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52
‘할아버지. 적당히 하지 않으면 저 진짜 화내요?!’
이제 진짜 집중해야 하는 순간인데 자꾸 그럴래요?!
<그렇지만 말이다! 크핳! 저걸 보고 어찌 참으란 말이냐! 에라. 모르겠다! 벌을 내리려면 내려라! 무엇이듯 달게 받으마!>
‘진짜로요? 무엇이든 달게 받겠다고요?’
오. 불쌍한 할배. 절대로 해선 안 될 단어를 꺼내고 마셨군요.
무엇이든 하겠다고요?
당신은 아직 인간의 악의에 대해 잘 모르고 계시는 모양입니다.
어쩔 수 없죠. 여태까지는 당신께 배움만을 얻었으니 이번에는 제가 친절히 가르침을 드리겠습니다.
앞으로는 무엇이든이라는 말을 하지 못하도록.
<…여아야?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게냐?>
‘글쎄요?’
<화장실이냐? 짬통이냐? 아니면 설마 숲의 주인에게 날 넘길 생각은 아니겠지?>
‘흐응. 할아버지의 상상력은 그 정도군요? 뇌가 딱딱하시네요.’
<…뭐? 이것보다 더 심한 게 있다고?!>
사실은 아무것도 생각해 둔 게 없다. 할배에게 무언가를 할 생각도 없고.
그렇지만 할배는 이 사실을 모른다.
모르기에 상상해버리고 만다. 자신이 받을 끔찍한 벌을.
<취소. 방금 한 말을 취소하겠다! 내 시끄럽지 않게 하마!>
지금 할배의 머릿속에는 어떤 상상이 스쳐 지나가고 있을까? 잘은 모르겠지만 무척이나 끔찍한 것이지 않을까?
‘할아버지. 그러시지 않아도 괜찮아요. 제가 할아버지를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그치? 농담이었지?>
‘할아버지 같은 위대한 기사가 한 번 했던 말을 철회할 리 없단 걸 전 알아요. 반드시 할아버지의 명예를 지킬게요!’
<…여아야? 그게 무슨 말이더냐.>
‘반드시!’
<여아야? 여아야?!>
그래서 난 그 어떤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괜히 말을 꺼내 봐야 할배의 상상력을 죽일 뿐이지 않나.
공포에 질린 할배의 목소리는 다른 의미로 시끄러웠지만 방금 전보다는 괜찮았다. 최소한 신경에 거슬리지는 않았으니까.
나중에 일이 끝나면 오늘만 봐줄 테니 다음부터는 조심하라고 그래야지.
할배의 다급한 목소리를 흘려들으며 고개를 들자 해골이 좌에서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그 걸음을 따라 앞으로 나서려 하자 칼과 루카가 기겁을 했다. 저 해골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면서 말이다. 허나 나는 그 말을 무시했다.
“저기♡ 내가 너희들처럼 눈앞 밖에 못 보는 멍청이로 보여?♡ 너희가 원숭이라고 나까지 원숭이 취급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는데~♡”
이 곳에 오자는 이야기를 꺼낸 건 나다.
아무도 모르던 이 던전의 입구를 찾아낸 것도 나다.
발 한 번 잘못 내딛는 순간 입구로 돌아가 버릴 미로에서 너희들을 이끈 것도 나다.
그런 내가 저 해골 같은 게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까?
그렇게 묻자 루카가 무언가 깨달음을 얻은 듯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섰고 이내 칼이 마지못해 움직인단 티를 대며 물러난다.
“두렵지 않나?”
그렇게 홀로 서게 된 나에게 좌에서 내려와 기다리고 있던 해골이 물음을 던진다.
두렵지 않냐고?
‘전혀요.’
“누가 두려워? 네가? 하핳! 전혀! 강아지한테 던져주면 좋아할 해골을 내가 왜 무서워해야 해?”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변수다. 내가 알지 못하는 변수 말이다. 게임 속에 나왔던 것과 다를 바 없는 너를 내가 왜 무서워하겠냐.
오히려 지금 난 너를 만나게 된 게 너무 반가워. 네가 상대라면 지금 내 방패가 어디까지 막아낼 수 있을 지를 정확히 확인할 수 있을 테니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서 영웅을 흉내 내는 공격을 막아 볼 수 있다니.
아. 생각만 해도 기대되네.
“…과연. 패기로운 태도가 좋군.”
저는 알까? 목소리가 살짝 떨리고 있었다는 것을?
애써 태연한 체 하던 해골이 헛기침을 내뱉고는 팔을 위로 치켜들었다.
그러자 텅 비어 있던 해골의 손목에 마력이 집약되더니 이내 방패의 형상을 갖추었다.
