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49
상대방이 호의를 비춘다면 그것은 기뻐해야 할 일이다.
허나 그게 상대방이 거주하는 곳에서 깽판을 치고 난 후라면 의심을 해봐야 한다.
호의로 보이는 저 감정의 아래에 다른 감정이 담겨 있는 게 아닌지. 가면을 쓴 채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말이다.
이전에 비슷한 일을 저지른 전과가 있고, 그 때에는 이번과 달리 반응이 과격했다면 더더욱 그렇지.
뺨을 후려쳤음에도 손을 내미는 사람이 정상일 리 없지 않은가.
“자. 우선은 차를 한 모금 하시죠. 동방에서 가지고 온 귀한 잎이랍니다.”
앞서 말을 해 둔 이유 때문에 난 싱글거리는 웃음과 함께 찻잔을 내미는 이사벨을 도저히 좋게 바라볼 수가 없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그녀가 나를 좋게 대해 줄 이유가 없었으니까. 내 안에 담겨 있는 주신의 신성이 아니라면 말이다.
으으. 이게 다 할배 때문이야. 괜한 말을 꺼내는 바람에 이사벨이 하는 오만 행동을 이상하게 해석할 수밖에 없잖아!
지금 이 차만 해도 그래! 부드럽고 은은한 향기가 방 안을 가득채운 걸 보면 분명 이 차는 좋은 물건일 텐데 이 안에 차말고 다른 게 들어갔을까봐 불안하다고!
어지간한 독이나 약물 같은 건 지금의 나에게는 통하지 않을 테지만 이사벨이라면 어지간하지 않은 걸 수중에 들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아르테아 백작님. 제가 시간이 없어서요…’
“난 광신도랑 차를 마시면서 웃고 떠들 만큼 여유로운 사람이 아니거든?”
“그렇습니까? 이것 참. 아쉽네요. 신경 써서 준비를 한 건데.”
찻잔을 옆으로 치우며 날선 태도를 보였지만 이사벨은 조금도 기분 나쁜 티를 내지 않았다. 그저 진심으로 아쉽단 표정을 지을 뿐.
역시 이상해. 뭔가 잘못됐어.
‘제가 여기에 온 이유는…’
“내가 이 기분 나쁜 저택에 온 이유는 하나야. 여기에 광신도에겐 과분한 물건이 하나 있거든.”
“역시 그 용무시군요. 예상했습니다.”
말을 내뱉기 무섭게 이사벨이 품 안을 뒤적였다.
…내가 석판을 노리고 있다는 걸 예상했다고?
어떻게?!
경매장에 물건을 사러 갔을 때는 변장을 한 상태라 누구도 알아볼 수 없었을 텐데!?
설마 내가 치욕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단 걸 알아냈단 거야?
나의 흑역사를 알고 있다고?!
“여기 당신께서 예전에 찾으시던 목걸이입니다.”
설마 하는 생각에 눈을 떨고 있었던 나지만 이사벨이 내민 것은 석판이 아니었다.
그건 목걸이였다. 적당히 화려하고 적당히 세련된. 가난한 귀족 가문에 대대로 전해진 것 같은 낡은 목걸이.
그나마 특이한 점이라면 고강한 신성이 옅게나마 느껴진다는 것일까.
[신성이 담겨 있었던 보석 목걸이]
[과거 기적이 담겨있던 목걸이입니다. 모든 힘을 잃은 지금은 평범한 목걸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감정 스킬로 살펴본 결과도 비슷했다.
과거에는 어땠을지 모르지만 지금 저 목걸이는 평범한 목걸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내 반응을 보고서 무언가 이상함을 눈치 챈 걸까. 이사벨이 의문을 표했다.
“이걸 바라신 게 아닙니까?”
‘네. 제가 원하는 건…’
“내가 바라는 건 석판이야. 너처럼 군살 가득한 아줌마한테 과분한 목걸이가 아니라.”
“석판이라면. 아 그거군요. 죄송합니다. 영애. 예전에 이 목걸이를 찾으셨던 적이 있는지라 착각을 했네요.”
