

별로 연관이 없어 보이는 정보 속에서 소녀는 한가지 결론을 도출해 냈다.

많은 사람이 기록하고자 했던 이름.

하지만 지워진 이름.

아주 먼 고대에 존재했던 신을 죽인 마도서.

지워진 존재는 어쩌면 아주 먼 고대에 죽어버린 신앙의 이름이 아닐까?

푸른 소녀는 그제서야 고개를 들고, 하늘을 쳐다보며 외쳤다.

“신을 죽인 마도서!”

지금, 이 순간은 ‘지워진 존재’를 계속 쫓던 푸른 소녀에게 해답을 주는 순간이었다.

‘그래, 내가 찾던 것은 ‘신의 이름’이었어.’

하지만 이 깨달음을 가진 채, 신을 죽인 마도서에게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런 의문을 품는 순간, 뚜방한 걸음걸이로 다가온 흑백 옷의 소녀가 다가왔다.

그리고 손에는 흐릿하게 흩어지고 있는 보라색 소라를 든 채, 말했다.

“거쩡하지 마. 내가 지켜 주께.”

발음은 조금 이상했지만, 더없이 안심되는 말이었다.

***

거대한 손아귀가 도시를 할퀴었다.

튼튼한 건물들은 무력하게 무너졌고, 거기에 수많은 사람이 휩쓸렸다.

하지만 그런 건,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더욱 큰 문제는 사람들을 죽이고 다니는 정체불명의 무언가가 도시 내부에 있다는 점이었다.

거대한 손아귀에 휩쓸리지 않은 거리에도 죽은 사람들이 즐비했으니까.

그 시체들은 날카로운 무언가로 갈기갈기 찢겨 있었다.

그런 도시의 골목 구석에서 한 연금술사가 자기 팔뚝을 마구 긁고 있었다.

“지워져. 지워지란 말이야!”

너무 깊게 후벼파서 핏줄이 드러나서 피가 줄줄 흘러도, 지워지지 않았다.

팔뚝에 새겨진 불길한 이름.

이유는 모르겠지만, 너무나도 불길한 이름이었다.

그가가각.

그때, 돌벽이 사정없이 파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남자가 ‘힉’하고 숨을 들이마시며 고개를 돌렸지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이름이 새겨져 있던 돌벽이 날카로운 손톱으로 찢은 것처럼 무너져 있었다.

“으아아악!”

공포에 질린 남자는 비명을 지르며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피를 너무 흘려서 창백한 남자는 숨을 몰아쉬며, 오래된 건물 밑으로 몸을 숨겼다.

먼지가 가득하고 제대로 쪼그려 앉을 수 없는 좁은 공간이었지만, 그런 밀폐된 분위기가 남자를 조금 편안하게 만들었다.

그때 남자의 손끝에 뭔가 축축한 것이 닿았다.

“응?”

남자가 고개를 돌리자, 갈기갈기 찢어진 수많은 시체가 건물 밑 깊숙한 곳에 가득했다.

“허억. 허억.”

남자는 비명을 참으며 천천히 건물 밑에서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시체 더미에서 흉측한 손이 뻗어져 나와 남자를 단단하게 붙들었다.

“안 돼!”

그리고 남자는 그대로 끌려들어 가 시체들처럼 갈기갈기 찢겨 버렸다.

***

하늘에서 튀어나온 불길한 손아귀를 보는 순간, 나는 오래된 기억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름없음.’

오브젝트 협회에서 분명히 교육받았지만, 저절로 까먹어 버린 그 이름.

그리고 불길한 손아귀가 가진 분위기에서 ‘계양산 임시 캠프’에서 느꼈던 악의를 떠올렸다.

도시의 상공에 나타난 오브젝트는 분명, ‘이름없음’이었다.

구름을 뚫고 나타난 ‘이름없음’은 도시를 끊임없이 긁어내고 있었다.

손톱이 한번 지나갈 때마다 건물이 무너지고 수많은 장작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푸른 소녀와 내 앞에 나타난 것은 작은 ‘이름없음’의 무리였다.

기괴하게 뒤틀린 머리와 몸통과 다리.

그리고 하늘 위에 떠오른 손아귀와 똑같이 생긴 팔을 달고 있는 오브젝트였다.

이 작은 ‘이름없음’들은 천천히 다가와서 날카로운 손톱으로 사람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있었다.

천천히 걷다가도 어느 순간 코앞에 있기도 했고, 밀폐된 공간에서 갑자기 튀어나오기도 했다.

‘그래도 세계구급 특급 오브젝트라는 명성이나, 느껴지는 격에 비하면 꽤 상대하기 편하네!’

라고 생각한 적이 나에게도 있었다.

처음에는 공간 절단을 하는 족족 잘려 나가고, ‘뀩’ 쥐면 부스러져 버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어려워져 갔다.

마치 내 능력에 적응하는 것처럼.

공간 절단을 해도 단번에 잘려 나가지 않았고, 공간을 ‘뀩’ 쥐어짜도 공간을 갈아버리는 소음과 함께 뚫고 나오기 시작했다.

게다가 파괴 조건도 난감했다.

<신의 완전한 죽음.>

신이 뭔데?

전 세계 규모의 특급 오브젝트일 때부터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이대로라면 꿈의 올바른 결말을 알려주는 보라색 소라의 미션을 완수하기 힘들어 보였다.

보라색 소라가 알려준 힌트는 단순했다.

[푸른 소녀를 지키며 이 도시에서 한 시간을 버텨라.]

처음에는 상당히 쉬울 것 같았는데, 힝.

푸른 소녀와 그 스승이 사용하는 하얀 불꽃도 꽤 강력했는데, ‘이름없음’은 순식간에 면역을 얻으며 별 도움이 되지 않게 되었다.

‘큰일이군. 이대로라면 1시간을 버틸 수가 없어.’

이세계 예린이의 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을 감수하고 헤일로를 불러내야 하나 생각하는 순간.

벽을 뚫고 새하얀 무언가가 돌진해 오며 작게 분열한 ‘이름없음’을 사방으로 날려버렸다.

“아귀야!”

푸른 소녀가 해맑게 웃으며 그 하얀 돌덩어리를 반겼다.

‘아귀!’

나는 아귀를 보는 순간,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라버렸다.

저 정도 크기의 아귀라면 헤일로를 쓸 수 있지 않을까?


           


Seoul Object Story

Seoul Object Story

서울 오브젝트 이야기
Score 9.2
Status: Ongoing Type: Author: Artist: Released: 2023 Native Language: Korean
Humans, once the masters of Earth, were losing their place to the inexplicable phenomena known as Objects. And this is a story about becoming an Object and living worry-free in the Seoul of such a world.

Options

not work with dark mode
Res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