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47
지난 번. 파트란 공작이 순간이동을 시켜주었을 때의 편안함을 기억하는 나는 이번 순간이동 때도 비슷한 경험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물론 그 때 내가 멀미를 겪지 않았던 이유는 파트란 공작이 지닌 뛰어난 마법 실력 때문임을 모르진 않지만 혹시 모르잖아.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이 강해진 지금의 나라면 멀미를 견딜 수 있을지도 몰라!
호기로운 마음을 품은 나는 신성으로 몸을 강화한 후에 순간이동의 진 안으로 들어섰고 여전히 난 약해빠졌다는 것을 체감하게 되었다.
도저히 못 움직일 수준은 아니지만 딱 거기까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냐.
속이 뒤집어 지는 것을 견디고 있으려니 내 머리 위에 있던 얼빠여우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냥 내 도움을 받으래도.”
녀석이 무언가를 펼치기 무섭게 속이 편안해졌다. 확실히 이럴 때는 얼빠 여우가 유용하다니까.
이럴 때에만 유능해서 문제긴 하지만.
어젯밤. 얼빠여우가 할배와 소통한다는 것을 알아챈 나는 한 가지 기발한 생각을 떠올렸다.
그것은 바로 얼빠여우를 통해 사람들과 정상적으로 소통을 하는 것!
내가 할배에게 정상적으로 이야기를 전한 후. 할배가 얼빠여우에게 그 내용을 전해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다.
드디어 메스가키 스킬에 의한 억까에서 벗어날 수 있을거란 생각에 들떠 있던 나였지만 당연하게도 내 기발한 생각은 실패로 돌아갔다.
<미안하구나. 여아야. 목소리가 전해지지 않는 모양이야.>
나를 괴롭히고 싶어 하는 허접 변태 주신이 그런 걸 허락할 리가 없잖아!
머릿속으로 생각을 떠올렸을 때부터 이렇게 되리라 예상하고 있었던 나는 별로 실망하지 않았다.
비슷한 일을 한 두 번 겪어봤어야지.
하. 진짜 허접 주신은 왜 이런 부분에서만 철저한 거야?!
그 철저함으로 날 좀 도와주면 어디 덧나나?!
“아가씨. 정말 요한 주교와 같이 오지 않아도 괜찮겠습니까?”
허접 주신을 향한 원망이 차올라서 투덜거리고 있으려니 칼이 내게 물음을 던졌다.
방금 전 요한에게 이사벨을 만나러 간다 했을 때 요한은 자기도 함께 가겠다고 그랬다. 그래야 쉽게 들어갈 수 있을 거라면서.
허나 난 그 제안을 거절했다.
길게 이야기를 할 것도 아니고 이번에 석판에 관해 협상하고 나면 볼 일 없는 인간을 만나는 데 뭐 하러 주교를 대동하겠어.
그 때는 그냥 나를 향한 호의라 생각했는데 칼이 저런 표정으로 되묻는 걸 보면 뭔가 이유가 있었나보다.
…혹시 나 아르테아 백작가에서 뭔가 일을 저질렀나? 설마. 아니겠지?
순간이동의 진에서 빠져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르테아 가문의 저택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를 본 순간 도저히 탄성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아르테아 가문의 저택은 내가 보았던 그 어떤 건물보다 아름다웠으니까.
게임 속 캐릭터들이 이 곳을 설명할 때 쓰는 단어는 성지의 모습을 재현한 것 같다는 단어였다. 신께서 자리하여 축복을 내리는 것만 같다고 말이다.
모니터 너머에서 그 묘사를 들을 적에 난 그 묘사를 과장스럽다고 생각했다. 분명 저택의 디자인은 아름다웠지만 다른 멋들어진 저택에 비하여 특출난가 하면 그렇진 않았으니까.
허나 지금은 아니다. 이 세상 안에 들어와 두 눈으로 저택의 모습을 마주하게 된 나는 그 풍경에 압도될 수밖에 없었다.
규모가 그리 거대한 것은 아니다.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한 것도 아니다.
그저 신성했다.
신이 저 곳에 머무르다 얼마 전 떠났다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사람이 만든 건축물에 압도된다는 것이 이런 느낌인가.
<허. 대체 돈을 얼마나 쓰면 이런 건물을 만들어 낼 수가 있는 거지?>
‘…저걸 보고 돈 이야기가 나와요?!’
아니. 할배! 사람이 감동하고 있는데 산통깨지 말라구요!
주신을 허접 취급하는 나조차도 경건함이 차오르는 걸 느끼고 있었는데 주신을 섬기는 당신이 이러면 어떡해요!
봐요! 얼빠여우도 얌전히 저걸 바라보고 있잖아요!