과거의 루시가 이런 걸 원했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루시의 방에 머물면서 걔가 사용했던 물건을 봐왔던 나다. 그녀가 어떤 물건을 좋아하는 지 대충은 안다.
그 녀석은 자기가 공주라도 되는 것마냥 눈에 띄는 물건을 좋아해.
저런 볼품없는… 이란 생각을 하는 순간 머릿속에 제동이 걸렸다.
마치 그런 생각을 해선 안 된다는 것처럼.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릿속에 한 가지 감정이 차올랐다. 그 감정의 이름은 그리움이었다.
너무도 멀어서 흐릿해졌으나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고 있는 그리움 말이다.
…이건 내 감정이 아니야.
나는 저 목걸이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니까.
그렇다면 지금 내 마음 속에 머무르는 이 명확한 감정은 누구의 것인가.
이건 고민할 것도 없는 문제였다. 내 마음에 감정을 남길 수 있는 사람은 한 명 뿐이니까.
루시.
과거 내가 빙의하기 이전의 루시 알른.
<여아야. 무슨 일이 있느냐?>
할배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감정의 파도에 잠시 삼켜졌던 모양이다.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자그마한 일이라 할 순 없었지만 상황을 설명할 자신이 없었기에 아무것도 아니라 답을 했다.
<흐음. 그래? 그럼 되었다.>
무언가 미심쩍어 한다는 것이 분명했지만 할배는 그 이상 캐묻지 않았다. 할배가 어른스러운 사람이라서 다행이야.
속으로 길게 한숨을 내쉰 후 이사벨이 탁자 위에 내려놓은 목걸이를 보면서 머리를 굴린다.
대체 무슨 이유에서 과거의 루시가 지녔던 감정이 스쳐 지나간 건지는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것은 있다. 지금부터 해야 할 거래의 내용에 한 가지 물품이 추가되었다는 것.
난 저 목걸이를 반드시 손에 넣어야 했다.
딱히 필요한 물건은 아니었지만 마음이 그러라며 시키고 있었기에.
“그럼 이 목걸이는 되돌려 놓도록.”
목걸이를 거두어 가려는 이사벨의 팔목을 붙잡으며 그녀의 눈을 가만 바라본다.
‘아뇨…’
“아니. 생각해보니까 이 목걸이는 역시 너한테 너무 과분하더라고. 둘 다 받아가야겠어.”
“석판과 목걸이 둘 다입니까? 어느 쪽이건 가치가 상당한 물건입니다만.”
‘괜찮습니다.’
“푸핳. 날 걱정해주는 거야? 너~무 고맙지만 사양할게. 갸륵한 눈빛이 기분 나쁘니까.”
인벤토리에서 준비해 두었던 물건을 꺼냈다.
어젯 저녁. 퀘스트를 클리어함에 따라 허접 주신이 내어주었던 보상.
꼭 이사벨과 협상을 하는데 사용하라 말하는 것만 같았던 물건. 주신의 신성이 담긴 다이아몬드.
“…이건.”
평범한 보석과는 달리 따스하고 은은하며 포근한 광휘를 바라는 아름다운 녀석.
그냥 보기에도 꾸미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눈독을 들일 사치품이다만 지금 내 앞에 있는 이사벨에게는 더더욱 커다란 가치를 지닌다.
주신과 관계된 물건에 집착을 하는 이사벨이 열화 되지 않은 주신의 신성을 거부할 수 있을 리 없잖은가.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이사벨은 보석을 눈에 담은 순간 그대로 굳어버렸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예술품의 앞에 압도된 사람처럼.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신을 차린 그녀는 갈 곳 잃은 손을 벌벌 떨면서 내게 물었다.
“대체 이런. 이런 물건을 어디서 구하신 겁니까? 이러한 귀품이 나왔다면 제 귀에 닿지 않았을 리가 없는데?!”
새된 목소리로 물음을 던지는 그녀는 보석을 바라보느라 나와 시선을 마주치지도 않았다.
예의를 차려야한다는 생각을 하는 것조차 불가능할만큼 이 보석이 매혹적인 거겠지.
그 광경을 보면서 나는 확신했다. 이사벨이 결코 이 거래를 거절할 수 없으리라는 걸 말이다.
