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 사신 정원 깊숙한 곳, 우유 빙수 설원.
그곳에서 나는 하얀 햄스터를 들어 올리고 얌전히 관찰하고 있었다.
보송보송하고 새하얀 털.
뭔가를 잔뜩 집어넣은 것처럼 빵빵한 볼.
길쭉한 꼬리와 거기에 꽂힌 수많은 과일.
꼬리에 꽂힌 과일은 설탕 코팅으로 반짝반짝 빛나서 굉장히 맛있어 보였다.
‘이상하게 맛있어 보이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햄스터 꼬리에 꽂힌 설탕 코팅 과일을 하나 빼서 먹었다.
옴뇸뇸.
과일 하나를 입 속에 쏙 넣고 냠냠.
둥글둥글한 녹색 포도였는데, 생각보다 굉장히 맛이 있었다.
뭐 설탕 덩어리니까 단 것은 당연했지만.
나는 당연히 과일이 설탕에 뒤덮여 있어서 굉장히 딱딱하고 말라비틀어져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촉촉하고 맛있었다.
인간이었을 때 먹었다면, 이가 상할 것을 각오해야 할 정도의 끈적한 설탕 덩어리.
하지만 물리 면역이 된 나는 모든 종류의 과자를 이가 상할 걱정을 하지 않고 먹을 수 있었다.
아무리 단단한 과자라도.
아무리 달고 끈적끈적한 과자라도!
히히.
내가 꼬리에 꽂힌 과일을 마구마구 빼서 먹기 시작하자, 햄스터는 마치 ‘내 소중한 과일’이라고 외치는 듯한 표정으로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불과 수 초 전만 해도 굉장히 겁을 먹은 것 같았는데 반항하다니.
눈물까지 흘리며 버둥거릴 정도인 걸 보니, 굉장히 과일들이 소중한 햄스터인 것 같았다.
햄스터 꼬리에서 끊임없이 튀어나오는 설탕 코팅 과일을 계속 냠냠 먹다 보니,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눈으로 가득 덮인 설원.
가공된 둥근 것을 꽂을 수 있는 꼬챙이.
그 두 가지가 저절로 내 뇌리에서 조합되며 한 오브젝트를 연상시켰다.
예린이의 목에 흉터를 남긴 사악한 오브젝트!
예린이의 상처를 통해 꿈이 현실임을 확인했을 때, 정말 만나고 싶었던 오브젝트였다.
정말, 정말로 만나고 싶었던 오브젝트였다.
햄스터의 과일에 정신이 팔려서 조금 떠올리는 게 늦었지만, 떠올렸으면 된 거겠지.
히히.
햄스터를 어떻게 괴롭혀야 잘 괴롭혔다는 소문이 날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내 입가가 복수할 생각에 절로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심상치 않은 내 표정을 보며 공포에 젖은 햄스터의 작은 눈동자에 내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그 얼굴에는 정말로 사악하면서도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 올라 있었다.
***
햄스터는 사지가 사라진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후, 드디어 성공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만족스럽게 웃었다.
단순히 햄스터의 사지를 자른 것이 아니라, 공간을 괴리시켜서 떼어낸 것에 가까웠다.
사지가 붙어있지만, 다른 곳에 돋아나 있는 느낌으로!
언제나 공간 능력을 사용할 때면 힘으로 부수고 찢어내기만 했던 나에게는 굉장히 어려운 작업이었다.
하지만 예린이에게 지워지지 않는 흉터를 남겼으니 이 정도 벌칙은 있어야겠지.
그리고 나는 이어서 햄스터에게 칠 여러 가지 장난을 고심하고 있었다.
처음 생각난 장난은 ‘플라밍고와 불 그리고 프로메테우스’였다.
이 장난은 햄스터를 결박하고 복부를 십자 형태로 절개한 뒤, 설탕 플라밍고를 부르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면 햄스터는 프로메테우스처럼 플라밍고에게 영원히 간을 쪼아 먹히는 형벌이었다.
신화를 기반으로 한 ‘굉장히 교육적인’ 장난이었다.
다만 이런 장난을 치면, 미니 사신이들이 싫어할 것 같아서 포기했다.
