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달이 떠 있던 설원과 달리 온기를 두른 태양 빛이 내리쬐는 세희 연구소 안뜰.
나는 햇살 아래서 푹신한 마시멜로 위에 누워있었다.
그리고 내 위에는 수많은 황금 사신이 잔뜩 달라붙어서 즐거운 표정으로 뒹굴뒹굴하고 있었다.
사실 꿈에서 깨어난 뒤, 황금 사신들을 만났을 때는 굉장히 깜짝 놀랐었다.
황금 사신은 인간이 없는 곳에는 돌아다니질 않으니까, 절대로 안 들킬 거로 생각했는데!
꿈을 감지하고 따라온 새싹 사신이 밀고를 한 건가 싶었는데, 새싹 사신들은 자기들은 아니라고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사실, 이번 꿈속에서 상당히 신경 쓰이는 일이 있어서 바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렇게 나는 눈사람 속에서 얌전히 체포되어서, 세희 연구소로 연행되었다.
황금 사신들은 내가 바로 도망쳐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순순히 따라가는 나를 신기한 눈초리로 보고 있었다.
그렇게 집요하게 나를 쫓아온 황금 사신들이 나에게 요구한 것은 내 생각과는 조금 달랐다.
세희 연구소 안뜰에서 황금 사신들과 같이 누워, 계속 뒹굴뒹굴하며 과자 먹기!
그러고 보면 황금 사신들은 내 몸에 달라붙는 걸 좋아했었지.
최근 내가 달라붙어 오는 황금 사신들이 귀찮다고 몸에서 떼어낸 뒤, 집어던져서 이런 소원을 빈 건가?
사실 화가 난 황금 사신들이 벌칙으로 ‘진화액 1리터 마시기’ 이런 걸 시킬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무르네.
나는 나중에 황금 사신이 나에게 잘못하면 먹이려고, 관악구 땅속에 진화액을 몰래 숨겨뒀는데.
히히.
황금 사신은 식감이 독특한 길쭉한 과자를 아삭거리며 먹더니, 생각보다 맛있는지 나를 향해 내밀었다.
‘엄마!’
황금 사신은 내가 과자를 입으로 물고 오독거리며 먹어 치우자,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헤실헤실 웃었다.
‘!’
그러자 달라붙어 있던 다른 황금 사신들도 각자 맛있다고 생각하는 과자들을 들고 내 입속으로 들이밀기 시작했다.
인간이었다면 배가 찢어져 죽을 것 같은 고문의 현장이었다.
그리고 이 잔혹해 보이는 고문이 벌어지고 있는 세희 연구소 안뜰에는 나 말고도 고통받는 자들이 또 있었다.
마치 새싹 사신처럼 화단에 파묻힌 주황 사신 4마리였다.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길래, 같은 미니 사신을 저렇게 파묻어 버린 걸까?
특히 주황 사신들은 모래나 진흙 같은 게 묻는 걸 엄청나게 싫어할 텐데….
그래서 그런지 언제나 평온해 보였던 주황 사신들의 표정은 잔뜩 구겨져 있었다.
붉은 사신은 그 옆에서 흙을 잔뜩 묻히며 흙 놀이를 하고 있었다.
양손 가득 진흙을 집어서 주황 사신의 솜털에 치덕치덕 바르면서 모래성을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사지가 결박된 채, 복부에 양초 심지가 박혀 촛불이 되어버린 하얀 아귀가 울고 있었다.
뀨힝힝.
주황 사신이랑 같이 묶여있는 걸 보니, 하얀 아귀랑 주황 사신이 팀을 맺고 반란 같은 걸 일으켰나 보네.
이상하게 볼거리가 많이 생긴 안뜰을 구경하다 보니 점심시간이 다가왔는지, 예린이가 손을 흔들며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사신이다!”
오랜만에 본 예린이는 언제나처럼 웃으면서 나를 반겨주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예린이의 목을 뚫어져라 쳐다보기 시작했다.
사실, 순순히 잡혀 온 이유는 하나였다.
