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53
칼은 여전히 자신의 아가씨이자 자신이 평생 모시기로 결심한 분과 만났을 때를 기억한다.
그 때의 아가씨는 아직 연약하셨다. 단련을 시작하시고 일주일 가량이 지났던지라 이전처럼 엉망진창은 아니었지만 딱 그 정도.
방패를 다루는 능력만이 특이할 정도로 뛰어날 뿐인 그저 그런 사람이었지.
당시의 칼은 루시의 재능에 대해 그리 큰 기대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
동세대 대륙에서 이름을 떨치는 신성들이 얼마나 뛰어난 이들인지 알았기에.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 하더라도 이제와 따라잡을 수 있을 리 없다 확신했기에.
칼의 판단은 지극히 상식적이었다. 그가 자리잡기까지 얼마나 많은 재능을 보았을 것이며 또 그것들이 저무는 것을 보았을 터인가.
다만 칼이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 한 가지 있었다. 상식이라는 것은 상식 안에 머무르는 자에게나 통하는 것이란 사실 말이다.
이미 상식 바깥에 서 있는 이에게 상식이라는 단어만큼 무의미한 것은 존재치 아니하니.
루시 알른이라는 괴물은 겨우 1년 사이에 알른 가문의 피를 이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세상에 증명했다. 베네딕 알른이 써내려간 영웅담에는 후속편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렸다.
지금도 그랬다.
루시의 앞에 서 있는 것은 평범한 존재가 아니었다. 스스로를 영웅의 일각인 가라드라 주장하고 있는 저 해골은 분명 그 이름에 걸맞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허술해 보이는 뼈 근처에 머무르고 있는 막대한 마력이.
죽고서 수백 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을 터임에도 여전한 존재감이.
움직임 하나하나에 묻어나는 압도적인 무가.
그를 증명했으니까.
칼은 저 해골을 마주하자마자 스스로가 저를 상대로 이길 수 있을지를 재단했다.
그리고 이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목숨을 다하면 어느 정도 시간을 끌 수 있겠지만 그 뿐. 옆에 있는 루카 교수와 협력을 한다 하더라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지금도 칼은 자신의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아가씨를 향해 쏘아지는 검격은 압도적이었으니까.
상대를 배려하고 있기 때문인지 위력이 강하진 않으나 검을 잡은 손에서. 그를 휘두르는 팔에서. 몸에서 묻어나오는 경지는 칼보다 아득히 상위.
지금의 칼이 저 검을 받아내려 했다가는 농락을 당하다가 바닥에 널부러지고 말겠지.
그런 검이다. 영웅의 이름에 부족함이 없는 검술이란 말이다.
헌데 루시는 그 검술을 너무도 쉽게 받아냈다.
첫 번째 공격.
얼핏 가벼워 보이나 검술의 극한이 담겼기에 어중간하게 대응했다간 방패 채로 베여버릴 검을 튕겨냈다.
두 번째 공격.
칼조차도 횡으로 베리라 생각했거늘 실제로는 아래에서 위로 승천하듯 쏘아지는 검을 바닥에 내리 꽂았다.
세 번째 공격.
막아낸다면 방패 채로 날려버리고자 하는 검을 오히려 밀어냈다.
네 번째 공격.
칼의 눈으로도 간신히 따라잡을 수 있었던 쾌검을 가뿐히 따라잡았다.
해골이 내지르는 검이 영웅의 이름에 걸맞은 검이라면 루시의 방패술 또한 영웅담을 떠올리게 만들 정도로 압도적이었으니.
검술의 정석이자 끝이라 불러 마땅한 검을 네 번이나 받아냈음에도 루시의 얼굴에는 여유가 흘러 넘쳤다.
“…이것도 따라잡았다고?”
해골의 감탄사를 흘려 들으며 루시가 자신의 방패를 슬쩍 확인한다. 네 번의 시련을 넘어섰음에도 불구하고 루시가 들고 있는 방패는 말끔했다.
누군가 본다면 이제 막 시련에 진입한 것이냐고 물어볼 정도로 말이다.
“이상하다?♡ 내가 잘못 들었었나?♡ 개뼈다귀가 나한테 영웅의 무게를 알려준다고 그랬었는데~♡”
루시는 방패를 앞으로 내밈과 동시에 여느 때처럼 키득거림이 담긴 목소리를 냈다.
상대가 누구라 할지라도 분노를 참을 수 없게 만드는 특유의 어휘. 루시가 지닌 축복 중 하나.
저를 들은 해골이 뼈에서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날 정도로 손에 힘을 강하게 주지만 루시는 멈추지 않는다.