역시 장난은 하얀 아귀 뜯어먹기나, 구워 먹기처럼 맛있어야 좋겠지.
나는 결국 적당한 장난을 선택해서, 헤일로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커다란 자판기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헤일로를 쓰자마자 익숙해지지 않는 고통이 느껴졌지만, 예린이를 위한 것이니까 꾹 참았다.
예린이 흉터의 복수를 위해서!
커다란 자판기의 구조는 간단했다.
햄스터는 자판기 안에 묶여 있고, 자판기 안에 위치한 간수가 햄스터의 꼬리에 달린 과일을 계속 뜯어가는 구조였다.
간수 역할을 맡은 것은 설탕 플라밍고였다.
영원히 타오르는 형벌에서 벗어나, 간수 역할을 맡게 된 플라밍고는 열심히 햄스터의 과일을 빼내 주겠지.
히히.
햄스터는 사지가 사라진 채, 소중히 여기는 설탕 코팅 과일들을 끊임없이 빼앗길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그렇게 온갖 종류의 설탕 코팅 과일들을 파는 자판기가 완성되었다.
***
송파구 구석에 위치한, 제임스 타워 공사 현장.
그곳에 머무는 제임스는 모니터 화면에 떠오른 한 남자와 화상 통화를 하고 있었다.
[제임스, 자네가 말한 것처럼 러시아에서 설원의 달 완전 소멸을 확인했네.]
“이제 0번 서적에서 언급한 ‘그 순간’이 코앞으로 다가왔어. 0번 서적에 쓰여있는 대로라면 준비를 철저히 해야겠지.”
제임스는 꺼내 들고 있는 두꺼운 책을 툭툭 두들기면서 말했다.
[러시아도 오브젝트 사태가 끝난 것을 감지하고 사람들을 투입하고 있네. 정말 많은 사람이 죽었어. 현재 확인된 것만 해도 100만 명이 훌쩍 넘는다고 하는군.]
“그렇겠지. 그 넓은 구역이 전부 먹혀버렸으니까. 아마 그 안에 있던 사람은 모두 죽었을 거야.”
그러면서 보안 회선이 연결된 컴퓨터 화면에 자료 영상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눈 말고는 아무것도 없고, 언덕 같은 장애물도 없이 깨끗한 설원만이 끝없이 펼쳐져 있던 시베리아를 보여주는 영상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부터, 설원이 변모하기 시작했다.
눈밭에 정신을 잃은 채 쓰러진 사람들이 가득했고, 도시 전체가 얼어붙은 채 방치된 모습도 보이기 시작했다.
마치 그림으로 그린 것 같은 설원이 현실처럼 처참하게 변하는 장면이었다.
[하늘 위에도 이제 7색 달이 거의 완성이야. 이제 남은 것은 ‘녹색 달’뿐이군.]
“아직도 녹색 달의 위치를 찾지 못했나? 이번만큼은 우리가 먼저 발견했으면 좋겠는데….”
제임스는 어둑어둑한 하늘과 달을 창문으로 올려다보며 말했다.
“뭐, 희망 사항에 불과하겠지. 그나저나, 내가 보내달라고 한 영체 탐지기 반입은 어떻게 되고 있지?”
벌써 한 시간이나 이어진 회의를 끝낼 시간이 되자, 제임스는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세희 연구소에서 요청한 영체 탐지기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니, 반입이 아예 불가능하다고 하더군. 영체 탐지기는 한국에 위치한 연구소가 구입하는 목적으로는 아예 통관을 막는 것 같아.]
“뭐?”
언제나 이해할 수 없는 행보를 보이는 한국 오브젝트 협회였지만, 이번에는 정말 이유를 알 수 없는 짓을 벌이고 있었다.
“흠, 아무래도 내가 직접 가지고 가서 빌려주는 형식으로 제공할 수밖에 없을 것 같네.”
제임스는 ‘귀찮을 텐데, 알려줘서 고맙다’고 인사하며 통신을 종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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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만간 가려고 했는데, 마침 가야 할 이유도 생겼네.”
제임스는 컴퓨터의 전원을 끄며, 세희 연구소 방향을 바라보았다.
***
세희 연구소에 위치한 나의 보금자리, 격리실.
