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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5

언제였더라….

기억은 잘 안 나는데, 언젠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가리드가 그답지 않게 꽃을 사 온 적이 있었다.

우락부락한 근육질에 얼굴에 긴 흉터가 있는 남자가 꽃을 가꾸는 거야 그럴 수 있다.

외면이 험상궂다고 해서 그런 취미를 가지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

멀끔하고 선하게 생긴 사람이라고 해서 함부로 믿으면 안 되는 이유도 동일했다.

인상은 갖되, 속단은 하지 마라.

나는 겉만 보고 사람을 판단했다가 봉변을 당하면 멍청한 자신을 탓해야 하는 곳에서 살았던 터라 살아남기 위해선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나쁜 말로 하면 의심이 많다고 할 수 있겠지.

따라서, 내가 그답지 않다고 말한 것은 가리드의 겉모습을 보고 한 말이 아니었다.

내가 맨 처음 가리드의 집에 왔을 때, 난 그가 당당하게 가리킨 집이 사람이 사는 집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마당은 잡초가 무성하게 자란 것도 모자라 휙 내던진 쓰레기로 가득했고 집 안의 가구들은 동선과 안락함은 갖다 버린 채 아무렇게나 배치되어 있었다.

퀴퀴하게 풍기는 냄새와 먼지, 음식 찌꺼기가 묻은 접시의 산, 마지막으로 구석에 옹기종기 피어난 버섯까지.

내가 있는 곳이 집인지, 슬럼가의 쓰레기 더미인지.

도저히 치울 엄두가 안 나서 우리는 결국 그 집을 버리고 새 집으로 이사했다.

그 후로 집안일은 내가 도맡아서 했고.

그렇기 때문에 가리드가 꽃을 사 왔을 때 나는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미쳤어?’

기초적인 정리도 안 하는 사람이 꽃을, 그것도 마당에서 키우겠답시고 가져왔으니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난 안 건드릴 거니까 알아서 해.’

‘하이고 매정해라. 애초에 너한테 부탁할 생각도 없었다 인마.’

‘갑자기 웬 꽃이야?’

‘그냥, 키워서 나쁠 건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후로 가리드는 정원이 된 마당을 제법 열심히 가꿨다.

돌보는 걸 까먹어서 금방 죽이거나 흥미가 떨어질 줄 알았는데, 꾸준히 꽃을 사다가 심고 세심하게 살피는 게 상당히 의외였다.

어느 날, 화사해진 정원 앞에 나를 앉힌 가리드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예쁘지 않냐?’

‘…예쁘긴 하네.’

‘하하하! 봐, 하면 잘할 수 있다고 했잖아. 어때. 너도 정원을 가꾸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냐? 꽃도 심고, 나무도 심고, 응? 그렇지?’

‘딱히.’

‘…하여간 무뚝뚝하기는.’

어째 여자애가 자기보다 꽃을 싫어하냐며 가리드가 투덜대던 것이 기억난다.

가리드가 왜 그런 일을 했는지 수년이 흐른 지금도 알지 못했고, 아마 영원히 알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유를 알아내려고 하는 대신 그의 무덤 앞에 꽃을 심었다.

이 꽃들로 부디, 평안을 얻길 바라면서.

“….”

보고 싶지 않았던 얼굴도 보고 제국 놈들도 봐서 그런지 오늘따라 감성에 젖게 되네.

희미하게 남은 마나의 잔류마저 털어내며 몸을 돌렸다.

내 말을 알아들은 걸까.

뒤에 선 셋이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심지어 남 눈치 따윈 안 볼 것 같던 대검 삐약이조차도 슬슬 눈치를 살피고 있는 게 퍽 웃겼다.

“아, 그….”

그나마 나와 친분이 조금 있다고 할 수 있는 저니가 우물쭈물 말하려 했지만, 그보다 내가 손을 내미는 게 빨랐다.

“…에?”

“밥 줘.”

오랜만에 힘썼더니 배고파.