저를 한 마디로 묘사하자면 순백이었다.
수많은 전투를 거쳤음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생과 사의 갈림길을 뛰어 넘었음에도.
어둠의 앞에 그 누구보다 당당히 섰음에도.
고결한 백색의 빛을 잃지 않은 거대한 방패는 분명 내가 바라던 그 방패였다.
안키르.
신께서 영웅에게 선사한 결코 부수어지지 않는 방패.
저게 진품인지 확인하기 위해 감정 스킬을 사용해 보았지만 안타깝게도 저를 감정하기엔 아직 숙련도가 부족했다.
‘할아버지.’
그래서 난 할배를 불렀다. 저 방패를 그 누구보다 가까운 곳에서 봤을 이를 말이다.
<쯧. 저 고까운 백색은 분명 안키르가 맞구나.>
내가 따로 말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할배는 내 의도를 눈치 채고 바로 답변을 해주었다마는. 한 가지 이상한 부분이 있었다.
‘고까워요?’
<…그런 게 있다.>
‘이제는 협조도 안 해주는 거에요? 자꾸 그러면.’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다! 그대가 협박하더라도 난 답변할 수 없다!>
아. 개인적인 거에요?
난 또 뭐라고. 할배가 심술나서 뭐 숨기는 줄 알았네.
일단 저게 진품인 건 분명하니까 이제 내가 할 일은 시련을 통과하는 것뿐인가.
“이 방패는 신의 전령께서 부족한 기사에게 하사한 것이다. 그렇기에 자격 없는 자에게는 넘겨줄 수 없지. 그대가 진정 이 방패를 바란다면 내가 내리는 시련을 넘어서야 할 터.”
저의 이야기를 들으며 몸 안에 신성을 퍼트린다. 지금 내가 준비할 수 있는 최적의 몸상태를 만들기 위해서.
“시련은 내용은 이렇다. 앞으로 내가 다섯 번의 공격을 가할 것이다. 그대는 그 공격을 완벽히 막아내기만 하면 된다.”
자신을 가라드라 믿는 해골이 내리는 시련은 간단하다.
저 녀석의 공격을 다섯 번 막아내는 것.
더 정확하게는 저 녀석이 내리치는 간신히 눈에 보일까 말까한 공격을 보고. 방향을 맞춰서. 단 1프레임의 유예도 없이 저스트로 패링 다섯 번을 성공시키는 거지.
이것만 해도 유저들 입에서 욕지거리가 절로 튀어나오는 데 저 정신 나간 해골은 공격을 할 때마다 방향을 바꾸고, 타이밍을 바꾸고, 위력을 바꿔서 유저들을 더 힘들게 만들었다.
사실상 깨지 말라고 넣어 둔 시련이나 마찬가지였지.
그래서 보통의 유저들은 시련에 도전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 없이 해골을 박살내면 안키르를 습득할 수 있었으니까.
나도 원래는 그랬다. 업적작에 도전하기 전까지는.
소울 아카데미 업적 중 하나에 가라드의 시련 5회 연속 통과가 있었거든. 그래서 업적 100%를 완료하기 위해선 이 놈의 시련을 완벽하게 파훼해야 했지.
지금 생각해도 절로 욕지거리가 튀어나오네. 그거 깬다고 며칠을 박았더라.
최소한 한 달은 넘었을 거야. 딱 한 달이 됐을 무렵 어느 피지컬 괴수가 하루 만에 업적 깬 걸 보고 쌍욕을 박았던 기억이 있거든.
“준비됐나?”
지금 할 수 있는 모든 도핑을 끝마치기 무섭게 해골이 물음을 던졌다. 난 거기에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방패를 꺼내 들었다.
‘준비 됐어요.’
“그러는 너는? 공격이 다 막히고 질질 짤 준비는 됐어?”
“…가지.”
해골이 검을 치켜드는 것을 보며 정신을 집중한다.
내가 업적을 깨는 데 성공한 방법은 단순하고 정신 나간 방식이었다.
해골의 모든 동작을 외워버리는 것. 그리고 그 암기를 기반으로 타이밍을 몸에 때려 박는 것.
과거 내 피지컬로는 도저히 저 해골의 공격을 보고 반응할 수 없었기에 이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처음에는 나도 이게 될까 싶었는데 사람이 시간과 광기를 때려 박으면 안 되는 게 없더라고.
그 때 죽어라 노력한 덕분에 그 후부터는 해골의 시련에서 실패하는 일이 사라졌지.
그건 지금이라하여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왜냐고?
보이니까.
해골의 움직임이 말이야.
팔을 위로 치켜들었다.
