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5
진지하게 내 미래에 대한 걱정을 하고 있을 무렵에 주변의 풍경이 바뀌었다.
이번에는 저택의 복도였다.
루시의 주변에는 각자의 일을 하고 있는 시녀들이 서 있었다.
“루시 아가씨는 성격이 너무 험악하지 않아요?”
“맞아요. 도저히 귀족 가문의 여식이라고 믿을 수가 없다니까요.”
“천한 것의 피가 흘러서 그런거겠죠.”
“하긴 지 어미부터가 길바닥에 나뒹굴던 사람인데 자식이라고 다르겠어요?”
그들이 수근덕거리는 소리가 마치 내 옆에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생생하게 들린다.
뭐야. 루시는 귀족 사이에서 낳은 딸이 아니었던 거야?
그럼 보통 루시는 서자 취급받고 가문을 이을 자식을 따로 낳는 게 보통 아닌가.
내가 아는 판타지 속 귀족 가문은 그런 식으로 했던 것 같은데.
내가 의아함을 느끼는 동안에 주변의 풍경이 바뀐다.
이번에 펼쳐진 풍경은 내가 평소에도 자주 마주했던 풍경이었다.
베네딕이 항시 머무르는 집무실의 문 앞.
내가 따로 민 것도 아니거늘 문이 절로 밀려나며 집무실 안의 풍경을 드러냈다.
그 안의 풍경은 너무도 삭막했다.
언제나 넘쳐나는 서류들도.
방 한켠을 가득 채운 서재도.
가운데에 앉아있는 베네딕도 모두 그대로인데.
항상 알 수 없는 따스함을 품었던 집무실에서 냉기가 느껴졌다.
“루시.”
애정이 담겨 있던 베네딕의 목소리가 이상할 정도로 가벼웠다.
그게 이상해서 고개를 든 순간 나는 나를 향하는 증오어린 시선을 볼 수 있었다.
“나는 네가 밉다.”
대뜸 베네딕이 절대로 하지 않을 것 같은 말이 베네딕의 입에서 나왔다.
그 딸바보가 이런 말을 할 리가 없다.
그 놈은 설령 자신이 루시의 칼끝에 죽는 그 순간까지도 사랑한다는 말을 외칠 바보니까.
잘은 모르겠지만 이 악몽의 모든 것이 현실에서 일어난 일은 아닌 건 분명했다.
그렇다면 방금 전에 사교장에서 대놓고 욕을 먹은 거라거나,
시녀들의 뒷담화를 들은 것도 어디까지나 악몽의 일부일 가능성이 있나?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분명 비슷한 일이 있기는 했을 거야.
루시가 저지른 일이나 루시의 평판을 생각해보면 뒷담화가 나오는 건 당연하잖아.
그렇지만 내가 보았던 풍경보다는 온건하지 않았을까.
적어도 루시한테 안 들리게 하려는 노력정도는 했을 거야.
그래야 해. 그 풍경이 모두 다 진실이었다면 내 미래가 너무 암울하니까.
“너는 형편없는 아이다. 할 줄 아는 거라고는 남을 괴롭히는 것밖에 없지.”
베네딕의 차디찬 목소리가 나를 현실로 끌어 올렸다.
“운동도. 공부도. 예법도. 마법도. 너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그야말로 알른 가문의 수치다.”
팩트로 내리꽂는 방법을 아시네.
제가 빙의하기 전에 루시한테 저런 말을 해주었으면 좋아서 죽었을 텐데.
안타깝게도 저는 루시지만 루시가 아니라서요.
당신이 무슨 말을 한다 해도 딱히 상처가 되지 않거든요?
내가 무덤덤한 표정으로 가만히 서있으려니 베네딕이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나의 앞에 섰다.
거대한 베네딕의 덩치에 내 얼굴에 그림자가 진다.
“너 따위를 위해 희생한 네 어미가 불쌍하지도 않더냐.”
그 말과 함께 주변에 늘어져 있던 서류가 휘날리며 내 시야를 가렸다.
그러다 모든 서류들이 눈 녹듯 사라져 버렸을 무렵 나는 다른 곳에 서 있었다.
이번에 펼쳐진 풍경은 알른 가 저택의 침실 중 하나였다.
“루시.”
침대 옆에 서 있던 나는 여성의 목소리를 듣고서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그 곳에는 면사를 쓴 여성 한 명이 몸을 뉘이고 있었다.
건강이 좋지 않은 듯 가쁜 숨을 내쉬던 여성은 내 얼굴을 보고 기어 들어갈 듯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루시. 난 너를 낳은 걸 후회한다.”
이 사람이 루시의 어머니인가?
그래도 이 분은 정상적인 말투를 사용하네.
루시의 메스가키 어투는 유전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런 건 아닌가 보네.
