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설기처럼 새하얗고 커다란 아귀.
꿈속에서 봤던 아귀보다 작아 보였지만, 표정만큼은 몇 배로 대단해 보이는 당당한 표정의 아귀였다.
구오오!
작게 분열한 수많은 ‘이름없음’을 날려버린 뒤, 이세계 하얀 아귀는 묵직한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억울해 보이지 않는 표정과 귀엽지 않은 울음소리.
게다가 돌처럼 딱딱한 몸이라니!
역시 억울한 표정으로 뀨힝힝 우는 내 아귀가 더 귀여워.
푸른 소녀는 그런 흉한 아귀에게 다가가, 굉장히 반가워하며 마구 쓰다듬어 주었다.
“대단해! 용케 찾아왔구나.”
굉장히 단단하고 꺼끌꺼끌할 것 같은데, 푸른 소녀는 그런 것은 신경도 쓰지 않고 환하게 웃으며 쓰다듬고 있었다.
그리고 하얀 아귀를 통통 두들기더니, 소리쳤다.
“자, 가서 적들을 모두 날려버려!”
푸른 소녀의 명령을 들은 하얀 아귀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돌진을 시작했다.
손쉽게 날려버렸던 ‘이름없음’은 별로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거겠지.
흠, 그래도 ‘이름없음’은 질량을 이용한 공격 따위는 순식간에 적응해 버릴 텐데?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듯이 천천히 움직이면서, 눈을 떼면 순간 이동하는 것처럼 나타나는 ‘이름없음’들은 분명 공간을 다룰 줄 아는 오브젝트였다.
공간을 다룰 수 있는 오브젝트에게 질량을 이용한 육탄 공격은 별로 효과적인 수단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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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나 다를까, 오만한 하얀 아귀의 돌진은 첫 ‘이름없음’을 들이박는 것과 동시에 끝이 나버렸다.
체급 차이가 엄청난데도 아귀는 ‘이름없음’을 밀어내지 못하고, 그대로 붙잡혀 버렸다.
자기 몸을 공간에 고정해서 버틴 뒤, 날카로운 발톱을 아귀에게 박아 넣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얀 아귀는 날카로운 손톱에 무참히 파헤쳐진 백설기가 되어버렸다.
“앗!”
푸른 소녀는 큰 상처를 입고, 천천히 재생하는 아귀에게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나는 그런 소녀에게 다가가서 손을 내밀었다.
“아귀, 비려줘!”
그러자 푸른 소녀는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내 손을 꼭 붙잡았다.
“좋아. 빌려줄게.”
푸른 소녀와 내가 손을 마주 잡고 하얀 아귀를 조종하기 시작했다.
나와 푸른 소녀는 손을 맞잡고, 각자 남은 손으로 헤일로와 하얀 아귀의 코어를 들었다.
그 끝을 알 수 없는 예린이의 장작이 아귀의 코어 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했고, 내 왼손에 들린 헤일로는 하얀 아귀의 머리 위에 씌워졌다.
검게 물들고 끝없이 붕괴해 가는 하얀 아귀의 몸.
저 흉한 아귀는 내가 가진 귀여운 아귀보다 격이 낮은 건지, 순식간에 온몸이 불타서 가루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코어를 통해서 밀려들어 가는 끝없는 장작의 불꽃이 먼지로 변해버린 아귀의 몸을 회복시키기 시작했다.
끊임없이 부서지고, 재생되는 무한의 순환.
그 고통스러운 반복은 하얀 아귀를 점점 격이 높은 존재로 재탄생시키고 있었다.
한번 부스러질 때마다 한 발짝씩, 정말 고통스럽고 굉장히 천천히.
만 번은 부스러져야 마시멜로 아귀에 닿을 정도로 천천히, 하지만 착실하게 나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격이 높아진 하얀 아귀의 입에서 고통에 찬 신음이 흘러나왔다.
뀨힝힝.
그와 동시에 헤일로가 아귀의 머리 위에 안착하고, 주변으로 하얀 불꽃을 퍼트리기 시작했다.
능력 무효화의 불꽃이 ‘이름없음’의 분체에 닿자, 분명한 실체를 가지고 있던 그것들이 신기루처럼 사라지기 시작했다.
‘됐어!’
이 정도면 한 시간을 쉽게 버틸 거라는 생각이 들기 무섭게,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
하늘이 무너져 내리고, 땅이 조각나서 그 밑으로 끝없는 공허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회차가 실패해서 시간이 되감기는 것 같았지만, 조금 달랐다.