* * *

내가 전생에 살았던 나라, 한국에는 유독 밥에 관련된 말이 많았다.

금강산도 식후경,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곱다,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 등등.

그런 것들을 보면 옛 조상님들이 얼마나 밥을 중요시했는지 알 수 있었다.

내가 다시 태어난 이 세상은 한국보다 덜하긴 했지만 식사의 중요성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게 의미가 없을 정도로 가난한 사람이 많아서 문제일 뿐.

그러니까, 내가 이러고 있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행동이다 이 말이야.

뚜웅.

“저, 저기… 카, 카나? 내일은 꼭 챙겨올 테니까 화 풀어. 응? 파인 님, 유키 님. 혹시 남는 음식 없어요?”

“접속하자마자 싸우러 왔는데 있을 리가요. 돌빵이나 보존식은 있긴 한데….”

“육포는 있어요.”

“그건 안 먹을 거 같은데. …카나, 이거 먹을래?”

“….”

…먹겠냐고.

내 앞으로 내밀어진 육포를 뚱하게 바라보고 있으니 저니가 머쓱하게 손을 거뒀다.

육포는 기사였던 시절에 실컷 먹어서 이젠 꼴도 보기 싫어.

그때도 가능하면 식사를 챙겨 먹으려고 했지만 시간이 촉박하거나 숨어야 하는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이 육포 같은 보존식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육포를 질겅질겅 씹는 대검 삐약이를 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저니의 잘못이 아니란 건 나도 알아.

애초에 보답을 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멋대로 가져오던 거였으니 언제 그만둬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도 알았고.

근데 그게 하필 지금일 줄이야.

준비한 게 없다는 저니의 말을 듣자 어깨가 축 늘어졌다.

그녀가 가져오는 음식이 맛있어서 기대한 건 아니다.

맛이 없었다는 뜻은 아니고, 그보다 맛있는 걸 많이 먹어 봐서 감흥이 안 든다고 해야 하나.

안팎으로 멸시당했다고 해도 명색이 기사단장인지라 왕족들이나 귀족들과 식사 자리를 갖는 일이 많았거든.

왕족이나 귀족이나, 백성들이 뭘 먹든 제 입만 채우면 그만인 놈들이라서 놈들의 식탁에 올라오는 요리들은 맛이며 차림새며 무엇 하나 부족한 게 없었다.

저니가 가져온 음식이 맛있다고 한들 그다지 감흥이 들지 않은 건 그런 이유였다.

하지만 그녀가 어제 가져온 음식은 달랐다.

솔직히 맛은 내 취향이 아니었지만, 요리사의 뺨을 때리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드는 정신 나간 매운맛에서 왠지 모르게 전생의 향수가 느껴져서.

향수를 느끼게 하는 다른 음식을 또 가져와 주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고 있었는데….

‘어쩔 수 없지….’

자리에서 일어나 터덜터덜 오두막으로 걸어간 나는 커다란 냄비와 남은 식재료를 적당히 챙겨 공터로 돌아왔다.

귀찮긴 하지만 육포를 먹고 싶진 않으니 간단하게 스튜라도 끓여서 먹어야지.

대충 재료를 넣고 볶은 뒤 물을 넣고 한동안 졸이면….

그냥저냥 먹을 만한 스튜, 완성이다.

후룩.

냠냠.

“으음….”

코카트리스 고기가 남아 있어서 다행이네.

자칫했으면 밋밋했을 수도 있던 스튜에 고기의 고소한 맛이 녹아드니 그냥저냥 먹을 만한 스튜에서 괜찮은 스튜가 되었다.

재료가 더 있고 시간도 더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따로 챙겨온 여분의 그릇을 세 병아리에게 나눠주었다.

“…어, 우리한테도 주는 거야?”

“살다 살다 묘지기가 만든 음식을 먹게 될 줄은 몰랐는데….”

초대하지 않았다고 해도 일단은 집에 찾아왔으니 먹을 건 줘야지.