할배는 얼빠여우 같은 변태보다 감성이 메마른.
“별로구나. 돈으로 치장했지만 결국 그 근간이 달라진 것은 아니니. 구경할 가치도 없어.”
…하여간 이래서 감성이 메마른 어른은 안 된다니까!
뭐든 간에 숫자로만 보니까 말야!
나처럼 마음으로 감상해야지! 나처럼!
“잠시 멈춰 주십시오.”
삶에 찌들어버린 할배와 얼빠여우를 불쌍히 여기면서 저택에 다가가고 있으려니 저택의 경비들이 웅성이는 게 보였다.
다들 질색을 하는 걸 보니 과거의 루시가 문제를 일으켰단 가설에 힘이 더해지는 듯 했다.
결국 저들 중에서 앞으로 나온 건 경비 중 가장 어린 청년이었다.
“실례하겠습니다. 알른 가문의 영애시여. 이 저택에 무슨 용무로 방문하신 건지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저택의 주인 분을 만나러 왔어요.’
“돈에 미친 광신도를 만나러 왔어.”
이사벨은 광신도인가. 크게 틀린 말은 아니라 생각하지만 경비의 입장에선 그렇지 않았나
보다. 자신의 주인을 모욕하는 말에 표정이 일그러진 그는 다시금 내게 물음을 던졌다.
“…아르테아 백작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알아들었으면서 왜 물어봐? 무슨 문제 있어?”
표정 관리를 잘 못 하네. 하긴 그냥 모욕도 아니고 메스가키 스킬의 도발 성능이 담긴 모욕이니까. 열이 안 받는 게 비정상이긴 해.
“혹시 미리 일정을 잡아두셨습니까?”
‘아뇨. 그런 건 아닌데.’
“내가 만나주겠다는 데 왜 일정을 잡아야 해? 이해가 안 되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경비는 말을 끝마치자마자 도망치듯 저택 쪽으로 향했다.
아니. 야. 잠시만. 나 너한테 줄 거 있는데?!
그 뒷모습을 보고 곤란함을 느낀 나지만 차마 소리를 높이진 못했다.
저택 인근의 경비들이 날 보는 눈빛이 좋지 못했던지라. 아르테아 백작을 돈에 미친 광신도라고 부른 걸 들은 거겠지.
으음. 거래를 하러 온 건데 소란을 일으켜서 좋을 건 없잖아?
일단은 떠난 경비가 돌아오는 걸 기다리자.
만날 수 없다 그랬을 때 인장을 꺼내서 보여주지 뭐.
“죄송합니다. 영애님.”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온 경비는 사과의 말을 전했다.
아르테아 백이 업무로 바빠 나와 만날 시간을 낼 수 없을 것 같다고 말이다.
정치 감각이 뛰어나지 않은 나조차도 저 말 속에 들어있는 의미를 느낄 수 있었다.
번역하자면 너 따위에게 낼 시간 없으니 순순히 꺼져라 정도겠지.
루시의 악명을 생각해보면 당연한 결과이려나. 그래서 나는 고개 숙이는 경비에게 요한에게서 받은 인장을 꺼내어 보여주었다.
‘그냥 찾아온 건 아니에요…’
“꼰대 주교가 부탁해서 온 거야. 여기에 있는 광신도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오라고 했거든. 너 같은 돌대가리도 이 정도는 확인할 수 있겠지?”
인장을 받은 경비는 곤란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그냥 안에 들어가서 진품인지 아닌지 확인해보면 그만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문 앞을 지키는 경비 무리에서 다른 남자가 걸어 나왔다.
중년의 나이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노쇠함 하나 보이지 않는 그는 젊은 경비의 어깨를 붙잡아 옆으로 비켜세우고는 내 앞에 서더니 대뜸 이렇게 이야길 했다.
“이런 가짜를 보여주셔도 곤란합니다.”
‘네?’
“무슨 헛소리야?”
“요한 주교님께서 영애 때문에 고역을 치렀다는 것은 공연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주교께서 영애께 인장을 드릴 리 없지 않습니까.”
아아. 그러니까 요한이 나 같은 사람한테 이런 물건을 줄 리가 없단 거구나?
그렇게 생각할 법도 하지. 내 악명을 대충 알고 있는 나는 그의 의심을 이해했다.
그래서 들고 가서 진품인지 확인해 달라 부탁을 했지만 경비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확인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번엔 영애께서 또 무슨 욕심을 내어서 아르테아 백작을 만나려지는 지는 모르겠습니다. 허나 소란은 이쯤 하고 돌아가 주십시오.”