나는 침대에 누워서 푸딩을 먹으며, TV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내 옆에 있는 수많은 보라 사신은 두 손을 꾹 움켜쥐고 TV 화면에 집중하고 있었다.
얼마나 집중하고 있었냐면, 보라 사신의 통통한 볼을 콕콕 찔러도 반응하지 않을 정도였다.
말도 알아듣지 못할 텐데, 용케 이렇게까지 집중이 가능하네.
생각보다 똑똑한 건가?
미니 사신이 점점 똑똑해진다고 생각하면 가끔 오한이 들곤 했다.
설마 똑똑해진다고 패륜 사신이 되진 않겠지?
나는 좋은 엄마니까, 괜찮을 거야.
TV 화면에는 오브젝트의 능력을 얻은 초능력자들이 나오는 영화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보라 사신처럼 충격을 흡수하는 초능력자가 주요 악당으로 나오는 영화였다.
나는 이미 본 적이 있어서 채널을 돌리려고 했지만, 보라 사신들이 너무 재밌게 보고 있어서 차마 돌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영화 대신 보라 사신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지금 자세히 살펴보니, 보라 사신들의 복장은 전부 조금씩 디테일이 달랐다.
자신만의 멋을 추구하는 건가?
그러고 보니 매일매일 조금씩 복장이 달라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던 중, 갑자기 보라 사신들이 이불을 꼭 쥐고 고개를 쭉 내밀면서 집중하기 시작했다.
화면 쪽으로 시선을 돌려보니, 영화의 엔딩에 가까워져 있었다.
‘안 돼!’
‘안 돼!!’
충격을 흡수하기에, 물리적으로 죽일 수 없는 악당의 최후를 표현하는 장면이었다.
정신 오염으로 능력 사용을 막고 악당에게 마무리 일격을 가하는, 잔인하다면 잔인한 장면.
결국 악당이 죽어버리자, 보라 사신들은 고개를 푹 떨구고 눈물을 똑똑 떨어트리기 시작했다.
‘엄마!’
‘엄마아!’
그리고 영화를 보다가 말고, 나에게 달라붙어서 엉엉 울기 시작했다.
‘그래그래, 괜찮아. 괜찮아.’
나는 도대체 어느 부분이 슬픈 건지 잘 모르겠지만, 달라붙은 아이들을 적당히 달래며 쓰다듬었다.
그리고 다음 날.
보라 사신들 사이에서 이상한 투구가 꽤 오랫동안 유행하기 시작했다.
영화에서 나왔던, 정신 오염을 막는 좀 이상하게 생긴 헬멧이었다.
‘!’
아니, 악역에게 감정이입을 한 거였어?
***
아무도 없는 어두운 방 안.
휠체어를 탄 오무룡이 캡슐 속에 들어있는 손녀의 모습을 하염없이 올려다보고 있었다.
쿨럭쿨럭.
나이가 나이라서 그런지, 오무룡의 몸 상태는 빠른 속도로 나빠지고 있었다.
“아직, 아직 죽을 수는 없다.”
아집과 집념, 그리고 집착이 가득한 노인의 일그러진 얼굴이 캡슐의 유리에 비쳐 보였다.
오무룡의 거처에는 오래되고 고풍스러워 보이는 램프가 하나 있었는데, 오무룡은 그 램프를 들어 올리고는 소리쳤다.
“도대체 얼마나, 얼마나 더 클론을 만들고 감정을 모아야 하는 거지?”
[아직 부족하다.]
램프에서는 불길한 붉은 빛이 작게 타오르더니, 갈라지는 것 같은 노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흐흐, 그렇겠지.”
오무룡은 자조적으로 웃더니, 엄중하게 밀봉된 케이스를 하나 꺼내 들었다.
제3 연구소장이 가지고 있던 것으로 보이는, 램프 형태의 오브젝트를 봉인한 케이스였다.
“하나로 안 된다면, 두 개를 사용하는 수밖에.”
오브젝트를 높은 확률로 파괴하고, 수명을 늘려주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 진화액.
오무룡의 목표는 그것이었다.
“아직 죽을 수는 없다.”
그는 케이스의 봉인을 천천히 풀며, 다짐하듯이 ‘손녀를 위해’라고 계속 되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