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의 설원은 온통 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 광활한 설원 위에는 강력한 오브젝트인 설원의 달이 떠 있었다.
세계를 아우르는 규모의 현상을 일으키는 설원의 달이 자리를 잡아버려서 그런지, 시베리아 주변에는 다른 오브젝트가 자취를 감춰버렸다.
게다가 이 지역을 돌아다니는 인간도 사라져 버렸다.
이 지역에서 발생한 이변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인간과 드론들이 모두 설원에 집어삼켜진 이후로는 그 누구도 이곳에 접근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황량한 설원에 어느 순간부터 황금 사신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새싹 사신들의 이상 행동을 유심히 본 황금 사신이 전해준 정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새싹 사신들이 내뿜는 빛을 쫓아서 도착한 곳에는 황금 사신에게 장난을 치고 도망친 회색 사신이 있었다.
회색 사신은 마치 하늘 위의 달을 바라보는 것처럼, 고개를 하늘로 향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
‘엄마다!’
‘엄마가 있어!’
원래는 잔뜩 화가 나서 복수하러 한국에서부터 이 머나먼 시베리아까지 달려왔던 황금 사신이었지만, 오랜만에 만난 엄마의 모습에 모두 반가운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엄마를 봐서 반가운 황금 사신은 다른 황금 사신들의 눈치를 살피며, 엄마가 있는 곳으로 슬금슬금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랜만에 만난 엄마의 발목을 몰래 껴안았다가, 떨어져 나오길 반복했다.
이윽고 모든 황금 사신이 그런 식으로 엄마 성분을 충분히 보충한 뒤에야, 어떤 황금 사신 하나가 커다란 눈덩이를 만들어 들고 의지를 내뿜었다.
‘눈사람!’
장난을 치고 도망간 엄마를 눈사람으로 만들어 버리자는 귀엽고도 잔혹한 생각이었다.
그러자 다른 황금 사신들도 재미있을 것 같다며 눈덩이를 굴리기 시작했고, 이내 회색 사신의 몸은 눈으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 흐르자, 회색 사신은 황금 사신이 만든 커다란 눈사람이 되어 있었다.
‘엄마가 옷을 입었어!’
‘엄마 눈사람!’
황금 사신들은 엄마가 도무지 입어주지 않는 옷을 입었다며 굉장히 즐거워했다.
황금 사신은 눈사람 회색 사신을 둘러싸고 앉아서, 헤실헤실 웃으며 엄마의 모습을 하염없이 구경하고 있었다.
***
보라색 달의 죽음으로 죽어버린 하늘.
태양도 별도 보이지 않는 불길한 하늘에 검게 물들고 부서진 보라색 달이 덩그러니 떠 있었다.
그 보라색 달의 표면은 마치 깨질 것처럼 금이 가고 조각나 있었고, 그 틈새에서는 끊임없이 진화액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그렇게 흘러나온 진화액은 폭포처럼 지면을 향해, 도시 규모의 거대한 싱크홀을 향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시선을 내려서 밑을 내려보자,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싱크홀의 끝에서 진화액이 넘실거리며 차오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귀빔이 너무 강했는지, 보라색 도시 대신 생긴 구멍은 정말 깊었다.
얼마나 깊은가 하면, 진화액이 구멍을 모두 채우려면 최소한 한 달은 걸릴 것 같은 깊이였다.
내가 이제까지 봐왔던 지구상의 어떤 폭포보다 강렬한 기세로 쏟아져 내리는 진화액의 폭포인데도 그랬다.
‘엄마!’
‘엄마!’
싱크홀을 내려다보는 내 품에는 원래 새싹 사신보다 살짝 작아진 미니 새싹 사신들이 잔뜩 안겨 있었다.
원본 새싹 사신은 할 일을 모두 마치자마자 땅속에 자기 몸을 파묻더니 조용히 잠들어버렸다.
품 안의 미니 새싹 사신들은 마치 엄마를 처음 본다는 것처럼 내 손가락이나 머리카락을 꼭 붙잡고,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해맑은 표정의 새싹 사신을 내려다보면서, 나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지금, 이 새싹 사신들을 저 싱크홀에 던지고 싶다.’
예전 황금 사신의 반응을 생각하면, 정말 재미있는 장난일 텐데!
하지만 아쉽게도 황금 사신을 제외하면 진화액 방수가 되는지 확실치 않았다.