이번엔 또. 라는 단어가 튀어나온 걸 보면 예전에 루시가 아르테아 백작한테 무슨 패악질을 부린 게 확실한 모양이네.
키야. 진짜 루시 너는 깽판을 치지 않은 곳이 없구나?! 하긴 왕한테 가축 냄새가 난다고 한 녀석인데 뭐가 무섭겠냐!
…하아아. 이래서 요한이 같이 가겠다고 이야기를 한 거였구나. 사정을 알았다면 그냥 데려왔을 텐데.
어쩔 수 없지. 한 번더 영지로 돌아갔다가 다시.
“부디 이러한 행동이 베네딕 경의 명예를 해치는 일임을 알아주시길 바랍니다.”
갈 생각이었는데 늙은 경비가 한 마디를 더하는 바람에 생각이 바뀌었다.
저거 어투가 정중해서 그렇지 안의 내용만 따지고 보면 네가 이러는 거 느그 애비가 들으면 부끄럽지 않겠냐? 라고 말하는 거잖아.
나 다른 건 몰라도 욕은 잘 알아들어. 소울 아카데미 1학기 때 지겹도록 들은 게 저런 말이거든.
으음. 살짝 꼴 받네.
어떡하지?
전면에서 모욕을 당하고 물러서는 건 내 취향이 아닌데 말야.
아.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 일부러 소란을 일으키는 거야.
부하의 잘못은 곧 관리자의 책임! 이 녀석이 문제를 일으키게 만들어서 이사벨에게 빚 하나를 지워 두는 거지!
이사벨이 날 어떻게 보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자기 부하가 날 먼저 공격했는데 축객령을 내리진 못할 거 아냐.
어차피 지금 내 옆에는 칼도 있고 얼빠여우도 있으니 내가 다칠 일도 없을 거고.
‘이렇게 할 건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방금 막 떠오른 생각을 할배에게 이야기 해주었다.
<여아야. 그래선 안 된다.>
역시 할배는 말리는 구나.
미안해요. 할배. 방금 말한 거 의견을 묻는 게 아니라 통보를 하는 거여서. 일단 일을 저지를 생각.
<더 성대하게 해야지. 겨우 그 정도로 멈춰서 쓰나.>
…말리는 게 아니라 부추기는 거였어요?!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기에 절로 웃음이 샜다.
아. 알겠어요. 할배.
할배의 조언을 받아들여서 일 좀 크게 벌여 볼게요.
간신히 웃음을 그친 내가 고개를 들자 늙은 경비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 생각하는 거겠지.
하. 그러게 왜 굳이 먼저 도발을 하냐.
난 그를 향해 싱긋 웃어주고서 경비의 발을 짓밟았다.
“저기♡ 저기♡ 넌 지금 하는 짓이 이 저택의 미친년을 모욕하는 일이라 생각하지 않아?♡”
“…예? 지금 무슨 말씀을.”
“아. 돌대가리라 그런 걸 생각 못 하는구나?♡ 이런 멍청이가 왜 저택의 정문을 지키고 있지?♡ 허접 주신에 미친 광신도라 석상을 가운데에 놔둔 걸까?♡”
늙은 경비의 얼굴이 벌겋게 물든다.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을 견딜 수 없을 만큼 심대한 분노. 여태까지의 경험상 조금만 더 건드리면 내 얼굴을 후려치려 들겠지.
그러니까 더 긁어야겠다.
“화났어?♡ 이런 꼬맹이가 대~단하신 주인님을 무시하니까 화난 거야?♡ 푸핳♡ 푸하핳♡”
“…”
“그치만 이런 멍청이를 경비로 들인 사람인 걸♡ 저택의 입구에 쓰레기를 던져 놨는데 어떻게 무시를 안 해?♡”
“…영애.”
“얼굴 보고 있으면 쓰레기 냄새나니까 어디로 꺼져주지 않을래?♡ 아. 돌대가리라 이런 말로 이해 못하려나?♡ 곤란하네~♡ 난 돌의 언어는 모르는데♡ 혹시 통역…”
결국 내 도발을 견디지 못한 늙은 경비가 주먹을 내질렀다.
울분을 못 이겨 마구잡이로 내지르는 아이의 주먹을 말이다.
분명 경비의 신체 능력은 뛰어났지만 어설픈 자세에서 튀어나오는 주먹엔 한계가 있었다.
저런 걸 막아내기 위해 방패를 꺼내들 필요는 없었다.
궤적을 보고 손을 움직여 그 주먹을 받아내는 걸로 족했으니까.
“돌대가리인데 주먹은 솜이네♡ 신기해라♡”
자. 좀 더 소란을 크게 일으켜주지 않을래?
너희 주인이 고개 숙이지 않고는 넘어갈 수 없을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