그럼 루시는 대체 어떻게 메스가키가 된 거야?
그냥 태어나기를 그렇게 태어난 건가?
응애 대신 허접이라며 우는 아기를 상상해 보았다.
끔찍했다.
진짜 그런 아기가 있다면 엑소시스트를 불러서 제령을 해봐야 하지 않을까.
“너를 품에 안은 순간부터 나는 단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었어. 너만 없었다면, 네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었을 거야.”
루시의 어머니는 중간중간에 기침을 하느라 말을 끊어가면서도 꾸역꾸역 원망의 말을 내뱉었다.
그 비난과 원망은 나를 향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계속해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꾸역꾸역 닦아내던 나는 한 가지 가정을 떠올렸다.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지만 이 악몽은 단순히 루시가 가장 두려워하는 풍경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루시는.
자신을 낳아 준 어머니에게 부정당하는 게 두려웠던 것이다.
자신을 사랑해주는 베네딕에게 미움을 받는 게 무서웠던 것이다.
자신의 주변 사람들에게 비난을 당하는 게 실은 공포스러웠던 것이다.
다른 귀족들에게 모욕을 당하면서도 속으로는 눈물을 흘리고 있던 것이다.
재미없는 이야기였다.
오만방자하고 건방진 메스가키가 제일 두려워했던 것이 남들이 자신을 비난하는 풍경이었다니.
너무 흔하고 뻔한 반전이지 않은가.
그거잖아.
이 아이도 다른 환경에서 자라났다면 이렇게 나쁜 사람으로 자라났을까요?
뭐. 그럴 수도 있었겠지.
가능성은 아주 낮았겠지만 루시가 개과천선해서 착한 사람이 될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와서는 무의미한 이야기였다.
내가 그녀의 몸을 빼앗아버린 지금은 말이다.
“루시. 난 너를 원망한단다. 너는 내 인생의 악몽이었어.”
내 손을 붙잡는 마르고 얇은 손을 본다.
그 위로 떨어지는 눈물을 본다.
본의는 아니더라도 내가 루시의 자리를 빼앗은 건 사실이다.
그러니 지금은 내가 루시의 역할을 대신해야겠지.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서라도 말이야.
루시의 어머니가 진정으로 루시를 미워했을까?
아닐거야.
그랬다면 루시의 악몽에 그녀가 나타나지 않았을 테니까.
베네딕의 딸바보 성향을 생각해보면 이 사람도 더하면 더했지 부족한 사람일 리는 없다.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잖아.
루시의 어머니는 죽어가는 그 순간까지도 딸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이었겠지.
진짜 루시의 어머니가 어땠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그렇게 믿고 싶다.
어머니가 있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내가 상상하는 어머니란 그런 존재니까.
자. 그럼 루시의 어머니가 베네딕 수준의 딸바보였다고 치고 그녀가 했던 말을 상상해보자.
자신이 죽고 나서 남겨질 딸을 걱정하는 말을 했다 치자고.
그럼 루시는 어떻게 대답을 했을까?
그를 상상하다가 한 가지 의문점이 떠올랐다.
그 때도 루시는 메스가키였을까?
이건 좀 중요한 문제네.
루시가 날 때부터 메스가키였다면 이런 상황에서도 바보 어머님이니 뭐니 했을 거 아냐.
왠지 그랬을 것 같단 느낌이 들지만 이번엔 멀쩡했다고 치자.
병약해진 어머니한테 바보니 허접이니 약해 빠졌어 같은 말을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거든.
유교국가인 대한민국에서 나고 자란 청년인 나로서는 그 풍경을 허락할 수 없어!
정작 나는 나를 낳아준 부모와 대화조차 해 본 적도 없지만 그래도 상상은 많이 해봤다.
원래 이런 건 없는 사람이 잘 아는 거잖아.
로맨스 소설도 연애를 안 해 본 사람이 쓴 게 재밌는 것처럼 부모를 향한 낯부끄러운 말도 부모가 없는 사람이 생각한 게 멋지지 않을까.
“낳아주셔서 감사해요. 저도 언제나 사랑해요. 어머님.”
어라? 왜 필터가 작동을 안하는 거야?
대답을 끝마치자마자 시야가 암전되더니 다시 신전으로 돌아왔다.
나의 앞에는 영롱하게 빛을 내는 메이스 하나가 놓여 있었다.
“놀랍군. 인내의 시련 속에서도 아무런 미동 없이 최선의 답을 내다니.”
‘…저 시험 통과한 거 맞죠?’
“…할배. 시험을 통과했는지 아닌 지나 말해.”