“저기♡ 이게 영웅의 무게란 거야?♡ 꺄하핳♡ 너~무 무겁다♡ 서류 누름돌로 쓰면 적당할 거 같아!♡”
“…적당히 해라.”
과거의 루시라면 모를까 지금의 루시는 사리분별을 할 줄 안다. 저런 도발이 상대의 배려심을 박살내 버릴 것임을 분명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발을 멈추지 않는 이유는 분명.
“꺄아~♡ 죄송해요~♡ 여자애가 든 방패도 못 뚫는 개허접약골 기사님~♡ 너무 약해빠져서 영웅이라는 걸 잊어버렸지 뭐에요?♡ 그러게 조금 더 강하셨으면 얼마나 좋아요!♡ 큽♡ 크흡♡”
방금 전의 공격으로는 만족하지 못했기에.
이 따위 공격이 시련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기에.
“하.”
루시의 의도를 파악한 칼은 탄성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겨우 일 년이다.
아가씨께서 진심으로 단련을 시작하시고서 겨우 일 년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아가씨께서는 이미 동세대의 신성들을 가볍게 짓누르는 것은 물론이고 영웅의 자리를 향하여 성큼성큼 걸어 나가고 있었다.
저것은 알른 가문의 피 같은 것 때문이 아니었다. 신의 사랑 따위를 받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루시 알른이라는 사람이 지닌 재능의 크기가 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랄 뿐.
아아. 너무 빠르다. 아가씨의 성장이 너무도 빨라.
달리기를 하다가 바닥에 널부러지던 아가씨께서 어느새 저 만큼 강해지셨단 말인가.
이러다가는 머잖아 이 기사 나부랭이 따위는 옆에 설 수 없을 만큼 먼 곳으로 가버리시겠지.
그래선 안 된다.
그것은 허락할 수 없다.
이 기사는 아가씨께 인생을 바치기로 결심했단 말이다.
다른 건 그렇다 치더라도 능력의 부족으로 버려지는 것만큼은 인정할 수 없다!
수련을. 수련을 해야 해.
지금보다 더 강해질 수 있도록.
아가씨의 곁에 머무를 수 있도록.
반드시.
“허접 선배님?”
칼이 속으로 다짐을 더하던 그 때에 루카가 옆에서 말을 걸어왔다.
“사소한 일로 감탄하면 안 된다 그러지 않으셨던가요? 제가 뭘 잘 몰라서요.”
칼은 차마 거기에 대답하지 못했다.
아가씨의 충견은 자신 하나로 충분하거늘 그 옆에 다른 이가 생겼단 사실에 질투하며 추하게 텃세를 부린 게 사실이었으니까.
굳은 칼의 모습에 약점을 잡았다 생각한 것일까. 루카가 싱글거리면서 말꼬리를 잡으려던 그 때에.
해골에게서 거대한 기운이 몰아쳤다.
그를 본 순간 칼은 생각하는 것보다 먼저 몸을 움직이려 했다.
저건. 저 기운은 지금의 아가씨가 막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아가씨의 방패술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한계가 있다.
애초에 경지가 다른 저 공격을 어찌 아가씨께서 막아낸단 말인가!
허나 칼의 돌진은 루카에 의해서 가로 막혔다. 루카가 그의 손목을 붙잡은 것이다.
“놔라! 나는.”
“칼. 당신. 기사라면서 자신의 주인을 믿지 못하는 겁니까?”
“믿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이건!”
“전 믿습니다. 당신은 저보다 충성이 부족한 사람인가요?”
루카의 물음에 칼의 움직임이 그대로 멈춘다.
“너.”
“가만 보기나 하세요. 영애께서 기적을 일으키는 걸.”
그걸 구경하는 건 상당히 즐거운 일이거든요.
그리 이야기를 하며 미소 짓는 루카의 모습을 본 순간 칼은 결심했다.
“…그러죠.”
이번 일이 끝나면 루카에게 대련을 청하기로 말이다.
*
<여아야! 저것은 위험하다!>
‘으음. 그래 보이네요.’
할배가 호들갑떠는 목소리를 흘려들으며 앞을 바라본다.
해골의 검 위에 오러가 덧씌워지고 있다.
아직 진심으로 박살낼 생각은 아닌지 자신의 특색을 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 하여 위험하다는 사실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내가 해골의 공략법을 알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해골이 지닌 힘은 나를 아득히 상회한다.
이게 시련이 아니었더라면 난 1초도 버티지 못하고 해골에게 박살나지 않았을까?