어차피 예린이를 확인하러 세희 연구소에 돌아가야 했으니까.
사실 처음에는 그저 꿈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지만, 조금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보라 사신’이 나온 타이밍과 숫자가 조금 마음에 걸렸다.
보라 사신이 나타난 순간은 한 시간을 버티고, ‘이름없음’을 물리치자마자.
그리고 나타난 숫자도 하나가 아니라 여럿.
그래서 보라 달을 파괴해서 나타났다고 생각하기엔 조금 이상했다.
오히려 인간으로 둔갑한 소라게를 여럿 해치우고 나타났다고 하는 편이 자연스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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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정말로 그렇다면 꿈속에서 파괴한 소라게들이 진짜가 되어버려.
‘그럼 설마, 이세계 미니 예린이도?’
이런 생각에 도달해 버린 것이다.
‘!’
그리고 나는 발견해 버렸다.
예린이의 목을 완벽한 원형으로 감싸듯이, 빙글 둘러싸고 있는 보라색 선.
오브젝트로 인한 상처라서 그런지, 흉터라기엔 볼펜으로 그린 것처럼 너무 깔끔했지만.
분명히 흉터가 자리 잡고 있었다.
‘안 돼! 내 예린이가!’
괜히 나 때문에 다친 것 같아서 마음이 너무 아팠다.
***
세희 연구소에 출근할 때부터 예린은 이상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사신이들이 이상해.’
그것은 세희 연구소 입구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세희 연구소 정문에 딱따구리의 집처럼 조그마하게 만들어진 황금 사신 경비실.
그곳에서 튀어나온 황금 사신이 굉장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예린의 목을 토닥이는 것이 시작이었다.
그 뒤로 만나는 미니 사신마다 예린의 목을 보고 깜짝 놀라고, 걱정하는 기색을 풍겼다.
예린은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가지고 있던 상처라서,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원래 미니 사신들은 별로 신경 쓰지도 않았었는데, 갑자기 이러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언제나 무심한 회색 사신마저 예린을 보고 경악을 해버리자, 예린도 갑자기 찜찜해져서 거울로 자신의 오래된 흉터를 살펴보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상한 점은 어디에도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 걸까?’
***
끝없이 쏟아지는 진화액의 폭포 아래, 푸른 소녀와 그녀의 스승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들은 근처 도시로 살아남은 사람들을 안전하게 인도한 뒤, 다시 돌아와서 싱크홀에 주변을 돌아보고 있었다.
“너무 규모가 거대해서 뭔가 대비를 해둘 수도 없군.”
스승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진화액의 폭포를 올려다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만약 이 사태를 해결하지 못하면, 대략 30년 뒤에는 모든 인류가 산맥 위로 올라가서 살아야 할 것 같아요.”
푸른 소녀는 ‘정말 큰 일이네요.’라고, 작게 덧붙이며 수식이 빼곡히 적힌 수첩을 닫았다.
그리고 푸른 소녀는 슬쩍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그때쯤이면 무한히 성장하는 마도서이자 연금술사인 제가 저 상황을 해결할 경지에 도달해 있겠죠?”
푸른 소녀의 장난이 섞인 그 말에, 스승도 살짝 웃으며 말했다.
“그래, 믿는다. ‘최후의 연금술사.'”
그리고 스승은 다시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나는 이제부터 왕국 수도로 가서, 진화액 문제를 고발하러 갈 거다. 너는 해야 할 일을 해라.”
“네. 그럴게요.”
푸른 소녀도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이 사태는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었다.
인류를 수호하던 달의 소실과 도시의 붕괴.
진화액에 오염된 채, 죽지 않았던 마도서.
그리고 정말 진화액이 인간에게 이로운 것인가?
하지만 푸른 소녀가 생각하기에, 스승이 하는 말은 통하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이미 연금술 길드는 ‘그 남자’의 사유물처럼 되어버렸으니까.
푸른 소녀는 스승과 헤어져서 설원을 하염없이 걸었다,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끝없는 백색.
그리고 푸른 소녀는 그곳에서 덩그러니 떨어져 있는 소라게를 발견했다.