“그래. 그대는 내가 준비한 시련을 훌륭하게 통과했다. 그대는 나의 메이스를 지닐 자격을 얻었고, 동시에 내가 과거 지녔던 축복인 아르마디의 자비를 잇게 될 것이다. 이는…”
‘그럼 돌아가는 문이나 열어줘요.’
“시끄럽고 문이나 열어. 뒈질 것 같으니까.”
나는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면서 할배에게 따지듯이 말했다.
지금 쓰러지기 일보직전이거든?
쓰러져도 누군가 주워갈 수 있도록 바깥에서 쓰러져야 하니까 문 열어.
어차피 할배 당신이 주는 메이스랑 스킬에 관해서는 다 알고 있어.
어쩌면 당신보다도 잘 알 거야.
그러니까 쓸데가리없는 설명을 하지 말고 문이나 열어.
할배는 내 짜증을 받더니 헛웃음을 흘렸다.
“알겠다. 건방진 여아야. 메이스를 집어보거라.”
그가 시키는 대로 메이스를 집어 든 순간 메이스가 내 몸에 맞추어 크기를 바꿨다.
역시 종결 바로 직전 아이템이야. 이런 기능도 있구나.
“후일 다시 만날 일이 있을 것이다.”
예? 누가요? 제가 당신이랑요?
뭔 소리를 하는.
“아가씨?”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석상의 앞에 서 있었다.
낡고 초라한 루엘의 석상 앞에.
“아가씨.”
칼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는 의아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석상에 볼일이 있으셨던 거 아니셨습니까?”
‘칼.’
“야. 허접. 나 이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어?”
“예? 들어가다뇨?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아무것도 몰라?
왜?
내가 무슨 환상을 보기라도 한 거야?
그러고 보면 몸이 멀쩡하네.
방금 전까지는 진짜 안 아픈 곳이 없었는데.
정신도 희미해졌다 돌아오기를 반복하고 있어서 얼마 안 가 쓰러지겠다고 확신했다고.
그런데 왜 몸상태가 괜찮은 거지?
무슨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싶어 뺨을 전력을 다해 꼬집어보았다.
“아야!”
더럽게 아팠다.
꿈은 아냐.
그럼 이건 도대체?
진지하게 내가 미친 거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무렵 손에 들린 메이스의 무게가 평소와 다름을 눈치 챘다.
분명히 달랐다.
요 이주간 달고 다니다시피 했던 메이스의 무게를 내가 어찌 착각하겠는가.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내 손에 들린 메이스의 모양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었다.
하얀 색의 손잡이와 미스릴로 되어 영롱히 빛나는 몸통.
묵직하고도 날카로워서 내리 찍으면 모든 걸 분쇄할 것 같은 머리 부분.
그리고 머리 위에 새겨진 주신 교회의 문양.
이건 루엘의 둔기잖아.
조심스럽게 둔기의 머리 부분을 만져보니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느껴졌다.
“어라? 아가씨 그 둔기는?”
‘칼. 저 이미 시련을 겪고 왔나 봐요.’
“허접. 나 시련을 이미 겪은 것 같은데.”
*
그 뒤 최하층에서 위로 올라오니 던전의 벽을 분쇄하면서 내달리던 포셀과 만날 수 있었다.
에반스의 던전이 아무리 중수규모의 던전이라지만 저런 식으로 직선 돌파가 가능하다니.
게임 속에서는 시스템적으로 막혀 있는 일이었는데 현실이 되니 저런 기행이 가능하구나.
포셀은 나를 보자마자 흙이 잔뜩 묻은 얼굴을 들이밀면서 괜찮냐고 물었다.
그 험악한 얼굴이 상당히 부담스러웠지만 나는 최대한 웃어보이려 노력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제가 부주의 했습니다!”
‘괜찮아요.’
“바보 포셀. 부담스러우니까 작작하지?”
“아닙니다! 이 모든 게 저의 불찰입니다. 하마터면!…”
포셀은 함정을 밟은 나를 다그치기는커녕 몇 번이고 고개를 숙이며 내게 사과를 건넸다.
만일 내게 무슨 일이 있었다면 자결이라도 했을 것 같은 기세였다.
내가 일부러 함정을 밟았다는 사실은 무조건 숨겨야겠다.
그랬다가는 정말로 포셀한테 한 대 맞을 것 같으니까.
분명 포셀이 내가 만났던 미노타우르스보다 강할 거란 말이지.
미노타우르스한테 얻어맞고서 그 꼴이 났는데 포셀한테 얻어맞았다가 어떤 꼴이 될 지는 뻔했다.
‘괜찮아요. 저는 신경 쓰지 않아요.’
“바보 포셀. 이번만큼은 네 허접한 잘못을 용서해줄게.”
“너무도 감사합니다! 아가씨! 실로 관대하십니다!”
대체 내 어디가 관대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넘어갈 수 있다면 다 좋은 거 아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