그냥 끔찍한 냄새가 나는 액체이기만 했으면 좋았을 텐데, 왜 미니 사신을 녹이고 그러는지 원….
‘엄마, 어디 아파?’
고민이 너무 심해져서, 미간이 쭈글쭈글해진 나를 보고 새싹 사신 하나가 의지를 던져왔다.
역시 미니 새싹 사신은 내 자식이니만큼, 나와 비견될 만큼 착하네.
….
….
….
착하니까, 한 번쯤은 던져도 용서해 주지 않을까?
착한 아이들의 엄마라면 한 번쯤 할법한 고민을 하던 도중, 새싹 사신들 틈바구니에서 이상하게 생긴 미니 사신이 있는 것을 발견해 버렸다.
전체적으로 보라색을 띠는 색깔, 그리고 마치 양의 뿔처럼 머리 옆에 보라색 소라를 매달고 있는 미니 사신이었다.
보라 사신은 정신 오염을 동반한 그림자를 뒤집어쓴 채, 새싹 사신처럼 변해서 숨어있었다.
하지만 내가 눈치챈 것 같아 보이자, 위장을 풀어버리고 화려하게 점프해서 바닥 위에 멋진 포즈로 내려앉았다.
‘동생!’
‘새로운 동생!’
그러자 새싹 사신들도 눈치를 채고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
나는 ‘이름없음’ 사태에 휘말린 사람들을 구조하는 보라 사신들을 물끄러미 구경하고 있었다.
보라 사신들은 하는 짓이 이상하기도 했고, 화려하기도 해서 보는 맛이 있었다.
보라 사신이 손바닥을 위로 향하자, 그림자에 뒤덮인 거대한 바위가 그림자 속으로 잠겨 들어가더니 다른 곳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보라 사신이 양손을 무협 영화 배우처럼 화려하게 휘두르자, 공간이 마구 잘리며 장애물을 토막 쳐 버렸다.
보라 사신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배가 고파서 우는 아이에게 그림자로 마시멜로를 만들어 주었다.
나는 마치 영화를 감상하는 기분으로 작게 박수를 쳤다.
보라 사신들은 그림자를 다루는 능력을 가진 것으로 보였다.
정확히는 자신의 그림자를 퍼트려서, 그 안에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느낌이었다.
내 미니 사신 정원이랑 비슷하네.
미니 사신 능력을 비교해 보면, 보라색 달이 ‘최강’이라고 불릴만했다.
공간을 지배하는 능력이라니?
그리고 보라 사신은 능력만큼이나 특이하게 하고 다녔다.
머리를 제외한 온몸에 그림자를 두르고, 언제나 뭔가 있는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게다가 저 보라 사신들은 쉬는 시간에도 둘씩 짝을 지어서 무협 영화를 찍듯이 비무를 하곤 했다.
하지만 나는 저 비무의 숨겨진 비밀을 하나 알고 있었다.
저 비무는 사실 쉬는 게 아니라, 능력을 사용할 때 꼭 필요한 것이었다.
싱크홀 근처를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발견한 것이었다.
‘도와줘!’
갑자기 울려 퍼지는 희미한 의지.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다가가서 확인하자, 보라 사신이 커다란 돌멩이 아래에 깔려버린 상태였다.
‘저런 돌은 그냥 공간지배로 치워버리면 되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더니, 그 의지를 감지한 다른 보라 사신들이 달려와서 돌 밑에 깔린 보라 사신의 통통한 뺨을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장난스럽게 때리는 게 아니라, 진심을 담아서 퍽퍽.
그러자 돌에 깔린 보라 사신의 소라가 점점 밝게 빛나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커다란 돌을 자력으로 들어 올리고 다시 나르기 시작했다.
그 뒤에도 몇 번 발견했는데, 그저 ‘도와줘!’ 한마디만 하더니 서로 주먹으로 마구 때리곤 했다.
그래도 관찰을 거듭한 지금은 그 이유를 간신히 알아챌 수 있었다.
보라 사신의 공간지배는 ‘장작’을 사용해서 사용하는 능력이 아니었다.
그리고 보라 사신의 능력은 공간지배 말고도 하나가 더 있었다.
에너지 변환.
보라 사신들은 에너지를 흡수해서 자기 것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보라 사신 펀치를 굉장히 오랜 시간 맞아야 힘이 충전되는 걸 보면 효율이 그렇게 좋아 보이진 않았다.