그동안 받아먹은 것도 있고.

무엇보다 셋을 내버려두고 혼자서 먹으면 내게 오는 시선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생각보다 맛있는데요?”

“그러게요. 대충대충 썰어 넣길래 큰 기대 안 했는데. 간단하게 먹기 딱 좋네요.”

“후루룩.”

뭐라고 떠들면서도 잘 먹고 있으니 입맛에 맞는 거겠지.

다행히 가리드를 먹여 살리며 갈고닦은 내 요리 실력은 아직 녹슬지 않았나 봐.

그들에게서 신경을 끄고 식사를 이어 나갔다.

넷 중에서 식사를 제일 먼저 마친 건 나였다.

먼저 먹기 시작한 것도 있고, 먹는 양도 적었던 터라 텅 빈 그릇과 숟가락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절벽 끝에 걸터앉은 채로 머리 위를 지나는 태양을 멍하니 바라봤다.

“떠나야 할까….”

제국이 쳐들어올까 걱정하는 건 아니다.

뱀 새끼가 하는 말을 들어보니 얌전히 있는 나를 들쑤시고 싶지 않은 눈치였으니까 아마 한동안은 잠잠할 것이다.

기사단을 몰살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다른 놈들이 올 수야 있긴 한데, 뱀 새끼나 제국의 검들이 직접 행차하는 게 아닌 이상 내가 질 리 없고.

다만 가리드를 혼자 두고 떠난다는 게 여전히 마음에 강하게 걸렸다.

나에게 있어 가리드는 친부보다 더 친부 같은, 아버지라고 불러도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기도 했지만 뿌리 없이 흔들리는 나를 잡아준 사람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가리드를 잃고 그가 지키던 의지까지 잃은 나는 나무에서 떨어진 나뭇잎처럼 세상으로부터 나풀나풀 떨어졌다.

그가 묻힌 이곳에서 나 또한 생을 마감하리라.

그렇게 다짐한 주제에, 떠난다고 생각하니 죄책감이 나를 쿡쿡 찔렀다.

차원수든, 제국이든, 사도든, 에델이든 그것들이 가리드보다 중요한가?

…단연코 그건 아니었지만 계속 고민이 되는 건 왜일까.

털썩.

그때 누군가가 다가왔다.

저니는 까마득한 절벽이 무서운지 벌벌 떨면서도 기어코 내 옆에 나란히 앉아 다리를 저 먼 허공에 뻗었다.

쓰담쓰담.

그러더니, 이번엔 손을 들어 내 머리를 쓰다듬더라.

“…???”

기척은 느끼고 있었지만 설마 머리를 쓰다듬을 줄은 몰라서.

난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굳어버렸다.

…뭐지?

* * *

저니는 스튜를 먹으면서도 카나를 힐끔힐끔 보았다.

눈 한 번 깜박일 때마다, 작은 입이 오물거릴 때마다 저니는 속으로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저 귀여운 아이가 그토록 강하던 기사들을 일순간에 죽였다는 게 여전히 믿기지 않아서 의심 어린 눈길을 보냈다.

생긴 거는 인형을 꼭 끌어안은 채 꽃과 장난치며 살 것 같은 소녀인데….

당장 팔만 봐도 그녀보다 얇지 않은가.

이러니 아직도 그 무시무시한 묘지기가 이런 소녀라는 것을 못 믿는 사람이 많지.

카나 한 번 보고 스튜 한 번 먹고, 다시 카나 한 번 보고 스튜 한 번 먹고.

자린고비처럼 먹다 보니 다 먹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어서 결국 카나가 먼저 그릇을 비우고 일어났다.

묘지가 있는 절벽 끝에 앉아 있는 카나.

카나는 아무렇지 않게 앉아 있었지만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위태위태한 모습에 지켜보는 저니가 더 조마조마했다.

불안한 눈으로 지켜보던 저니가 문득 파인에게 물었다.