‘꿈이 무너지고 있어.’
하얀 불꽃이 오브젝트 능력으로 만들어진 꿈 자체를 무너트리고 있었다.
아직 결말을 보지 못했는데!
어떡하지?
***
세희 연구소 수면실.
이곳에서 한 시간만 자도 8시간을 잔 것 같다는 평가를 들어서 그런지, 곤히 잠든 사람들이 언제나 가득했다.
그 수면실 구석에는 달빛을 받으며 살랑살랑 잎사귀를 흔드는 새싹 사신이 잠들어 있었다.
그때, 밤하늘과 비슷한 남색으로 빛나며 살랑거리는 새싹 사신이 심어진 화분 곁으로 투명한 새싹 사신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열매를 먹은 애착 인간 말고는 보이지 않는 특별한 새싹 사신들이었다.
그렇게 모여든 새싹 사신들은 화분에 심겨 있는 새싹 사신보다 조금 작았다.
크기를 제외하면 완전히 똑같이 생겨서 그런지, 언니를 찾아온 동생들처럼 보이기도 했다.
‘엄마가 우리를 부르고 있어!’
‘엄마의 요청.’
‘언니, 일어나!’
작은 새싹 사신들은 마치 잠에서 깨우려는 것처럼 손가락으로 화분 새싹 사신의 빵빵한 볼을 쿡쿡 찌르고 있었다.
그것이 조금 성가신지, 화분 새싹 사신은 미간에 주름을 만든 채, 화분 깊숙한 곳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
작은 새싹 사신들은 깜짝 놀라서, 화분 새싹 사신의 새싹을 잡아당겨서 숨지 못하게 막아버렸다.
그리고 작은 새싹 사신들의 린치가 시작되었다.
화분에서 완전히 뽑아내 버리고, 뺨을 때찌때찌 때리고,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언니 새싹 사신은 미간을 좁히면서 뒤척이기만 할 뿐, 도무지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붉은 사신을 불러서 새싹에 불을 붙여야 하나?
이런 생각이 조금씩 퍼져나가던 중, 한 동생 새싹 사신이 잔뜩 화가 나서 언니 새싹 사신에게 다가섰다.
“앙!”
그리고 입을 크게 벌리더니, 언니 새싹 사신의 통통한 볼을 꽉 깨물어버렸다.
‘!!!!”
그러자 언니 새싹 사신은 깜짝 놀라서, 잠에서 깨어나 버렸다.
언니 새싹 사신의 볼에는 이빨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
어리둥절한 표정의 언니 새싹 사신을 향해, 동생 새싹 사신들이 마구마구 의지를 내뿜기 시작했다.
‘엄마가 우리를 부르고 있어!’
‘엄마는 우리가 필요해!’
그 의지를 들은 언니 새싹 사신은 고개를 작게 끄덕이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달빛 아래로 걸어 나갔다.
뚜방뚜방.
그리고 그 뒤로 조금 작은 동생 새싹 사신들이 쫓아갔다.
‘나무!’
언니 새싹 사신이 양손을 들어 올리며 의지를 내뱉자.
‘나무!!!’
동생 새싹 사신들도 양손을 들어 올리면서 나무의 형상을 취했다.
그러자 새싹 사신들의 새싹에서 남색 빛이 깜빡이더니 하늘을 향해 빛을 쏘아 보냈다.
그 방향은 러시아.
회색 사신이 있는 방향이었다.
그리고 그 장면을, 수면실을 지나가다 발견한 황금 사신 한 마리가 있었다.
‘엄마?’
사탕으로 장난을 친 엄마를 열심히 찾고 있던, 황금 사신 중 하나였다.
***
몸이 까맣게 타오른 하얀 아귀는 귀여운 목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뀨힝힝.
하얀 아귀가 더 귀여워졌어!
푸른 소녀는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귀여운 목소리를 내는 하얀 아귀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손을 맞잡은 소녀와 그 기쁨을 나누려는 순간, 푸른 소녀의 눈앞에서 흑백 옷의 소녀가 정신을 잃은 것처럼 축 늘어졌다.
“어?”
여전히 자기 손을 단단하게 붙잡은 걸 보면 완전히 정신을 잃은 것 같지는 않았지만, 뭔가가 이상했다.
흑백 옷의 소녀는 분명히 실체를 가지고 멀쩡히 있었지만,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상하게도 점점 흐릿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망가진 TV 화면처럼 일그러지고 지지직 노이즈가 낀 것만 같았다.