게다가 그 흡수한 에너지의 휘발성마저 강해서, 저장해 두지는 못하고 매번 서로서로 투닥거리는 식으로 에너지를 보충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없으면 미니 사신식으로 투닥투닥.
사람들이 많으면 비무하는 척하면서 투닥투닥.
보라 사신은 충격적이게도, 겉멋 든 미니 사신이었다.
***
이미 흔적조차 남지 않은 도시 근처에 지치고 다친 사람들이 잔뜩 모인 임시 캠프가 있었다.
캠프 중앙에는 둥글고 거대한 마시멜로 덩어리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주변에는 마시멜로를 블록처럼 쌓아 올리고 나뭇가지로 뚫어서 고정한 마시멜로 하우스가 있었다.
이 주변에는 마시멜로가 가득했다.
푸른 소녀는 따뜻한 불 옆에서 온기를 즐기며, 품 안에 안긴 보라색 마도서를 쓰다듬었다.
‘전부 이 아이들 덕분이네.’
물론 ‘어째서 죄다 마시멜로?’라는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보라 마도서가 창조할 수 있는 물질이 마시멜로뿐인 것으로 보였다.
이 캠프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는 이 조그마한 아이들이 한 일이었다.
보라 마도서는 강력한 힘으로 바위를 자르고 옮기면서 사람들을 구했다.
그리고 새싹 마도서들은 사람들 사이를 뚜방뚜방 돌아다니면서, 먹기 좋게 잘린 마시멜로를 나눠주고 있었다.
사람들을 찢어 죽이는 ‘신을 죽인 마도서’의 등장.
이젠 사라져 버린, 보금자리였던 도시.
엄청난 숫자의 사망자.
게다가 인간에게 해로운 것으로 유명한 마도서가 과자를 나눠주며 돌아다니는 데도 캠프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아무래도 보라 마도서의 정신 오염과 귀여운 외모가 어우러진 꿈같은 한 때겠지.
캠프 군데군데서 조그맣게 울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마 이들이 사라지면, 이 사람들은 차가운 현실 속에서 다시 눈을 뜨게 될 것이다.
불 근처에서 누워서 잠들어 버린 흑백 옷의 소녀를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왠지 오늘 밤이 지나면, 사라져 버릴 것 같다고.
쿠션만 한 하얀 아귀 모양 마시멜로를 베개 삼아 바닥에 누웠다.
그리고 정신을 잃은 딱딱한 아귀의 배를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말랑말랑한 아귀가 갖고 싶어.’
언젠가 연구를 통해 만들어 내겠다고 다짐하면서 푸른 소녀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푸른 소녀가 아침 햇살에 눈을 뜨자, 싸늘하게 식은 캠프장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추위를 막는 달의 수호를 받는 느낌이었던 캠프에는 싸늘한 냉기가 스멀스멀 밀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가버렸구나.’
마시멜로 캠프파이어도.
맛있게 먹었던 마시멜로도.
바닥에 깔린 마시멜로 돗자리도.
그것을 작은 손과 발로 옮겨주던 마도서들도.
그리고 그 모든 기적을 가지고 온 흑백 옷의 소녀도 사라진 상태였다.
꿈결에 들었던 소녀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남은 것 같았다.
‘꿈은 이제 끝이야.’
‘이제 슬슬 가야 해.’
어쩌면 소녀의 말처럼 도시에서 있었던 일들이 모두 꿈처럼 느껴졌다.
“스승님. 일어나세요!”
이제는 현실에서 살아야겠지.
사람을 지키는 연금술사니까, 해야 할 일이 정말 많았다.
***
부서진 달.
그리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검은색 폭포.
그리고 추위를 피해 사람들도 모두 사라져 버린 그곳에서 검게 물든 거대한 팔이 천천히 올라오기 시작했다.
회색 사신이 말하기를 ‘이름없음’.
푸른 소녀가 말하기를 ‘신을 죽인 마도서’.
진화액에 완전히 녹아내렸던 ‘이름없음’이 비틀거리면서 다시 지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모습은 진화액에 빠져들기 전과는 뭔가 달라 보였다.
신의 이름을 지우기 위해.
신앙을 없애버리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이던 ‘신을 죽인 마도서’는 공간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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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회색 사신이 있을 멀고도 먼 저편.
지구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