‘이 정도면 충분하죠?’
“자. 장사치 광신도. 아직도 내가 걱정이 돼? 응?”
내가 목소리를 내고 나서야 고개를 든 그녀는 입술을 우물거리며 나와 보석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이내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 내렸다.
“금방 준비해오겠습니다.”
*
아르테아 가문 저택에서 빠져나와 아카데미로 돌아가는 길.
“실로 기분 나쁜 작자였다. 두 번 다신 보고 싶지 않구나.”
여태까지 가만있던 얼빠여우가 투덜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녀의 말 자체는 옳은 말이었다. 나도 이사벨이 좀 기분 나쁘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식사를 하고 가지 않겠냐거나.
혹여 아르테아 가문의 지원을 받을 생각이 없냐거냐.
알른가문과 아르테아가문의 교역에 관해 이야기 하지 않겠냐거나.
어떤 식으로건 나와의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 하는 이사벨의 모습은 징그럽단 말이 절로 튀어나올 정도였으니.
“저런 작자야말로 조금만 엇나가면 범죄를 저지를 녀석이다. 조심하도록 하거라.”
‘이사벨이랑 똑같은 변태인 당신이 할 말인가요?!’
“얼빠여우. 아무리 생각해도 너랑 걔랑 비슷하지 않아? 아. 혹시 견제하는 거야? 같은 변태로써 질 수 없다 그거구나? 우와. 진짜 역겹네.”
근데 그 말을 얼빠여우 네가 하는 게 맞냐?
나랑 같이 있고 싶다는 이유로 스토커 마냥 따라 붙은데다가 내 옆에서 여러 변태적인 행각을 반복하는 네가 할 말이 맞냐고!
그리 따졌더니 얼빠여우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녀석과 자신을 비교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처럼.
“그 차가운 눈빛은 실로 감사하다마는 네 발언은 정정해야겠구나. 순수히 그대를 애정하는 본인과 그대가 지닌 것만을 바라보는 그 기분 나쁜 녀석은 전혀 다른 종이다.”
다르다고? 뭐가?넌 내 얼굴을 보고 넘어온 거고, 걔는 내 신성을 보고 넘어온 거잖아.
결국 근본은 같은 변태인 거 아냐?
변태의 세계도 심오하구나. 딱히 알고 싶지는 않네.
자꾸 듣고 있으면 기분만 나빠질 것 같았기에 난 얼빠여우의 이야기를 흘려들으며 이사벨에게 받은 목걸이를 꺼냈다.
도대체 이 목걸이가 뭐기에 보고 있으면 자꾸만 그리움과 슬픔이 새겨지는 것인지.
내 감정이지만 내 감정이 아니라는 근질거리는 느낌은 절로 미묘함을 선사했다.
혹여 가문의 기사인 칼이라면 이 목걸이에 대해서 알까 싶어 물어봤지만 칼도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죄송합니다. 알른 가문에 소속되고 몇 년이 되지 않은 사람인지라.”
으음. 이 목걸이에 대해서 알아보려면 베네딕에게 물어보는 수밖에 없으려나.
…일단은 인벤토리 안에 보관을 해두자. 당장은 이에 대해서 확인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으니까.
내가 마지막으로 꺼내든 것은 석판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너무도 볼품이 없어서 당장 내다버려야 할 것만 같은 석판 말이다.
<대체 이것이 무엇이기에 그 귀한 보석을 넘겨준 것이냐.>
할배는 그 석판을 보자마자 한숨 어린 목소리를 냈다.
이 석판이 지닌 진가를 모르는 그의 입장에선 신이 내린 보석을 이딴 돌덩이와 교환했다는 걸 이해하기 어렵겠지.
하지만 난 아니다.
내게는 기껏 해봐야 전투 중 신성을 채우는 용도로 밖에 써먹지 못할 그 보석 따위보다 이 석판이 훨씬 더 귀중했다.
왜냐하면.
‘이건 열쇠거든요.’
<열쇠?>
‘네. 제가 원하는 방패를 구하기 위한 열쇠.’
이건 준종결급 방패를 얻으러 가기 위한 트리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