“파인 님은 퍼클런 계속하실 거예요?”

“…못하죠.”

파인은 딱 잘라 부정했다.

“민심도 민심이고, 카나…를 쓰러트리는 그림이 도저히 안 그려지네요.”

“난 또 싸우고 싶은데. 마지막 그건, 정말, 다시 생각해도 너무 황홀했어….”

“…그래.”

이젠 타박하기도 귀찮아진 파인이 대충 대꾸했다.

“저는 레벨이나 올리면서 다음 레이드 발견되는 거 기다릴 생각이에요. 저니 님은 어떻게 하실 거예요?”

“글쎄요….”

앞길을 명확하게 정해놓은 파인과 다르게 저니는 앞으로 뭘 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당초 계획은 카나와 친해지고 싶다는 것이었지만, 일이 이렇게 되니 그래도 되는 걸까 회의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원하든 원치 않았든 플레이어들이 싸우고 제국이 끼어든 전쟁의 시발점은 그녀의 방송 때문이었으니까.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선 방송을 꺼야 할 텐데… 본업을 내팽개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별칭에 이어 본명까지 알려줄 정도니 가까워진 것 같긴 한데 당초에 목표했던 만큼 친해졌냐 하면 그건 또 아닌 것 같고.

저니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그릇이 빈 걸 눈치챘다.

그녀는 그릇을 얌전히 내려놓고 절벽으로 향했다.

“높다….”

슬쩍 내려다본 풍경이 까마득해서 저니는 진저리를 치며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겼다.

멀리서 봤을 때 쪼그마하던 등은 가까이서 봐도 여전히 작았다.

이 작은 등에 무슨 사연을 짊어지고 있길래 그렇게 아픈 목소리를 냈는지.

카나를 내려다보던 저니는 순간적으로 이는 호기심에 무심코 정보 확인 버튼을 눌렀다.

오브젝트는 물론이고, NPC와 플레이어 모두에게 쓸 수 있는 기능이었지만 대부분은 플레이어의 아이디를 확인할 때만 쓰는 기능이었다.

오브젝트나 NPC는 알고 있는 정보를 토대로 나오는 반면, 플레이어에 대한 정보는 정확하게 출력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A라는 NPC가 자기 이름을 B라고 속였다면 B라고 표기되고, 아무 효과도 없는 맹물을 만병통치약으로 알고 샀다면 만병통치약으로 표기되는 식이었다.

그래서 반쯤 계륵이나 다름없는 기능이었지만….

왜 갑자기 그런 호기심이 일었는지는 저니 자신도 알지 못했다.

[작은 새, 카나리아 그라시스]

카나가 소개한 그대로 나온 이름과 그 앞에 붙은 ‘작은 새’라는 칭호.

간혹 이렇게 NPC에게 칭호가 붙는 경우가 있다.

저니가 지금껏 실리아 온라인을 하며 봤던 그 누구보다 강한 카나였지만, 그녀는 그 칭호가 카나에게 무척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저니의 시선으로 본 카나는 눈 한 번 감았다 뜨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 같았기 때문에….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카나의 옆에 앉은 저니는 손을 들어 작은 새를 쓰다듬었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날개를 접고 내려앉은 새가 다시 날아갈 수 있기를.

저니는 예상치 못한 스킨쉽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는 카나를 바라보며 살포시 웃었다.

‘…설마 기분 나쁘다고 죽이는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늦어도 한참은 늦은 걱정을 하면서도 그녀는 손가락에 감기는 감촉을 마음껏 만끽했다.

예상했던 대로, 카나의 머리카락은 무척 부드러웠다.


           


I Became a Raid Boss

I Became a Raid Boss

레이드 보스가 되었다
Score 8
Status: Ongoing Type: Author: Released: 2024 Native Language: Korean
One day, when I came to my senses, I found myself reincarnated in another world. After enduring a rough life post-reincarnation, I thought I could finally settle down, quietly tending to a flower garden in the mountains… …But something feels o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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