푸른 소녀는 손을 맞잡은 채, 축 늘어진 소녀를 바닥 위에 얌전히 눕혀주었다.
“괜찮아?”
푸른 소녀는 걱정을 담은 표정으로 물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이상 현상은 어느새 하얀 아귀에게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머리 위 빛의 고리가 불안한 것처럼 마구 흔들렸고, 하얀 아귀의 몸을 재생시키던 불꽃도 점점 양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어떡하지? 손을 놓고 연결을 끊어야 하나?’
황금색 불꽃이 줄어들면서 하얀 아귀의 균열이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게다가 손을 맞잡은 소녀도 당장이라도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쾅!
그 순간 도시의 주변에서 거대한 나무들이 솟아오르며, 거대한 굉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마치 도시를 지키는 성벽처럼 주변을 감싸는 형태의 거대한 나무들.
그 나무들은 황금색과 남색이 뒤엉켜 섞여 있는 신비로운 나무였다.
나무들은 마치 환상처럼 신기루처럼 흐릿하지만, 분명히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흑백 옷의 소녀 주변에서 푸른 소녀 자신과 똑같이 생긴 마도서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온통 남색이라는 점.
그 크기가 손바닥만 하다는 점.
머리 위에 새싹이 돋아나 있는 점.
그리고 나이가 어려 보이고, 볼이 귀엽게 통통하다는 점을 제외하면 푸른 소녀와 똑같았다.
그 새싹 마도서들은 흑백 옷의 소녀를 둘러싸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는데, 그중 대장으로 보이는 새싹 마도서의 볼에는 선명한 물린 자국이 있어서 조금 웃음이 나왔다.
가장 당차 보이면서, 물린 자국이라니.
“후후.”
그때 푸른 소녀가 작게 웃은 소리를 들은 걸까?
새싹 마도서들은 웃음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굉장히 혼란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새싹 마도서들은 푸른 소녀와 흑백 옷의 소녀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더니, 고개를 갸웃하고 기울였다.
‘엄마가 두 명?’
***
시야가 점점 흐려져서, 판타지 세계의 도시 너머로 현실에 있는 시베리아가 겹쳐서 보이려는 순간.
커다란 나무들이 솟아오르며, 꿈의 세계를 단단히 지탱하기 시작했다.
헤일로의 영향으로 당장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연결이 새싹 사신들의 힘으로 다시 이어졌다.
흐릿해진 시야가 정상으로 돌아오면서, 정신이 들었다.
‘엄마!’
내가 눈을 뜨기가 무섭게 새싹 사신들이 우르르 나에게 안겨들었다.
또 늘었어!
새싹 사신은 분명 한 마리였을 텐데!
이렇게 쾌락 없는 책임이 또 증식해 버리다니.
새싹 사신들은 ‘엄마를 구하러 왔어!’라는 표정으로 자신만만해하고 있었다.
푸른 소녀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점점 부스러지고 있던 하얀 아귀가 다시 멀쩡해졌다.
뀨!
그리고 하얀 아귀는 승리의 포효를 내질렀다.
그러자 막대한 양의 하얀 불꽃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도시 전체에 눈처럼 내리기 시작했다.
그 불꽃은 ‘이름없음’의 분신들을 없애버리는 능력 무효화의 눈송이였다.
“이겨따!”
내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웃으면서 푸른 소녀를 향해 히히 웃었다.
하지만 ‘이름없음’은 이렇게 끝낼 생각이 없는 듯했다.
깊고 어두운 구름 속에서 거대한 돌풍이 갑자기 불어닥쳤다.
천둥이 울부짖는 가운데, 구름이 갈가리 찢어지며 흉측한 팔 전부가 드러났다.
그 팔은 하늘을 갈라놓은 거대한 균열을 움켜잡더니, 천천히 뜯기 시작했다.
균열 사이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내 예상보다 훨씬 거대하고 섬뜩한 존재였다.
그야말로, 인간의 악의가 전부 모여있는 것만 같았다.
온몸이 추악하게 뒤틀린 그것은 한쪽 팔로 기어가는 것처럼 도시를 긁어내기 시작했다.
도시에 상흔이 새겨질 때마다 ‘이름없음’의 끔찍한 본신이 점점 균열 밖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름없음’의 본신이 뿜어내는 존재감은 오브젝트와 상관없는 사람도 느낄 수 있을 만큼 강력했다.
푸른 소녀와 맞잡은 손에서 작은 떨림이 느껴졌다.
“신을 죽인 마도서.”
푸른 소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지막한 소리로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