손목이 코 부분을 넘어선 걸 보면 강한 위력이네.
어깨가 왼쪽으로 살짝 기울었어.
왼쪽에서 대각선으로 내리치는 공격.
방향과 위력을 파악했으니 이제 타이밍만 보면 된다.
아. 손목이 움직였어.
지금이구나?
필요한 세 가지 조건을 모두 알아챈 순간 내 몸이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과거의 내가 쌓았던 노력이.
이 몸에 쌓아온 방패의 숙련도가.
수많은 전투의 경험이.
내 몸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 뒤를 따르듯 철벽의 목소리가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철벽이 내뱉는 조언은 내가 택한 동작과 완벽히 일치하고 있었다.
티잉!
검이 방패에 부딪힌 순간 해골의 검이 저 뒤로 튕겨 나간다.
극한에 이른 방패술이 모든 충격을 상대에게 되돌린 것이다.
필사적으로 중심을 붙잡는 해골의 모습에 절로 웃음이 샜다.
어쩔 수가 없었다.
등줄기를 타고서 올라온 희열이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워 버렸으니까.
아. 그래. 이거지. 이거야.
이래서 방패를 드는 거라고.
“이거 시련 맞아?♡ 아니지?♡ 몸풀기용 공격이지?♡ 그치?♡”
그런데 있잖아. 한 가지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어.
바로 저 해골 녀석의 태도가 말이야.
눈으로 보기도 어려운 공격을 던지던 녀석이 느릿느릿하게 뭐 하는 짓거리야. 마음에 안 들게.
난 시련을 통과하면서 동시에 지금 내 방패술을 점검할 생각이었다고.
근데 누구라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힘에 가감을 둬? 장난하냐?
“에♡ 진짜 시련이었어?♡ 진짜로?♡ 가지치기할 때나 써먹을 수 있을 법한 공격이 시련이었다고?♡”
나는 좀 더 강하고 빠르고 까다로운 공격을 원해.
과거의 내가 들였던 노력과 지금의 내가 쌓아온 노력이 이루어낸 결정을 느끼게 해주길 바란다고.
“푸하핳♡ 개뼈다귀 기사♡ 너 우리 저택에서 정원사로 일할 생각 없어?♡ 수습부터 차근차근 배울 수 있게 해줄게!♡”
그러니까 제대로 덤벼.
꼬맹이라고 봐 줄 생각 하지 말고.
“…남은 네 번은 다를 것이다.”
검을 다잡는 해골을 바라보면서 웃음을 짓는다.
자. 다음은 뭐야? 어떤 식으로 내 방패를 박살낼 거야?
“가지.”
오른 쪽 발을 내딛었네?
전진하면서 최대 위력으로 후려치려는 거구나?
두 손으로 잡은 검이 허리 뒤로 향한 게 보인다.
얼핏 보기에는 횡으로 휘두르려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는 안다.
나만은 안다.
저 빌어먹을 해골 녀석에게 수도 없이 상대 보았기에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저게 페이크라는 걸.
실제로 찾아올 공격은 아래에서 위로 대지를 가르며 하늘로 쏘아지는 참격.
타이밍은?
해골의 턱이 흔들릴 때.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지금.
티잉!
땅에서 하늘로 승천하려던 검이 방패에 의해 가로 막혀 다시금 땅에 처박혔다.
“다를 거라고 하지 않았어?♡ 아!♡ 뇌가 없어서 다르다는 단어의 뜻을 몰랐구나!♡ 착하고 친절한 내가 특별히 설명을 해줄게~♡”
처음보다는 빨랐지만 여전히 모자라.
전혀 위협적이지 않잖아. 멍청한 해골 자식아.
모니터 속의 너는 이 정도가 아니었어! 더 빛나고 있었단 말이다!
“다르다는 건 같지 않다는 거야!♡ 개허접한 검술을 지닌 개뼈다귀랑 제대로 된 영웅이었던 성기사 할배처럼 말야!♡”
“…지금. 내가 루엘 그 멍청한 꼰대 자식보다 못하다고 한 것인가?”
“정말이지!♡ 멍청한 해골은 이해력도 부족하구나?♡ 못한 게 아니라 다른 거야!♡ 애초부터 비교대상이 안 된다는 거라고♡”
해골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보인다.
아. 드디어 제대로 열 받았네.
할배가 욕지거리를 하길래 둘 사이가 안 좋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확했어.
“오만하고. 건방지군.”
자. 와라. 허접한 해골 자식아.
“그 몸에 영웅을 새겨주도록 하마.”
전력을 다해봐.
최선을 다해 이 건방진 꼬맹이를 쓰러트리려고 하란 말이야.
그래야 박살 내는 맛이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