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50
나크라드는 여느 때처럼 버로우 공작의 옆에 있었다. 이미 공작의 정신을 어둠으로 물들이는 일은 끝난 상태였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버로우 공작은 지금의 나크라드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무인이다만 그 정신은 다르니.
십년도 전에 죽은 아들을 아직도 마음에 품고서 매일 악몽을 꾸는 아비의 정신이 어찌 강인하겠는가.
그 아들에 그 아비라는 말이 너무도 잘 어울리는 구나. 그 바보 같은 녀석 덕분에 이토록 일이 쉽게 풀렸으니까 말이다.
아직 이 자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는 없을 터이다만 괜찮다. 영지의 최고 결정권자가 가만있는 것만으로도 할 수 있는 일이 무척이나 다양해지니까.
타리키의 사제들이 영지로 모여들고 있으니 그들을 용하여 무지몽매한 이들에게 타리키의 위대함을 알리자꾸나.
그럼으로써 타리키의 위세를 높이는 것으로 힘을 키우는 것이야.
아아. 그리고 죽어버린 친족의 그림자에 머무르고 있는 멍청한 버로우의 공자에게도 타리키의 축복을 선사해야지.
이 모든 일이 가능했던 것에는 녀석의 멍청함이 크니.
모든 계획의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악신께서 바라는 대로 그 거대한 아카데미를 무너트려.
– 아이야.
“예. 위대하신 타리키시여.”
갑작스런 목소리였지만 나크라드의 반응은 빨랐다. 그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처럼 한 쪽 무릎을 꿇고 신의 목소리를 들을 자세를 갖추었다.
– 저주 받아 마땅한 것들의 귀가 쫑긋거리고 있구나.
저 이야기를 들은 순간 나크라드의 머릿속을 스치는 것은 빌어먹을 주신의 사도였다.
그 년이다.
그 년 밖에 없다.
다른 어중이떠중이들이 타리키의 권능에 의하여 숨겨진 것을 찾아냈을 리가 없으니.
역시 그 때 잡아 죽였어야했다. 내 발치 아래에서 비명을 내지르며 살려 달라 비는 꼴을 봤어야 했다.
무기 안에 깃들어 있는 그 노친네가 피눈물을 흘리게 만들었어야 했다.
다소 무리를 하더라도 내가.
– 걱정하지 말라. 이는 그대를 질책하기 위함이 아니니.
“자비로우신 타리키여.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 그대는 그대의 일을 하라. 그대에게 그 이상을 바라지 아니하니.
“오오. 알겠습니다. 저는 당신을 믿고 저의 일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
악신이 만들어내는 던전은 대개 그 신의 권능에 맞는 특성을 지니기 마련이다.
당연 어둠의 악신이 만들어내는 던전도 그에 걸맞는 특성을 지니는데 그 녀석의 특성은 모르면 맞아야지다.
통상적인 방식으로는 결코 발견할 수 없는 함정.
어둠의 권능에 의하여 숨겨져 있는 길.
다른 던전에선 찾아낼 수 없는 특유의 기믹.
그림자에 숨어 유저의 목을 노리는 여러 마물들.
이외에도 녀석의 권능이 닿은 던전은 어둠이라는 특성처럼 음습하고 음험한 무언가를 지니고 있다.
괜히 커뮤의 유저들이 되도록 어둠의 악신과 관계된 던전에 들어가지 말고 어쩔 수 없이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라면 커뮤나 X튜브에 올라온 여러 공략을 보라는 것이 아니다.
공략은 무슨 공략이냐. 맨몸 트라이가 최고지! 라는 소리를 하면서 던전에 진입하는 순간 모니터건 마우스건 키보드건 하나는 박살내게 되어 있거든.
당장 나만 하더라도 처음 악신의 던전에 들어갔을 적에는 뭐 이딴 쓰레기 같은 던전이 있냐는 소리를 몇 번이나 했으니까.
허나 그는 어디까지나 소울 아카데미에 익숙하지 않았을 적의 일.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 썩은물이 된 난 그 어떤 험악한 기믹이 존재하는 던전이라도 첫 트라이에 공략할 수 있는 인간이 되었지. 유저들이 만들어낸 여러 던전을 공략하다 보니까 어느새 그렇게 되더라.