‘보라색 달이 저런 꼴이 되었어도, 하수인은 남았구나.’
분명 이 소라게가 미래에 뭔가 중요한 일을 할 것이라는 미약한 예감을 안고서, 소라게를 품에 안고 한층 커다래진 하얀 아귀와 함께 길을 나섰다.
***
어느새 아름다운 별빛이 내리쬐는 세희 연구소 안뜰.
나는 아직도 안뜰에 누워있었다.
아무래도 황금 사신은 나를 침대로 되돌려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3일 동안 계속 안뜰에 누워서 달라붙어 있는 건 좀 너무하네.
그리고 내 옆에는 복부에 촛불 심지가 박힌 하얀 아귀가 울고 있었다.
뀨힝힝.
촛불처럼 변한 하얀 아귀는 3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세희 연구소의 안뜰을 밝혀주고 있었다.
겨우 소원이 ‘같이 누워서 놀자’인 데다가, 헤실헤실 웃고 있어서 별로 화가 안 난 줄 알았는데….
사실 상당히 화가 났었던 걸까?
대충 분위기를 보아하니, 황금 사신들은 일주일 이상 여기서 누워서 쉴 기세였다.
아무리 그래도 편한 격리실을 내버려 두고, 여기서 계속 누워있을 수는 없었다.
‘!’
그러던 중 나에게 황금 사신의 기분을 풀어줄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
여기서 그저 누워서 쉬는 것보다, 꿈과 모험이 가득한 방법이었다.
***
갈색빛을 띠는 벽.
미니 사신이 점프하면 닿아버릴 정도로 낮은 천장.
마음껏 양손을 펼치지도 못할 만큼 좁은 통로.
황금 사신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미로처럼 뻗어있는 통로를 조심스럽게 나아가고 있었다.
황금 사신의 손에는 커다란 방패와 짧은 칼이 들려 있었다.
그 뒤를 바짝 따라가는 붉은 사신은 불꽃으로 만들어진 길쭉한 창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일행의 최후미에는 지팡이를 든 푸른 사신이 조심스럽게 따라붙고 있었다.
검사와 창병 그리고 마법사로 이루어진 완벽한 파티였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나아가던 일행 앞에 그림자로 만들어진 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공격!’
그 순간 황금 사신이 한손검을 들어 올리며 의지를 내뿜었다.
황금 사신은 커다란 방패로 괴물을 밀어붙였고, 붉은 사신은 황금 사신의 뒤에서 길쭉한 창을 내질렀다.
끼에엑!
그러자 그림자 괴물은 불꽃에 활활 타오르면서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면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괴물이 있던 자리에는 커다란 별사탕 3개가 생겨나 있었다.
미니 사신들은 별사탕을 하나씩 먹고, 행복한 표정으로 통로를 계속해서 나아갔다.
얼마나 이 미궁을 돌아다녔을까.
황금 사신은 상당히 오랜 시간 헤맨 끝에 심상치 않은 장소를 발견했다.
‘정지!’
그러자 길쭉한 불꽃 창을 든 붉은 사신과 지팡이를 든 푸른 사신이 자리에서 멈췄다.
황금 사신의 앞에는 화려하게 장식된 거대한 문이 놓여있었다.
‘보스방!’
그 문은 그림자로 물들어 불길한 빛을 띠고 있었다.
황금 사신과 붉은 사신 그리고 푸른 사신은 살짝 상기된 표정으로 던전 보스가 있는 최심부의 문을 열어 젖혔다.
끝없는 어둠으로 가득한 방에 황금 사신이 한 걸음을 내딛자, 사방에 걸린 횃불에 불이 붙으며 보스방을 밝혔다.
어둠이 물러나서 거대한 방의 모습이 드러나자, 나지막한 의지가 들려왔다.
‘드디어 왔구나. 도전자여.’
거대한 단상 위에 멋진 자세로 서 있는 최종 보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 양옆에 달린 소라를 그림자로 뒤덮어서 악마의 뿔처럼 바꾼 보라 사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