그런 녀석이 오러를 담아서 검을 휘두르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엇나가면 방패 채로 반으로 갈라져 루시에서 루/시가 되어버리겠지.
<들뜬 나머지 너무 과하게 도발을 해버렸다! 저 녀석이 여유를 부리게 내버려 두고 시련을 돌파했어야 했어!>
‘이제와서 그러기에요? 할아버지도 중간부터 들떠서 부추겼잖아요?’
중간부터 신이 나서 가라드가 불쾌해 할 만한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 떠들어 댄 사람이 누군데.
<그게. 그.>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껄껄대며 웃어 댄 거 아직 기억하거든요?’
이제와서 다른 말을 하면 곤란해요 할배. 이번에 한해서 저희는 공범이라고요.
<…그건. 그러니까.>
양심에 찔린 것일까. 할배의 말문이 막혀버렸다.
참 할배도 특이하다니까. 이제와서 돌이킬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과거의 잘못을 들먹여서 뭘 합니까?
지금 앞에 도사린 위험을 어떻게 헤쳐나갈 지에 대해서 논의해도 모자랄 마당에.
<…여아야.>
‘왜요?’
<왜 이리 태연한 것이냐?>
할배. 이제야 눈치 챘어요? 평소보다 느린 걸 보니 양심이 많이 찔리긴 하셨나보네.
나는 키득거리면서 방패에 신성을 실었다.
‘자신이 있으니까요.’
왜 태연하냐니. 당연한 거 아닌가?
막을 자신이 있으니까지.
어쨌든 간에 지금 저 녀석이 내지르는 공격은 시련의 일부잖아?
아무리 상대의 공격이 강대하다 하더라도 시련의 일부라면 문제없어.
이건 영웅의 시련이니까.
영웅이라는 족속은 결코 상대가 넘어설 수 없는 재앙을 선사하지 않아.
상대가 아무리 쓰레기 같은 인간이라도 말이야.
지금도 마찬가지다.
분명 해골이 준비하는 공격은 강대하지만 그만큼이나 해골은 내게 많은 단서를 선사하고 있었다.
어디로 공격할 건지. 어떻게 공격할 건지. 언제 공격할 건지.
모든 단서가 내 손 안에 있는데 저를 못 막아낼 이유가 어디 있는가.
<여아야! 저 공격은 2왕자 따위가 내지른 검격과는 격을 달리한다! 불완전한 재현으로는 저를 막아낼 수 없어!>
‘괜찮아요. 할아버지.’
<그렇게 간단히 넘어갈 수 있는 게!…>
‘할아버지의 재현 같은 거 안 해도 충분하거든요.’
<…뭐?>
내가 저 해골을 몇 번이나 마주했다고 생각 하는 거야.
난 말야. 업적 하나 깨겠다고 저 해골을 수도 없이 마주했어.
그 수많은 경험 중에서 저런 공격을 받아낸 경험이 없을 거 같아?
결국 이 시련에서 중요한 건 타이밍이야.
상대의 공격이 내질러지는 그 순간을 제대로 포착할 수 있다면.
그 순간에 맞추어 제대로 방패를 움직일 수 있다면.
이 시련을 돌파하는 데에 대단한 기술 따위 필요치 않아.
방패를 앞으로 내밀고.
심호흡을 한 후에.
눈에 힘을 준다.
해골의 몸 전체를 관조한다.
그로부터 머지 않아 해골의 턱이 흔들린다.
검이 휘둘러진다는 신호.
그를 포착한 나는 빠르게 머리를 굴리며 방패를 잡은 손에 힘을 더하다가.
헛웃음을 흘려버렸다.
하. 멍청한 해골 같으니.
검에 오러를 실으면 뭐해?
저렇게 의도가 뻔해서야 패링해달라고 대주는 거랑 다를 바가 없잖아.
차라리 방금 전에 포착하기 어려울 정도로 빠른 공격이 훨씬 더 위협적이었어.
다급할 필요는 없다.
긴장할 이유도 없다.
전력을 다할 필요도 없다.
그저 정확한 순간에 방패를 앞으로 내미는 것이면 족하다.
오러를 잔뜩 머금은 검과 신성을 겉에 둘렀을 뿐인 방패가 부딪히고.
고막을 꿰뚫고 들어오는 선명한 충돌음과 함께.
방패에 닿았던 검이 뒤로 튕겨 나갔고.
일렁거리는 오러의 너머로 해골의 텅 빈 눈이 보였다.
<…이 무슨.>
‘말했잖아요. 할배.’
자신 있다니까?