히야. 옛날 생각하니까 또 좆같네.
진짜 인간의 악의라는 것이 얼마나 흉악한지.
어둠의 악신은 인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최소한 그 녀석은 발을 한 번 잘못 디뎠다는 이유로 오도 가도 못하는 뒤주에 가둬서는 자살해라 애송이!를 외치진 않잖아.
뭐어. 인간의 끝없는 악의에 비하면 별 거 아니지만 그래도 어둠의 악신이 만들어내는 던전은 높은 난이도를 지니고 있다.
최소한 지금의 내가 가볍게 생각하고 들어갈 곳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게임에서 그랬던 것처럼 실패하면 죽고 말지 같은 생각을 할 수 없는 나다.
이 곳의 죽음은 진짜 죽음.
극한의 공포와 고통 속에서 발악하다가 겪는 끔찍한 것.
이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완벽한 공략을 위해서는 철저한 준비를 할 필요가 있지.
그 철저한 준비의 시작이 지금부터 구하고자 하는 준종결급 방패 ‘안키르’ 다.
드랍률이 극한으로 낮은 석판을 통해 단서를 찾고.
그 석판 중 하나를 통해 숨겨진 장소로 들어가.
그 석판 중 하나를 통해 미로를 통과해서.
시련이라는 이름의 던전을 공략하고 나서야 습득할 수 있는 물건인 안키르는 얻기 까다로운 물건이니만큼 상당한 성능을 지니고 있다.
내구도 무한에 자동 복구 같은 옵션은 기본이고 충격의 경감률도 상당한데다가 여러 부가 효과까지 들고 있으니까.
이런 유용한 기능 중에서도 지금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옵션은 바로 부정을 걷어내는 능력이다.
먼 과거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가 한 영웅에게 직접 전수해주었다는 이 방패는 여러 부정한 힘을 쫓아내는 것이다.
그러니까. 타리키의 권능에 의하여 감추어져 있는 여러 함정을 감지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는 거지.
내가 괜히 상대가 어둠의 악신이라는 걸 눈치 채자마자 방패를 구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게 아냐.
“이 늦은 시간에 어쩐 일이십니까. 영애님.”
이사벨을 만나 석판을 구하고 돌아오는 데 성공한 나는 기숙사로 돌아가는 대신 루카를 찾아왔다.
이 석판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그의 협력을 구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겸사겸사 던전을 공략할 때 맨 앞에서 고생해 줄 사람도 구하고.
“아카데미의 구관 말입니까?”
‘네. 맞아요. 지금 바로 갈 수 있죠?’
“그래. 이 허접 아카데미가 개허접 구닥다리일 때부터 쓰던 곳 말이야. 지금 갈 수 있지?”
“물론 가능합니다만 그 곳은 왜?”
‘따라오시면 알아요.’
“페도 교수인 너한테 나처럼 귀여운 여자애를 도와줄 수 있게 해준다잖아. 너무도 감사한 일 아냐? 아 설마 굳이 욕을 먹고 싶어서 그런 거야? 으. 역겨워라.”
“…예. 입 다물고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소울 아카데미에는 본관과 구관이 존재한다.
구관은 과거 소울 아카데미라는 곳이 설립될 때에 만들어졌던 장소이자 지금은 아카데미에서 연구를 하는 이들이 사용하는 곳이다.
현대식으로 이야기하자면 대학원생들이 가두어져 있는 감옥이라고 해야 하려나.
해가 땅을 이불 삼아 잠을 청하고 있는 시간에도 여전히 밝은 빛을 내뿜고 있는 건물을 본 순간 이 곳이라 하여 대학원생의 취급이 다르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니 이 세상의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본 세상의 사람들보다 신체능력이 뛰어난 편이니 더 심하게 구르려나.
“잠시 멈춰주십시오.”
구관은 소울 아카데미에 속한 여러 학자들의 연구 결과가 보관되는 장소다보니 저들의 허락되지 않은 사람들의 출입을 엄금한다.
일단 교수인 칼이 있어도 다를 바 없다. 아직 아카데미에 들어오고서 1년이 지나지 않은 그에겐 많은 권리가 없으니까.
“접니다. 루카.”
“아. 루카 교수님이셨습니까. 실례했습니다. 지나가시죠.”
허나 루카는 다르다. 오랜 기간 소울 아카데미에 근무하며 실적을 쌓아온 그는 원한다면 이 안에서 뭐라도 할 수 있다.
보통 루카는 이 권한을 개짓거리를 하는 데에만 사용하지만 잘 이용한다면 확실히 유용하단 말이지.
덕분에 손쉽게 구관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내가 발을 옮긴 곳은 구관의 기록보관소였다.
“이 낡은 곳에 용무가 있으시다고요?”
루카는 기록보관소의 낡은 문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과거 소울 아카데미의 역사가 보관되어 있는 이 곳은 역사적인 의미가 있긴 하지만 유용한 무언가가 존재하진 않는다.
게임에서도 그랬다. 자잘한 아이템이나 여러 이스터에그는 존재하는데 중요한 무언가는 없었지.
근데 그건 문 안으로 들어갔을 때의 일이다. 이 기록보관소의 진짜 모습을 보려면 문 바깥에서 특수한 물건을 준비해야 한다.
인벤토리에서 석판을 꺼내 들어 앞으로 내밀자 기록보관소의 문이 모습을 바꾼다.
낡디 낡은 나무 문에서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고풍스러운 문으로.
“…이건 도대체.”
자신이 여러 번 보았던 기록보관소에 이런 게 숨겨져 있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듯 루카가 눈을 끔뻑거린다.
그 모습을 가만 바라보던 칼은 루카의 어깨를 툭하고 붙잡고는 이렇게 말했다.
“허접 후배. 미숙하군요. 이런 걸로 하나하나 놀라면 안 됩니다. 아가씨가 지나다니는 길은 언제나 이런 걸로 가득하거든요.”
저거 견제지? 허접 후배한테 텃세부리는 거지?
저 자부심 가득한 표정을 봐.
왜 자기가 먼저 허접이라 불렸던 사실을 저렇게 자랑스러워하는 걸까.
프레이도 얘도 진짜 이해를 못 하겠어. 왜 매도 당하는 데 실실거리는 건지 원.
가만 내버려 두면 더 꼴값을 떨 게 분명했던지라 나는 대뜸 문을 열어버렸다.
‘칼. 빨리 가죠.’
“야. 허접. 나 아침이 되기 전에는 돌아가고 싶거든? 네가 변태 자식인건 누구나 다 알고 있으니까 자랑하지 말고 따라오기나 해.”
“하하. 죄송합니다. 누구나 다 알고 있더라도 한 번 더 자랑을 하고 싶거든요.”
메스가키 스킬의 매도에도 불구하고 어깨를 피는 칼을 보고 있자니 절로 한숨이 샜다.
…내가 이래서 얘한테 준비해둔 선물을 못 주겠다니까. 평소에도 항상 이러는데 선물을 줬다가는 무슨 짓을 벌일지 알 수가 없으니까.
더 이야기를 나눠봐야 머리만 아플 것 같아서 그냥 기록보관소 안으로 발을 움직였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칼과 루카가 내 뒤를 따라 왔고 우리 세 사람 모두가 안에 들어서기 무섭게 문이 저 알아서 닫혀 버렸다.
음? 여기 문이 자동으로 닫히던가?
분명.
“이런 곳이 있었다니. 허접 선배님의 말이 옳습니다. 익숙해지지 않으면 많이 힘들겠군요.”
“벌써부터 그걸 깨닫다니. 역시 루카 교수입니다.”
…아니.
야. 저거 아무리 생각해도 너 까는 거 아니냐? 비꼬는 거잖아 저거!
왜 허접 선배라는 호칭에 해실거리면서 웃는 건데?
하아.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영지의 기사들 사이에서도 평판이 좋고.
조이나 아서한테 이야기 들어보면 아카데미 학생들한테도 멋지고 친절한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듣는데.
왜 내 옆에만 있으면 이런 유감스러운 사람이 되는 거냐고.
생각해보면 얘만 이런 건 아니네.
베네딕도 그렇고.
얼빠 여우도 그렇고.
페이비도 그렇고.
당장 얼마 전에 만났던 이사벨 걔도…
어라?
혹시 이거 내가 문제인가?
그런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